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형 화재사건, CCTV 영상으로 밝혀진 진실

화재원인 및 발화원인을 둘러싼 4년간의 법정 투쟁

by 토빈한

2021년 초 인천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새벽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이 번지면서, 의뢰인의 건물을 포함한 주변 건물들이 전소되었다. 문제는 합동감식 과정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소방당국이 의뢰인 건물의 잔해에서 발견된 '단락흔'과 '아산화동 증식발열' 흔적을 근거로 최초 발화지점을 의뢰인 건물로 특정한 것이었다. 국과수는 해당 흔적이 외부 화염으로는 형성되기 어렵다고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뢰인의 건물이 화재의 최초 발화지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감식 결과는 그대로 1심 재판부의 판단 근거가 되었다.


1심에서 패소한 의뢰인은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했다. 전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응하였지만, 결국 수억 원대 보험금 구상 청구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항소심에서도 발화 원인과 법적 책임을 둘러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되었지만, 쟁점 자체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의뢰인의 건물 잔해에서 발견된 단락흔과 아산화동 증식발열 흔적만으로 최초 발화를 단정할 수 있는가였다. 국과수, 소방당국, 보험사, 1심 재판부는 해당 흔적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았으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빠져 있었다. 바로 화재 현장을 기록한 CCTV 영상이었다.


항소심에서 필자는 위 쟁점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화재 원인을 밝히는 데 가장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는 CCTV 영상이었다. CCTV 영상에는 최초 발화 위치, 불길의 방향, 확산 속도와 시간적 순서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국과수와 소방은 합동감식 과정에서 CCTV 영상 분석을 소홀히 한 채 건물 잔해만으로 발화 지점을 단정했고, 1심 재판부 역시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물론 야간 촬영 영상의 특성상 분석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합동감식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상황에서, 1심 법원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명백한 문제였다.


항소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재판부도 CCTV 영상 감정에 소극적이었다. 재판부도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소송대리인으로서 화재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면 전문 영상감정 절차가 필수적임을 강조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별도의 전문가 의견서까지 제출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도 소송대리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영상 감정신청을 채택하였고, 이는 사건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영상감정 결과는 명확했다. CCTV 영상에서는 화재가 의뢰인의 건물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인접 건물 내부에서 먼저 불꽃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영상감정 결과를 근거로 1심 판결을 뒤집었다. 판결문에서도 국과수와 소방이 CCTV 영상 분석 없이 단락흔만으로 발화 지점을 특정한 것은 부당하며, 1심 재판부 역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점을 명백한 사실오인으로 지적했다. 지푸라기라는 잡겠다는 심정으로 신청한 CCTV 영상에 대한 감정 결과가 항소심에서 판결결과를 정면으로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승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만약 항소심에서 판단이 바로잡히지 않았다면, 의뢰인은 수억 원에 달하는 구상금 채무를 홀로 떠안고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재는 그 자체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재난인데, 감식기관이 성급히 책임자를 특정하고, 법원이 이를 검증 없이 받아들일 경우 피해자는 반복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 의뢰인의 억울함을 해소한 이번 과정은 변호사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이었지만, 동시에 아쉬움도 남는다. 국과수와 소방이 조금만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더라면, 의뢰인은 4년에 가까운 시간을 억울함 속에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이 오랜 기간 집요하게 싸운 끝에야 비로소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법적 판단은 추측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 위에 세워져야 하며, 국과수, 소방, 보험사, 법원조차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은 결코 우연히 드러나지 않으며, 끝까지 따지고, 증명하고, 싸워야만 도달할 수 있다. 실체적 진실을 향한 의뢰인의 집념, 영상전문가들의 객관적 분석, 소송대리인의 논리적 입증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다. 마침내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어 무척 다행이지만,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년 만의 사기죄 유죄판결 및 피고인 법정구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