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정민 May 24. 2024

인생, 삶의 시작과 그 끝에 대하여

- 용서를 구하는 삶(죽음) -

시작과 끝이 있는 인생이지만 삶의 형태는 다양하다. 다양한 삶은 죽음과 공존하면서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한 사람이 태어나,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원형을 담은 액자라는 평을 받는다.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듯 삶의 시작과 끝은 또 다른 시작과 끝으로 이어지고 공존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공존’에 대한 사고만으로도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다. 


 삶과 죽음의 공존에 관한 볼프 에를브루흐의 <내가 함께 있을게>를 둘째 딸과 같이 읽었다. 오리와 그의 친구 ‘죽음’이 늘 함께하다가 죽음이 영원한 사랑(자줏빛 튤립)을 담아 오리를 보내준다는 이야기다. 어린 딸은 어른들과 달리 죽음은 암울하고 슬프다는 것만 받아들인다. 어린애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으니 당연하겠다. 언젠가 성장한 딸이 다시 읽는다면 생명이 유한한 인간에게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 가르쳐주는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우리 곁에 늘 죽음이 있는 만큼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바람직한 인생, 삶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위 잘나가는 판사 이반 일리치는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그의 삶은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우리와 너무 닮은 이반 일리치가 삶에 대해 깨닫는 순간을 옮겨본다. “정말로 나의 의식적 삶이, 삶 전체가 ‘그게 아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투쟁하려는 충동, 당장 떨쳐 내려 했던 아득한 저 충동이야말로 진짜고 나머지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변호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돌연 스스로 변호하는 데에 참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자 변호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우리는 수많은 이유를 대면서 ‘나는 잘 살았노라’라고 삶을 정당화·합리화하면서 산다. 다행히 이반 일리치는 죽음 전 그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는다. 바람직한 인생이란 용서를 구하고 주위 사람들과 나 자신도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으며 죽음 대신 빛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심윤경 작가는 소소한 오해와 불만은 시간 속에 잊혀지고 추억이 되지만, 깊어진 상처와 원망은 시간과 함께 괴물이 된다고 했다. 깊은 상처와 원망을 주는 괴물 같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삶의 의미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구원받지 못 하리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처럼 그들도 용서를 구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는 기회를 꼭 붙잡길 바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들이 삶이 다른 삶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오멜라스를 떠나지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