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유물 처분행위와 채무부담행위의 경계, 신의칙이 지켜낸 조합원의 권리
1. 재개발·재건축조합을 둘러싼 법적 분쟁
최근 도시 곳곳에서 재개발·재건축조합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급증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사업은 단순히 노후 건축물을 철거하고 신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합원, 토지소유자, 시공사, 조합장, 지자체 등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 속에서,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상 사업성 평가, 자금 운용의 투명성, 분양 방식, 시공사 선정 절차 등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이는 곧 조합 내부의 갈등과 각종 소송으로 비화된다. 갈등이 심화될 경우 형사고소나 민사소송, 행정쟁송으로까지 확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미·중 무역갈등과 글로벌 관세전쟁, 국내 건설경기 침체, 공사비 및 자제비 상승 등 외부 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재개발, 재건축조합 내 불신과 갈등이 한층 심화되고 있다. 특히 자재비와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사업비가 당초 계획을 크게 초과하게 되자,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사업의 지속가능성과 조합 집행부의 운영 투명성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그 결과 법원에는 총회결의 무효확인소송, 총회결의 취소소송, 조합장 지위 확인소송 등 다수의 사건이 계류 중이며, 행정기관과 수사기관에서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관련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2. 토지대금 대신 분양권을 지급받은 조합원 사건
최근 필자가 담당한 한 사건 역시 조합원과 조합 집행부 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비롯된 분쟁이었다. 의뢰인은 토지소유자로서 상대방 조합에 토지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토지대금의 일부를 상가 분양권으로 대물 지급받기로 하는 약정(이하 ‘이 사건 약정’)을 체결하였다. 해당 약정서에는 '분양받은 상가의 전용면적이 100㎡ 미만일 경우, 평당 1억 원을 기준으로 정산한다'는 내용의 조항(이하 ‘이 사건 정산조항’)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분양된 상가의 전용면적은 100㎡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의뢰인은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에 근거하여 수억 원 상당의 정산금을 청구하였고, 이에 대해 조합은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의 효력 자체를 문제 삼으며 맞섰다. 조합 측은 조합 임원 또는 일부 조합원이 조합 총회의 결의 없이 체결한 약정은 조합 재산의 관리 및 처분행위에 해당하므로 무효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3. 법리적 쟁점 – 총유물의 처분행위인가, 단순 채무부담행위인가
본건의 핵심 쟁점은 ① 이 사건 약정이 조합 총회의 결의 없이 체결되어 무효인지 여부, ② 이 사건 정산조항이 비법인사단으로서의 조합 재산(총유물)의 처분행위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채무부담행위에 불과한지 여부였다. 상대방 조합은,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이 조합 재산을 관리 및 처분하는 행위에 해당하므로, 민법 제276조 제1항에 따라 조합 총회의 결의가 없으면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즉, 조합 재산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키는 법률행위이므로, 조합 임원이나 일부 조합원이 임의로 체결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 사건 정산조항이 상가의 전용면적 차이에 따라 금전으로 정산하기로 한 단순한 채무부담행위에 불과하고, 조합의 총유물 자체를 관리 및 처분하는 행위로 볼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의뢰인은 이미 이 사건 약정에 따라 토지를 제공하였고, 이는 양 당사자가 해당 약정의 유효성을 전제로 실질적 이행에 착수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은 동일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법률행위로서 상호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므로, 그중 일부를 임의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반한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4. 재판부의 판단 – 신의칙에 반하는 무효 항변 배척
담당재판부는,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에 따른 상가 분양은 실질적으로 조합 규약상 임의분양에 해당하므로, 조합 총회의 결의를 요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설령 이를 조합의 총유물 처분행위로 보더라도, 상대방 조합이 이 사건 약정의 유효함을 전제로 토지 소유권을 이전받아 건물을 신축한 이후 수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뒤늦게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반한다고 판시하였다. 결국 법원은 의뢰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사건 약정 및 정산조항의 유효성을 인정하였고, 상대방 조합의 무효 항변은 이유 없다고 보아 이를 배척하였다.
5. 결론 – 재개발 분쟁의 교훈
이 사건은 재개발 사업에서 빈번히 문제 되는 ‘조합의 의사결정 절차’와 ‘개별 조합원과의 약정 효력’ 간의 충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얼핏 당연한 결과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의뢰인이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수억 원대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재개발·재건축 조합은 비법인사단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를 상대로 한 법적 분쟁에서는 절차적 제약이 많고 권리구제의 문턱 또한 높다. 따라서 조합과 조합원 모두 계약 체결 단계에서 법적 근거와 절차를 명확히 인식하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협의와 투명한 소통을 통해 불필요한 법적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