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가 흔들리는 시대, 신뢰의 지도를 다시 그리다

스테이블코인 머니 리셋 후기

by JF SAGE 정프세이지


돈이 화두가 된 시대다. 참여하는 북클럽에서도 11월과 12월에 읽게 된 책들이 경제 관련이었다. 그중에서 <스테이블코인 머니리> 을 읽고 나서 질문이 생겼다.


"정부가 만들지 않은 돈을 사람들이 믿고 쓰기 시작한다면, 그건 화폐라고 불러도 될까?"



화폐의 본질은 종이가 아니라 '신뢰'였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화폐의 본질은 '종이도, 숫자도, 코드도 아니라 '신뢰'이며, 그 신뢰는 시대와 권력, 기술 수준에 따라 계속 이동해왔다고.

우리는 오래도록 '돈은 나라가 만드는 것'이라는 상식 속에 살아왔다. 세금, 월급, 연금 모두 그 틀 안에서 움직인다. 이 책은, 이제 신뢰가 그 틀 밖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비트코인은 그런 흐름에서 등장한 첫 시도였다. 누구나 장부를 열람할 수 있고, 기록을 조작할 수 없고, 발행량이 제한된 탈중앙 전자화폐. 하지만 비트코인은 너무 많이 흔들렸다. 가격이 급등락하는 자산은 '돈'이라기보다 '디지털 금'에 가까웠다.

그 한계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스테이블코인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방코르에서 스테이블코인까지, 잊힌 꿈이 다른 이름으로 돌아오다

책의 1장은 조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인즈가 꿈꿨던 '방코르(Bancor)', 브레턴우즈 회의와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케인즈는 국경과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보다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국제결제 시스템을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의 승자는 미국이었고, 세계는 달러 중심의 질서로 흘러갔다.

국경마다 다른 화폐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여러 문제를 낳았다. 환율 변동 위험, 국제 송금의 높은 수수료와 시간 지연, 자본 통제와 금융 제재, 기축통화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종속 관계.

케인즈의 방코르는 결국 채택되지 못했지만, '국경을 넘는 가치 교환의 효율성과 안정성'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말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방코르와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같은 꿈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는 존재라고.


인류의 오래된 열망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

책은 스테이블코인을 '인류의 보편적 열망과 기술이 만난 지점'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열망'은 거창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적은 수수료로 돈을 보내고 싶은 마음, 은행 점검 시간과 국경에 막히지 않고 언제든 돈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 자국 통화가 불안정해도 가족의 생활비와 내 삶의 기반만큼은 지켜보고 싶은 마음, 은행 계좌 하나 만들기 어려운 사람들도 금융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유로·엔 같은 법정통화와 1:1로 연동되면서, 블록체인의 속도와 투명성을 결합한 디지털 화폐다. 송금·결제·정산이 몇 초 안에, 거의 수수료 없이 이루어진다. 중개 은행도 필요 없고, 국경도 크게 의미가 없다.

책은, 이것이 단지 '새로운 코인 하나 더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의 화폐·금융 시스템이 가진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달러 패권, 국가부채, 그리고 '탈중앙'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코인 투자로 얼마를 벌 수 있는가' 같은 얕은 호기심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신, 이런 구조를 보여준다. 달러 패권의 균열 – 금융 제재, 러시아 자산 동결,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다'라는 냉정한 문장. 국가 부채와 명목화폐에 대한 불신 –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이후의 전 세계적인 유동성 공급, 그리고 그 부작용들. 탈중앙화와 개인 주권에 대한 열망 – 소수의 주체에게 집중된 신뢰가 만들어낸 도덕적 해이, 불투명성, 배제와 검열.

'탈중앙'이라는 말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신뢰를 소수에게 몰아주지 않으려는 시도'라는 게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거대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고,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도구들이 필요해졌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기업이 만든 돈, 그리고 디지털 달러 전쟁

책의 2장과 3장은 기업과 국가가 어떻게 이 판에 뛰어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테더(USDT)와 USDC, 리플의 RLUSD, 페이팔의 PYUSD, 팍소스의 USDP, 바이낸스의 BUSD. 이름만 들어도 어지러운 플레이어들 뒤에는 블랙록, 서클, 코인베이스 같은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 세계를 잇는 거대 기업들이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미국과 유럽연합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새 판을 규정하려고 움직이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미국의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은 스테이블코인을 결제용 디지털 자산으로 별도 분류하려는 시도이며, '누가 이 자산을 감독할 것인가'를 두고 규제 기관들의 관할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연합의 MiCA 법안은 유럽 전역에서 디지털 자산을 공통 기준으로 규제하여, 질서 안으로 들여와서'통제된 혁신'을 추구하려는 전략이다.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세계는 지금,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화폐 전쟁을 치르는 중이구나.'


이 책이 내게 남긴 한 줄 요약

책을 덮고 나니 머릿속에 이런 문장이 남았다.

'스테이블코인은 결국, 우리가 믿어온 화폐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거울이다.'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화폐 발행은 더 이상 국가만의 권한이 아니다. 누구나 디지털 지갑을 만들고, 디지털 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중개인 없이 전 세계와 거래할 수 있는 시대.

물론 그만큼의 위험과 과장도 함께 따라온다. 책은 이 부분도 눈감지 않는다. 디지털 달러화가 각국의 통화 주권을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 스테이블코인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는 점, 규제의 불확실성, 신뢰 관리의 부담, 투기적 과열의 위험.

저자는 마지막까지 '이건 만능해결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지금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키워드라고.


50대인 내가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것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건, '부가 없는 개인은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책은 그 답을 친절히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이 구조를 먼저 이해하라'고 말한다. 화폐의 본질은 신뢰라는 것, 그 신뢰가 이동하고 있다는 것, 그 한가운데 스테이블코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국가와 기업이 이 판에서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내 연금, 내 노후, 내 자산, 내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기술과 정책의 언어 사이에서 자꾸만 개인은 작아지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리지는 말자.

<스테이블코인 머니리>은 나에게 그런 최소한의 '지도'를 건네준 책이었다.


'코인에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흐름은 알고 싶은 생각에 코인거래소에 등록을 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시대의 바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지금 내 발밑에서 어떤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위에서 나는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할지, 그걸 좀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화폐가 흔들리는 시대, 신뢰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질문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한 번쯤 천천히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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