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고
<심청전>의 심청이는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도록 공양미 300석을 받고 자신을 인당수에 던진다. 심청이는 인당수를 평화롭게 건너고 싶은 뱃사람들에게 단지 ‘희생양’일 뿐이다. 아슬러 K.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딜레마에 놓인 인간의 삶의 자세를 희생양을 통해 함께 고민하게 한다.
오멜라스는 도로 표지판에서 빌려온 단어로, ‘살렘(오리건) Salam(Oreg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라고 한다.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다. 평화와 행복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오멜라스는 이상적인 도시로 묘사되며, 그곳의 모든 사람은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산다. 그러나 이 행복한 사회의 기반은 어떤 아이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어린아이는 오멜라스의 행복과 번영을 지탱하기 위한 희생물이며, 그의 비참한 상황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기 시작한다. 당신이라면 오멜라스에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남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공리주의의 오류를 떠오르게 한다. 오멜라스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완벽하지 않다. 대부분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는 행복할 거라고 믿지만 그들은 지하에 있는 아이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아이의 고통을 모른 척해야 한다는 자체가 대다수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마이클 샌덜 <정의란 무엇인가>의 ‘철로를 이탈한 전차’ 이야기에서 도덕적 딜레마는 도덕 원칙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다고 한다. 하나는 가능하면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 또 하나는 아무리 명분이 옳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이다. 많은 생명을 구하자니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난처한 처지, 즉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계획을 꾸민 아돌프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이다. 악은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특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는 최종적으로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게다가 아렌트는 ‘평범’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우리도 누구나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경종을 울린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오멜라스 시스템에 올라타 그것을 다람쥐처럼 뱅글뱅글 돌리는 데만 집중하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르 귄은 오멜라스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시스템의 오류를 인지하고 오멜라스를 떠나지 말고 남아서 오멜라스 시스템을 바꾸라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되느냐 악마가 되느냐는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는 아렌트의 주장을 상기할 때, 우리는 현행 제도를 부여된 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제도 자체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 가는 데 사고와 행동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봄날> 뮤직비디오의 가짜 행복에서 벗어나 불행한 현실을 기억하고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하라는 BTS의 세계관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