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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크가드너 Aug 13. 2024

조금만 참지 아름다운 이별이 가능했는데

퇴사와 정원


1차 퇴사 날은 7월 31일. 


뜻밖의 제안과 성장


2년 전 카페에서 일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지만 대형카페 실장으로 제안을 받았다


‘선례님 ~~혹시 주변에 카페에서 일을 할 사람 있을까요?  주변에 좀 알아봐주세요. 그것보다 선례님께 부탁을 하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해요. 그쪽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음료 만드는 거 쉬워요. 금방 배워요. 다른 것들도 배워서 하면 되요. 선례님네서 여기까지 25분이면 되요.’


대표의 말에 귀가 얇은 난 ‘딱 1년만 하자.‘라는 맘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남편의 퇴직 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기회인가 싶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적응을 하는 것처럼 하나씩 배워가며 1년을 했다. 하고나니 이제 쫌 일을  할 정도가 됐다. 스케쥴도 쉽게 짤 수 있고, 연차연차와 연장시간등 노무사에게 알려주고 되돌아온 급여대장 확인을 해 대표에게 넘기는데 문제가 없다. 지줄매출정리 하고,  직원관리도, sns홍보도 익숙해져 초등학교를 갈 준비가 된것 같았다.


숫자는 아직도 젬병이다. 숫자땜시 생긴 에피소드들이 많다.  


홈페이지 만들어준다는 업체에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대표님은 화가 나셨겠지만 '어쩌겠어요, 실장님이 잘해고픈 맘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이렇게 마무리를 해주셨다. 


한 번은 노무사에게 톡으로 월 급여 300만 원이라고 적어서 보냈는데  연봉 계약서 360만 원으로 왔다. 그걸 확인을 못하고  김모군에게 주고 사인을 받았다. 그 친구는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자잘한 잘못을 하며 1년을 보내니 음료도 제법 만들고 브런치도 땜방을 할 수 있고 회계도 sns 홍보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났다. 



1년만 하고 그만 두는 건 나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한 대표를 배신하는 일같아 '1년을 더하자 24년 8월 7일이 나의 퇴사 일이야' 설정을 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

 


퇴사결정과 인수인계 혼란으로 번복


매출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컨설팅을 받는 중에  내 퇴사 의지를 알리고 2-3차례 면담후 날짜를 7월 31일로 정했다. 


컨설팅 업체에서 전문가라고 소개 받은 미래의 점장인 인영씨가 인수인계차 왔다. 


그녀는 나랑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직원들을 먼저 만나 벌집을 만들고 갔다.


‘ 실장님 , 그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스케쥴,등 각종 서류를 달라고 하면서 직무유기라고 했어요. 빵 만드라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들이닥쳐서요. 매너도 없이요.예전에 500만원 넘게 받았다라는 소리만 하면서요. 과거가 뭐가 중요해요?‘ 베이커리 강팀장은 불만을 마구 쏟아냈다.



음료팀 막내에겐 ‘ 난 아직 계약서도 안받았다. 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것 저것 묻고 갔다.



직원들과 나와 대표까지 흔들어놓고 인영씨는 대표에게 잘렸다. 


내가 관리자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고 시스템도 세팅을 해준다니 디시 해볼만하지 않을까? 게다가 힘들어하는 일도 줄여준다고 하니,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들도 가능할 것 같아  덜컥 해보겠다고 답을 했다. 


일 년 중 5개월은 4일 근무하고  토요일은 격주로 쉬는 조건이었다. 


 더 이상은 할 수 없어


컨설팅 회사 직원과 말하는 중에  '내가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구나.내게 제시된 조건들 가지고 매출부진을 극복할 수 없겠다. 앞선 2년처럼 열심히 해야한다면 더 이상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과 다시 면담을 하고 '저를 정리해 주세요.' 부탁을 드렸다. 


감사와 보은 2년이면 충분했고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에서 일을 계속하는 건 아니다.


