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만장 해진 건 사교육 덕분
내가 언제부터 똑똑하다고 생각했을까 회고해 보면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을 것이다. 엄마는 내게 친구들과 함께 주니어플라톤이라는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시켜주었다. 주니어플라톤은 그룹과외 형태로 선생님과 다수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업이다. 책을 읽고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로 인상 깊은 구절을 꼽아오거나 질문지에 답을 해와야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그 내용을 함께 나누었다. 우리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아이로 컸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 그 대신 우쭐거림과 잘난 척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4학년이 돼서는 집에서 차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까지 글쓰기 수업을 받으러 갔다. 모르는 친구 3명과 같은 학교 친구 3명과 함께 했다. 선생님은 정년퇴직한 선생님으로 보였고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었다. 본인이 만든 책을 나눠주며 커리큘럼에 따라서 글쓰기 수업을 따라갔다. 글쓰기 수업과 더불어서 암기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은 특이하고 임팩트 있는 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지막 수업에는 에세이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러면 그것으로 선생님이 첨삭해 주시고 모아 책으로 인쇄시켜 주셨다. 하지만 나는 끈기가 없어서 그런지 숙제를 해가지 않았다. 숙제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책도 없다. 그렇게 강의를 마쳤지만 친구들 중에 나만 에세이 책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 올라갈 때 독서논술 그룹과외를 받았었다. 선생님은 같은 학교 친구의 엄마였다. 선생님은 이 지역 국립대 국문학과 출신으로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을 논술수업을 한 모양이었다. 이 선생님과의 수업에서 많은 것을 습득했다. 한국문학을 이광수의 무정으로 알게 되었다. 경제학책을 읽어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도 알게 되었다. 이 선생님 또한 항상 글쓰기 숙제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게 그 숙제를 해가지 않았다. 숙제를 하지 않고 수업에 임해도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멋진 척할만한 소재가 필요할 뿐이었다.
나중에는 책을 다 읽지 않는 경지까지 가게 되었다. 멋진 제목을 가진 책이나 어려워 보이는 책이면 수집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부모님은 어느 것보다 책에 돈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어서 적극적으로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가 그 책을 차마 다 읽지 않는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결국 그렇게 산 책들이 단지 책장에 전시용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 것이다.
독서 논술에서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지식으로 마치 내가 똑똑해지는 느낌을 받게 해 주었다. 등교해서 친구들과 대화하면 튤립전쟁을 아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책상 밑에서 단테의 신곡을 꺼내 들면 어떻게 그 책을 읽냐며 우러러보는 그 시선을 즐기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나는 박학다식한 이미지를 원했던 것이다. 너네와 다르다는 하나의 특권의식을 가지고 싶었다.
친구에게 "너 괴테의 순수이성비판 읽어봤어?"라고 하면 10명 중 10명은 모두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그냥 친구들은 괴테가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 또한 괴테라는 작가와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괴테가 누군지도 순수이성비판이 무슨 책인지도 몰랐다.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우위에 점하기에는 딱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독서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앞서 나의 잘난 척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 할수록 진짜로 읽은 친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잘난 척이 통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향으로 그들과 똑똑함을 구별해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