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있다는 믿음

1부

by nemo


미경 씨는 상담 중에 가끔 나의 정서와 겹치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럴 때면 나는 흠칫 놀란다.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의 감정에 스며들어, 잠시 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쉬는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짧은 영상을 보다가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였다.


한 그리스 소녀가 제니를 너무 사랑해 한국 사람을 처음 보고는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화면을 통해 영상 편지를 보내며 감격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미경 씨는 처음엔 그저 “얼마나 좋아했으면 저럴까” 하는 마음으로 조금 울컥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전 저 나이 때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짜릿해본 적이 없어요. 친구들이 콘서트 보러 큰돈 들여 서울 간다 할 때도 왜 저러지 싶었고요. 다 의미 없어 보였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왜 그랬을까… 엄마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함께 흔들렸다.

그 그리스 소녀는 아마 ‘닿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멀리 있던 존재가, 내가 동경하던 사람이, 화면 너머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단순히 연예인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내 마음이 향하던 무언가가 나에게 응답하는 순간에 가까웠을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뻗은 마음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되돌아오는 경험.


그런데 미경 씨의 말 속에는 다른 시간이 숨어 있었다. “그게 뭐? 나랑 무슨 상관?” “다 의미 없어.” 어쩌면 그 말들은 오래전부터 마음을 지켜온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간절히 좋아해도 소용없다는 감각. 기대해도 닿지 않는다는 체념.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는, 사람에 따라 ‘의지해도 되는 대상이 사라진 경험’으로 남기도 한다. 충분히 기대고, 매달리고, 마음껏 좋아해보고, 보살핌 받는 경험이 부족하면 마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을 만든다. 너무 좋아하지 말자. 의미 두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어차피 다 소용없다.


그것은 무심함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다.

그런데 그 소녀를 보며 울었다는 건, 그 방어가 잠깐 내려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저렇게 닿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해 보인다. 나는 왜 그런 적이 없을까. 나도 그러고 싶다. 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상담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내 삶의 숙제와 너무 정확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담자에게 솔직히 고백했고, 우리는 함께 울었다. 한때 나는 그리워하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아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기대감이라는 감정 자체를 잃어버렸다. 갈망하면 상처받는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탓일까. 청소년기의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좋아해본 적이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아니, 좋아하지 않기로 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억울함이 밀려왔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원망으로 바뀌었고, 원망은 세상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다 끝내는 허공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어디에도 둘 수 없는 마음. 이름 붙일 수 없던 빈자리. 우리는 그 구멍 난 자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동안 애써 외면해온 결핍을 함께 인정했다.


눈물은 슬퍼서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결핍을 또렷이 알아차릴 때 흐른다. 그 소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내 안의 빈자리도 선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장면을 보고 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직도 내 안에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신호다.


상담이 끝날 무렵,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제 마음 놓고 무엇이든 좋아해보자고. 그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문방구에 가서 한참을 서성여보고, 서점에서 괜히 책장을 넘겨보고, 화장품 가게에서 색을 시험해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고. 좋아해도 괜찮은 연습. 기대해도 괜찮은 연습. 닿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뻗어보는 연습.


어쩌면 우리는 지금, 소녀 시절 잃어버렸던 친구놀이를 다시 시작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아주 천천히 복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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