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노트북, 스케치북, 펜, 파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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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이랑 책을 항상 들고 다닌다.
근데 웃긴 건, 잘 안 쓴다는 거다.
나는 그걸 그냥 불안해서 그런 줄 알았다.
뭐라도 안 들고 있으면 불안해지는 성격 같아서.
근데 오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오래도록 계획된 삶을 살았다.
계획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때 그때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늘 먼저였기 때문이다.
육아, 일, 생활.
하기 싫어도 해야 했고, 미루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무 때나라는 말이 중요하다.
그래서 노트북이랑 책을 챙긴다.
지금 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고 다니는 느낌에 가깝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다 챙기고 나면
오늘은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생긴다.
억지로 안 해도 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고,
그래서 결국 더 안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또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게으른 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너무 오래 ‘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와서,
이제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 아닐까 싶다.
지금은 실행보다 가능성이 더 중요해진 시기.
그래서 오늘도 다 쓰지 않을 걸 알면서 챙긴다.
언젠가는 정말 내가 원해서 꺼내 쓰게 될 거라는
별 근거 없는 믿음 같은 걸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