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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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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Jul 11. 2023

복날을 건너뛰지  못하는 이유

웬수같은 날이라도  누룽지 삼계탕

장마를 지나는 중이다.

올여름 장마는 시작부터 요란하더니 깜깜한 밤에 자주 폭우를 쏟아붓는다. 야행성 장마란다. 비가 그친 낮에는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마음속까지 습기가 들어찬다. 칙칙한 기분을 달래 가며 명랑한 일상을 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초복이다. 뉴스를 보니 오늘은 한낮 더위가 30도에 육박할 거란다. 열대야까지 더해져 삼복더위에 걸맞게 밤낮없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모양이다. 이럴 땐 식구들을 잘 먹여야 하는데, 불 볼일 없는 인덕션을 쓰면서도 주방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초복인데 저녁에 닭 한 마리 뜯어야지?”

전날 지인과 닭구이 집에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혼자 먹어서 미안했던 거다. ‘삼계탕 한 그릇 사 줄게.’라는 말이지만 만사 귀찮아 못 들은 척했다. 

해마다 삼복을 그냥 넘긴 적은 없다. 바빠도 복날에는 손수 끓인 보양식을 식탁에 올렸다. 강박에 가까운 의무감이었다. 식구들이 더운 여름을 잘 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시부모를 모시던 엄마를 보고 자라면서 생긴 의무가 아닐까 싶다. 


올해는 ‘강박적 의무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중이다. 주방에 머무는 시간도 되도록 짧게 갖는다. 갱년기 병으로 살림이 권태로운 탓도 있지만, 함께 밥 먹을 입이 줄어서인 듯하다. 두 딸이 각자 제집 생활을 하고부터는 음식 할 맛이 나지 않는다. 나 먹자고 지지고 볶긴 싫고, 남편과 둘이서 잘 차려놓고 먹자니 음식이 남아돌아 먹어 치울 일이 골치 아프다. 이런 이유로 요즘 우리 집 식탁은 단조롭다. 집밥에 진심이었던 내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좋은데 무섭고 눈물이 나요.”  어느 여배우의 수상소감이 딱 내 기분이다.  

  

오전 내내 여기저기서 복날과 닭값 얘기다. TV 뉴스에도 SNS에도 포털 사이트도 삼계탕이 메인이다. 줏대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대추, 은행, 전복, 황기, 찹쌀, 부추. 닭만 빼고 있을 건 다 있다.

한 그릇 사 먹고 말자, 싶었지만 이런 날은 식당에 가도 대우받지 못한다. 게다가 요즘 삼계탕 한 그릇에 18,000원. 물가가 올라 생닭도 비싸지만, 집에서 끓이는 게 번잡스럽지 않고 속 편하다. 





아무래도 닭 한 마리 삶는 게 좋겠다. 복날을 지킬 의무는 없지만, 그냥 지나면 숙제 안 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이번에는 삼계탕 대신 누룽지 백숙을 만들어야겠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게 닭이라니 맛있게 끓여 대접해야겠다.        

  

레시피 사냥을 시작했다. 25년 차 주부라도 남의 집 주방을 가끔 염탐한다. 특별한 비법을 발견할 때는 요리 초보처럼 환호한다. 요리도 유행 따르는 시대라 실력을 자주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시판용 간편 누룽지를 사용하라는 어느 블로거의 비법이 눈에 들어왔지만 써먹지 않기로 했다. 시판용 누룽지가 없으니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비법이다. 작년 복날의 흔적을 찾아 휴대폰 갤러리를 뒤적였다. 제법 여러 장 있다. 사진을 보며 머릿속으로 조리 순서를 정리했다. 내 입에 맞으면 그게 정답이다.   

  

변덕이 올까 봐 서둘러 시장에 다녀왔다. 찹쌀 한 컵을 불려두고 마늘 한 줌을 깠다. 꽁꽁 얼어 돌덩이가 된 아끼던 전복도 꺼내놨다. 인삼, 황기, 대추, 은행도 깨끗이 닦고 대파, 부추도 5cm 길이로 가지런히 썰어뒀다. 

닭 손질은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한다. 생닭에는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는 ‘캄필로박터균’이 존재할 수 있다. 씻다가 물이 튀어 다른 재료가 오염되면 낭패다. 배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내장과 핏기를 빼주고 날개 끝부분을 잘라냈다. 가위로 닭똥집(모래집)을 싹둑 잘라버리고 주변에 덕지덕지 붙은 노란 지방 덩이도 모조리 제거했다. 목 부분에도 은근히 지방이 많다. 누린내를 없애고 맑은 국물을 얻으려면 지방을 잘 제거해야 한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궈내니 뽀얀 닭살이 눈부시다.     

photo by 쓸모

생닭 손질한 싱크대를 소독하려고 물을 끓였다. 그 김에 이열치열 ‘뜨아 타임’을 갖는다. 꿀맛 같은 휴식이다. 싱크대에 등을 댄 채 발 뻗고 앉아 노트북을 켰다. 커피를 음미하며 지금의 순간을 글로 옮긴다. 무기력하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보다.


바닥이 두툼한 냄비에 찹쌀을 깔고 닭을 올렸다. 쫀득하고 꼬신 누룽지를 얻어내려면 냄비 바닥에 쌀을 잘 펼쳐야 한다. 나머지 재료들 넣고(야들한 부추는 먹기 직전) 물 1.8리터를 부었다. 눈대중 계량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수기에서 2리터를 받아 약간 쏟아냈으니 대략 그쯤 되지 않을까 싶다. 소금 반 숟가락 넣고 냄비뚜껑을 닫았다. 

강 불에서 20분, 중 불 15분, 약 불에서 10분 끓이면 누룽지 백숙 완성이다. 아직 불도 켜지 않았는데 요리 다 끝난 기분이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식탁에 바로 올리기로 하고 마저 글 쓰러 나왔다. 마치 마감에 쫓기는 작가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photo by 쓸모

    


도자기 명인께 선물 받은 분청자기에 백숙을 담아내야겠다. 시원한 열무김치도 꺼내고 막된장에 아삭한 풋고추도 곁들여야지. 부추겉절이도 잘 어울리겠다. 고급 삼계탕집처럼 보이려면 인삼주도 한 잔 있어야겠는데 술이 없으니 밥값 받기는 글렀다. 내가 쏘는 거니 남편이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설거지 걱정은 말고. 

어머나, 이게 웬 떡이야! 딸들이 없으니 둘이서 사이좋게 닭다리 하나씩 차지할 수 있겠다. 

결국 올해도 건너뛰지 못했다. 웬수 같은 복날.    

작년 중복에 먹었던 백숙_photo by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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