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다의 공백

산은 묻고 바다는 답한다

by 박시은

산의 공백

나는 산을 자주 탄다. 산을 오르게끔 인생이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정상에서 성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생각은 찰나일 뿐 돌이켜보면 네팔의 토롱라에서도 마지막 포인트는 감흥이 없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한다. PCT를 갔었어도, 지금의 나는 똑같았을 거란 생각. 걷는다는 건 나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나는 답을 찾을 수 있나? 네팔에서 9일을 내리 걸어도 못 찾았다. 6개월을 걸은 정우는 찾았을까? 그래도 산을 오르면 숨이 차니까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 된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과 하늘이 내 숨통을 조금은 트이게 해 주기에 그 조금을 느끼기 위해 오른다. 땅만 보고 묵묵히 걸으며 숨소리만 가득한, 토할 것 같은 내 몸에 순간의 공백이 들어선다. 네팔이 생각난다. 내 인생 가장 많은 공백이 들어섰던 9일.


바다의 공백

바다의 수평선을 보면 두렵다. 흐르는 물은 우울하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면 바다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 심연이 무서웠다. 아직도 여전히 그래서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번 달에 처음으로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갑자기 보고 싶었다.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윤슬이. 이때는 산 정상에 올라 건물로 가득 찬 풍경을 보면 당장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을 거 같았다. 그리고 올라갈 힘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숨을 들이켤 자신이 없었다. 바다는 편하겠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거 같다. 바다는 앉아있으면 되니까. 버거워서, 도시가 버거워서, 조용히 흐르는 세상이 고팠다. 사는 게 너무 지친 걸까. 사는 게 너무 버거운 걸까. 도착한 부산의 송정은 조용했다. 사실 바다는 차선책일 뿐 정확히는 페와 호수가 보고 싶었다. 페와호수는 엄청 큰 호수라서 끝이 안 보이지만 끝이 있다는 걸 안다. 그게 내 마음을 조금 더 편하게 한다.

왔다 갔다 하는 파도를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심하게 한 시간 동안 바라만 보았다. 다시 돌아가면 버틸 수 있게 내 짐을 다 가져가버렸으면 하며, 너는 끝이 없으니 내 버거움은 사소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기적인 나는 내 공백을 위해 바다에 짐을 버렸다. 그렇지만 짐은 어찌나 끈질긴지 서울까지 다시 쫓아오더라, 그래도 한동안은 가벼웠다. 무작정 찾아간 바다는 힘들다는 말조차도 버거운 나에게 약간의 답이 되었다.


산과 바다의 사이클

그래도 살아야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이번 사이클은 나를 쉽게 놔주질 않는다. 사랑과 일과 미움과 슬픔의 직사각형은 꽤나 비정형적이다. 항상 모든 건 떠나고 나는 남겨진다. 그래도 이번은 좀 너무하다 싶다. 이번 여름엔 도시가 보이지 않는 산에 가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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