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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한 Feb 17. 2023

성적표가 말해주고 있어

참담한 수능 성적표

멍청이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이미 지식의 상아탑인 대학에 있기를 원했다. 내신 준비와 수능 준비를 하는 것보다 그냥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는 공부를 했다기보다 에세이를 썼다. 나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사색하지 않은 친구들을 미덥지 않게 보았다. 하지만 대학에 있기 원하려면 친구들이 하는 것을 따라 했어야 했다. 오히려 멍청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영리했던 것이었다. 왜 이런 당연한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것일까? 그럼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능이 점점 다가오자 무리에 이끌려 나도 긴장감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수능에 대한 불안감이라기보다도 똑똑한 이미지가 벗겨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정공법으로는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자 나는 수시로 입학사정관 전형을 노렸다. 나름 꾸준히 대외활동을 했고 남들보다 학생기록부가 길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입사제 또한 내신성적과 최저 수능 등급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대단한 착각을 한 것이다. 공부를 못하더라도 전공에 대한 지식과 열정으로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수능 당일 아빠의 포터트럭으로 등교를 했다. 고사장은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남고로 배정되었다. 무엇 때문에 떨리는 것일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으레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같은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꼼꼼히 시험을 치르는 노력보다도 이 시간이 후딱 지나갔으면 했다. 나는 그 와중에 국어 문학지문에 감탄하며 딴생각을 했다. 이렇게 시험 중에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바람대로 수능이 끝났다. 후련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줄곧 6년 동안 내게 물어봤던 그 질문이 다시 찾아올까 봐 겁났다. "소한아 시험 잘 봤어?" 하지만 이번에도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 시험 망했어."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집까지 걸어서 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관심이 나를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던 나에게 수능 잘 봤냐고 물어봤다. 예상할 수 없는 장소에서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 내게 그런 질문을 했다. 나는 애매모호하게 대답을 하고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나는 정처 없이 걸어가며 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의 마음이 스스로를 골목으로 내몰았다. 점점 내 주변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이곳저곳 누비다가 집에 도착했다. 찹쌀떡이 나를 먼저 반겼다. 수험생들이 흔히 하는 미신들이 있다. 그것 중에 가장은 엿이나 찹쌀떡이다. 근데 이런 건 시험 보기 전에 먹는 거 아닌가? 아무튼 나는 태연하게 다 먹은 도시락 통을 건네며 가족 품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은 그 아주머니와 달랐다. 내게 질문한 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들의 상태를 알고 있었나 보다. 홀로 방에 들어가서 메가스터디 예상 답안지를 보고 가채점을 해봤다. 마치 그 과정은 복권 1층 당첨자의 모습과 흡사하게 은밀했다. 하지만 점수는 처참했다. 비로소 그제야 내가 똑똑하지 않았다는 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사망진단서를 받은 듯했다.


올 5등급 성적표를 받았다. 모든 과목을 5등급으로 맞추기도 어려울 텐데 나는 그것을 해냈다.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건네주실 때 그의 미묘한 표정이 내겐 상처였다. 3학년 때 반장이었던 나는 나름 선생님과 신망이 두터웠다. 그래서인지 그의 실망도 크게 부각이 되었다. 교실에서는 서로의 성적표를 비교하며 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가방 안에 넣어버렸다. 수시로 붙은 아이들과 최저를 맞춘 친구들은 기세등등했다. 정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분주했다. 나는 그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어느 쪽에도 속해지 있지 않는 나는 길을 잃어버렸다.


"소한아 너 철학과 갈 거야?"라고 질문한 친구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몰랐나 보다. 당연히 알 길이 없다. 나는 함구증에 걸린 아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괜찮은 척했다. 비슷한 질문이 들어오면 아리송하게 답변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학교 가는 게 싫었다. 나에게 관심주는 사람들이 싫었다. 나는 점점 깊게 사망의 골짜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수시 2차 원서접수기간이 열였다. 4점 초반대 수시등급이었던 나는 수시 2차가 마지막 기회였다. 인근 사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는 죄다 지원했다.  면접을 보지도 않고 한 사립대는 내게 합격증을 내줬다. 그리고 또 다른 사립대에서는 면접에서 쾌재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취직이 잘되는 과를 가라며 전문대 공대를 가라고 했다. 나를 여기까지 끌어내리다니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어째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전문대조차도 대기순번을 받고 한두 바퀴 돌고 합격했다. 복도에서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그냥 기술 배우려고요."라고 담담한 척했다. 하지만 나는 전문대로 진학하게 되는 사실을 쉽게 받아 드릴 수 없었다. 똑똑함을 뽐낼 수 없던 이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침울했던 암흑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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