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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파고든 보이스피싱 범죄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범죄

by 토빈한

1.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사태가 던진 충격


최근 캄보디아 현지 범죄조직이 우리 국민을 납치·감금해 보이스피싱 범행에 동원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일부는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광고에 속아 해외로 건너갔다가 감금·폭행을 당하며 범행에 강제로 가담했다고 한다. 한국인을 속이기 위해 또 다른 한국인을 유인하고 이용하는 행태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 자체로 참담하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외 범죄가 아니라, 보이스피싱이라는 거대한 범죄 생태계의 실체가 얼마나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지에서 협박이나 감금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범행에 가담한 이들의 사정은 무척 안타깝다. 만약 행위자가 피해자를 직접 속이거나 자금 이체를 지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범행의 불법성을 충분히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중간책 이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 위협이나 감금 등으로 강제로 가담했고, 범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정황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면 형사책임이 감경되거나 면책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보이스피싱의 진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한평생 모은 돈을 한순간에 잃고 재산은 물론 건강과 가족관계까지 무너지는 사례가 빈번하다. 실제로 필자가 담당한 사건 중에는 수십 년간 교직에 몸담으며 모은 7~8억 원을 한 번에 편취당한 피해자가 있었다. 여러 가해자들로부터 수천만 원의 합의금과 변제를 받아냈지만, 실제 피해액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피해자의 절망감과 상실감은 돈으로 결코 보상될 수 없었다.


2. 일상 속에 스며든 보이스피싱의 공포


얼마 전 부모님께서 낯선 전화를 받고 불안해하며 '보이스피싱인지 확인해 달라'라고 연락하셨다. 내용을 들어보니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었다. 즉시 112에 신고해 계좌를 정지시키고 휴대폰을 초기화했기에 다행히 금전적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보이스피싱이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보이스피싱이 이처럼 극성을 부리는 것일까? 과거에는 집안에 현금이나 값나가는 물건을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거액의 현금이나 자산을 집 안에 두는 일이 드물다. 유동자산 또한 대부분 휴대폰을 통해 관리된다. 집 안에서 훔칠 만한 물건이 사라지자 전통적인 강도나 절도는 줄어든 반면, 전화나 메시지를 이용한 ‘비대면 범죄’가 급격히 늘어났다. 범죄조직 입장에서는 위험 부담이 적으면서도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보이스피싱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에 연루될 수 있고, 심지어 가족을 사칭한 메시지조차 의심해야 한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이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특정 연령층이나 사회적 계층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신뢰와 안전을 갉아먹는 ‘일상화된 범죄’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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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단 관여자만 처벌받는 왜곡된 현실


보이스피싱 범죄는 일반적으로 총책–중간책–말단 관여자로 구분된다. 총책은 해외에서 범죄조직을 지휘하며 수익을 독점하고, 중간책은 피해자를 속이거나 자금을 이동시키는 핵심 역할을 맡는다. 반면, 말단 관여자는 범행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현금 수거책이나 전달책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수사 현실은 말단만을 엄벌하는 방식으로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해외 거점의 총책이나 중간책을 검거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사건에서 말단 관여자들만 형사처벌을 받는 것이다. 심지어 범죄의 전체 구조를 모른 채 단순 전달 역할만 했음에도 중형을 선고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취업사이트나 온라인플랫폼을 통해 ‘단기 고수익 아르바이트’나 ‘해외 근무’ 등의 미끼를 던진다. 갑작스럽게 해고된 청년,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부나 학생들이 표적이 된다. 그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조직에 의해 이용당한 또 다른 피해자에 가깝다. 물론 처벌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단만을 엄벌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보이스피싱을 근절할 수 없다. 범죄의 실체를 모른 채 지시받은 대로 움직인 사람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가혹하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4. 강력한 처벌과 함께 구조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


이번 캄보디아 사태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해외 거점과 중간책 이상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보이스피싱의 ‘산업화된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범죄 수법이 교묘해진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의 디지털화와 맞물려 나타난 구조적 변화의 결과다. 범죄조직들은 해외 거점을 옮겨가며 보이스피싱 범행을 지속할 것이고, 그 수법과 죄질은 더욱 악질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와 수사기관은 보이스피싱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함께, 보다 선제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국제 공조 수사체계를 강화하고 해외 거점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물론, 취업 취약계층을 보호하며 온라인 플랫폼과 구직사이트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금융보안과 예방 교육을 확대하는 등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대응이 병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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