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후반
"딱, 있어! 일어나면 안 돼."
"알겠어."
대학 등굣길이 고단해 일찍 독립을 선언한 딸아이의 첫 자취방을 방문한 날이다. 딸은 내게 꼭 손수 밥을 챙겨주겠다며, 미리 약속을 잡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원룸에는 없는 게 없었다. 모든 것이 딸아이의 방식대로,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갖춘 채 정리되어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땀방울이 송골송글 맺히는 날씨.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베리아 벌판 같은 냉기가 살결을 스쳤다. 본능적으로 전기요금을 계산하며 잔소리를 하려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고이 접어 삼켰다. 대신 싱크대 아래 자리 잡은 작은 빌트인 세탁기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새삼 귀엽고 대견했다.
'밥도 해 먹고, 빨래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다 컸네.'
가방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아이가 늘 뒹굴었을 그 자리. 그곳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옛 시간과 지금이 교차하며 마음이 조금 울렁였다.
일월의 강추위를 뚫고 집을 나와 자취를 시작했던 나의 첫 공간에는 옷 가방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요리하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를 위해 앞치마를 두른 그 뒷모습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아이를 처음 독립시킨 뒤로, 나는 스스로 좋은 부모인지 자꾸만 되묻게 된다. 그때 지글지글 마늘 볶는 향과 고소한 고기 냄새가 온 방안을 가득 채웠다. 설렘과 어색함이 버무려진 공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따뜻한 연기가 후드 속으로 사이좋게 사라졌다. 딸은 시선을 요리 팬에 고정시킨 채, 내게 당부에 당부를 더했다.
"죽이지? 진짜 맛있어, 엄마! 내가 해줄게. 딱 가만히 있어. 알았지? 일어나지 마!"
"그래, 알았어."
딱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그 말에 눈시울이 핑 돌았다.
어릴 적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아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대여섯 살쯤이었을까. 오후 다섯 시 반이면 텔레비전에서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가 할 시간이었다. 가가멜과 아즈라엘만 없으면 참 행복할 것 같던 그 스머프들의 삶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올망졸망 모여 앉아 만화를 보던 그 시간은 삼 남매에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집안 어딘가에서 어김없이 내 이름이 불렸다. 아이는 셋인데, 심부름은 늘 내 차지였다. 다시다, 미원, 두부, 대파, 식용유... 꼭 무언가 하나가 모자랐고 엄마는 나를 찾았다. 때로는 못 들은 척 버텨보기도 했지만, 결국 등짝을 한 대 맞고 나서야 눈물을 훔치며 발을 쿵쿵거리고 일어났었다.
아빠도, 엄마도, 삼촌도 내 이름을 불렀다. 심지어 아빠가 엄마를 찾을 때도, 옆집 아줌마가 엄마를 부를 때도 나는 늘 불려 다녔다. 심부름이 끝이 아니었다. 만화가 끝나고 나면 콩나물을 다듬고, 멸치 똥을 떼고, 마늘을 까야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늘 움직여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 깊은 곳 어딘가에서 따뜻한 뭉클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마음을 데웠다.
"엄마! 어때? 죽이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주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쏟아졌다. 이 아이가 첫 이유식을 받아먹을 때 내가 보냈던 그 눈빛이었다. 대견함을 담아 기쁨을 재촉하는 그 눈동자.
이 한순간을 위해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나는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늘 움직여야 했던 사람에서, 가만히 있어도 되는 사람이 된 순간.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