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취미 모임을 정기적으로 나가면서 나는 조금씩 느슨해졌다. 사람들에게 내 말투와 유머 스타일이 익숙해지면서, 낯섦을 해소하기 위해 긴장하던 노력도 서서히 내려놓았다. 분위기는 부드러웠고, 신뢰는 높아졌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참석한 회원이 있었다. 용기 내어 나왔다는 그분에게 공감이 갔다. 자리를 배려하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 역시 잘 지내보고 싶은 내 노력의 일부였다. 하지만 친밀함의 표현으로 건넨 내 농담에 그분은 돌연 눈물을 쏟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짐을 챙겨 나가려는 그분의 모습에 내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상대가 상처를 입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바로 사과했다. 모임 전체의 분위기와 어렵게 발걸음한 그분의 마음을 생각하며, 사과를 넘어 그분의 마음을 살리려 애를 썼다. 짧고 굵게 달래는 시간이 지났고, 화제는 바뀌었다. 그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그림을 그렸지만,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정작 내 마음은 풀리지 않은 채 묵직한 돌덩이를 삼킨 듯했다.
미안함, 안도감, 고마움, 그리고 당혹감. 이 모든 감정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서 가시 돋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니, 상담사나 돼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분에게 나는 한 명의 회원이 아니라 '심리상담사'라는 거대한 프레임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상담사라는 신분은 대인관계에서 종종 독이 된다. "원래 잘 참잖아", "상담사니까 잘 알겠네", "상담사가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들은 나를 끊임없이 버겁게 만든다.
사실 사적인 약속을 잘 잡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는 고민을 늘어놓느라 정작 내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대화가 끝날 때가 많다. "어머, 내 말만 했네!"라며 일어서는 상대의 뒤태를 보며 나는 다음을 기약한다. '요즘 내가 무엇이 즐거운지, 무엇이 힘든지 물어봐 주겠지' 하는 기대는 매번 서운함으로 돌아온다.
상담사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학비를 들여 오랜 시간 훈련하고, 냉철한 피드백 속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사람이다. 상담실 안에서의 그 평온함과 통찰은 의식적인 노력과 혹독한 연습의 결과물이지, 상담사의 인격 그 자체가 신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도 필요할 땐 욕도 하고, 실없는 농담도 하고, 속풀이 비하 발언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다. 나는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상담은 상담실에서만 한다.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소통하려 애쓰는 것은 내가 상담사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역할이라는 존재는 프레임을 만든다. 그 프레임은 나를 강하게 묶어두고, 때로는 상대마저 그 안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쉴 때만큼은 그 무거운 역할과 작별하고 싶다. 나에게 '존중 한 스푼'을 더 얹어주며, 인간으로서의 내 삶은 그저 자유롭고 싶다.
[ 마움공감 치유노트]
심리학자 칼 융은 사회적 요구에 맞춰 쓰는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사회생활을 돕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가면에 매몰되면 진짜 나(Self)는 소외되고 지치게 됩니다. "나답지 않다"는 느낌은 가면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보다 역할을 삶 전체의 책임감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역할 기준을 높게 설정해두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책감을 타인에게 던지는 것을 '투사'라고 합니다.
(예시: 내가 지금 먹고 싶은데, “너 저거 먹고 싶지?”라며 내 식욕을 상대에게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인가요?”
[마음 기록하기] “나는 (상담사/엄마/직장인)이기 이전에, 그저 자유롭고 싶은 인간 (내 이름)입니다.”
한 줄 통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 칼 로저스(C. Ro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