어떻하다 보니 내가 맘 먹은 8월 7일까지 일을 하고 그만두었다. 



대표님께 인수인계를 하고 본관에 내려가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평소엔 멀다고 올라오지 않던  직원들이 사무실 앞까지 와서 눈물로 배웅을 했다. 마지막 퇴근을 했다.


정원일은 중독되기 쉬워


집에 오르내릴 때마다 풀로 점점 무성해진 계단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몸이 피곤하니 안 보이는 척하고 지나다녔다. 퇴사도 했으니 계단부터 정리를 해야지.


퇴사 첫날.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오랜만에 요가를 하며 땀을 흠뻑 흘렸다.

요가를 하는 중 오던 비가 그쳐 눈에 가시 같은 계단을 정리하러 나갔다. 먼저 길냥이 작고에게  밥을 주고, 휴가 간 앞집 휘네 가족을 대신해 무지개에게  아침을 챙겨주러 내려갔다.  



밥을 주는 걸  아는지 무지개는  눈으로 나를 쫓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엄청 지어대는데. 소리만 요란하지 엄청 순한 눈을 가지고 있는 무지개.


전정가위와 호미를 챙겨 장갑까지 장착을 하고, 일단 키가 커서 넘어진 범부채를 잘라내니 조금은 깔끔해졌다. 드러누워서 넘어가는 불편을 주고 있어 과감하게 베었다. 



계단 사이사이에  자라고 있는 버들마편초는 좋아하는 꽃이라 불편해도 옆으로 지나갔다. 몇 번 오르내리자 맘이 바뀌어 뽑아서 버리지는 못하고 자리를 옮겨 주었다. 




조만간에 우리 집은 보라색의 버들마편초가 차지할 듯하다. 뒤늦게 자라기 시작한 어린 마편초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씨앗들이 뒤늦게 발아를 했구나.




오늘은 계단 절반만 해야지 마음 먹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하고 있다. 왼쪽에 조팝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라 있어 전정가위를 든 김에 아주 짧게 변화를 시켰다. 뒤에 있는 다른 나무들이 보이고 빡빡함이 사라지니 시원하다.


계단 오른쪽도 왼쪽도 덩굴식물이 판을 치고 있다. 콩과 식물인데 그냥 둘까? 콩과 식물은 질소고정을 잘해 땅을 비옥하게 하니까 잠시 고민을 한다. 다른 식물들을 감고 올라가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제거해 주고 싶다. 순전히 식물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이다.



핸드폰은 방전되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기분은 좋다. 여기까지만 하자 하면서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계단 절반과 주차장 한쪽과 다른 나무를 침범하고 있는 대추나무 가지를 정리했다. 



 정원관리로 찾은 평화와 설레임


퇴사 후 첫날이라 생각들이 많았으나  정원일을 통해 머리를 비울 수 있어 좋았다.


대표랑 나랑 특별한 관계라 생각했지만 아닌가보다. 단톡방에 내가 그만둔다는 공지글을 올렸고 그에 따라 대표와 모두에게 인사를 남기고 단톡방을 나왔다. 내가 나가기까지 조금만 기다리지, 대표는 이미 다른 단톡방을 파서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조금만 참지.


본관에 갈 일이 있어 내려가는 길에 직원들과 함께 있는 대표를 보고 손을 흔들었는데 의도적인가 싶을 정도로 모른척 했다. '어 이거 뭘까?' '지난번에 정리를 잘한거 아닌가?' '깔끔하지 않은 이 기분은 뭘까? '


대표가 나에게 서운한거구나. 대표도 어떻게 나를 보내야할 지 모르는구나. 성격 참 급해. 그래도 조금만 참지, 그럼 아름답게 끝날수 있었는데.



정원일에 몰입할수록 어지러웠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여유가 생겼다.


 정원 지기로 삶이 기대가 되는 날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풀로 가득한  상태의 정원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해줄게.




                                        카페 실장에서 정원지기로 거듭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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