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은 이룬 꿈?
새벽에 일찍 집을 나섰다. 집을 떠나 어디 멀리 간다는 말이 아니다. 마을 외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그 향기를 숨쉬고 싶어 다시금 가보기 위해서다. 400미리 줌 렌즈 끼운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간다. 이 카메라는 병수에게 좋은 친구이고 단짝이다.
어제 저녁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며 만났던 그 나무들 아래에 섰다. 묵직이 내려 앉아 물씬 풍기는 이 꽃의 향기. 놀랍다. 이 향기가 병수의 새벽을 이끈 것이다.
밤나무다. 그 꽃이다. 밤 꽃 그 향기다. 오묘하다. 달다 쓰다 맵다 짜다 설명할 길이 없다. 살짝 어지럼증을 느킨다.
유월. 그리고 중순. 시골은 지금 온통 밤나무 꽃 천지이다. 멀리서 보는 모습이 마치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같다. 밤나무꽃으로 그 향기로 계절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꽃 향기로 시골풍경을 담는다.
뒷산 높은 곳 폭포를 배경으로 밤꽃 사진을 찍는다. 또 울긋불긋 마을 지붕들을 배경으로 찍기도 한다. 할수만 있다면 솔직히 꽃의 향기를 찍고 싶다. 수없이 찍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듬뿍듬뿍 나누어 주고 싶다.
병수가 시골에 정착한지 이제 2년이 되어 간다. 가끔식 엄마 생각에 아직도 메이고 복받치는 설움을 견딜 수 없지만 잘 참고 지내는 편이다. 엄마 앞에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 들어서도 나는 여전히 아이다. 얼마든지 엄마를 돌보고 지켜 드릴 수 있는 장성한 청년 아들이다.
엄마는 힘들고 어려운 시골 농사일로도 언제나 자식들에게 주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얼마하지도 않는 상추를 힘들게 왜 보내시냐고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냐고 어떻게 상추만 먹고 사냐고 자식은 타박했다. 엄마가 결코 미워서가 아니다. 늙고 아픈 엄마를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멀리 사는 자식으로서의 안타까움에서다. 아픈 마음에서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엄마도 분명히 힘들때는 쉬고 싶으실 것이다. 엄마라고 왜 편함을 모르 시겠냐고.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식 주고 싶어서 힘들게 심고 가꾸고 따서 자식들이 아무리 타박해도, 설사 자식들이 이 보낸 것을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릴지라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삶의 위안을 삼으시는 거다. 자식들의 웃는 얼굴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으신 것이다.
병수는 엄마께서 보내신 것이 많다고 해도, 맛있다고 여기는 다른 아무것이 있다고 해도, 보내신 엄마표 농산물은 기어코 끝까지 남김없이 다 먹곤 했다. 퇴근이 늦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아내는 낮에 택배 온 엄마의 많은 채소들을 보고 가끔 놀라기도 하지만 밤이 깊도록 모두 다듬고 삶거나 또는 절임을 했다.
병수는 다니는 직장을 퇴직하면 시골에 계신 엄마와 같이 지내야겠다는 꿈을 지녔다. 시골 고향에 내려가 엄마를 곁에서 모시며 태워드리기도 같이 병원도 가고 강건너 보건소에도 가고 할. 엄마께서는 가만히 계시고 모든 것을 다 돌봐 드리는. 음식까지도 다 해드리기로 작정하고 유튜브를 통해서 배우기도 많이 했다.
그런데...
병수가 드디어 퇴직을 하게되고 가졌던 꿈이 거의 이루어질 뻔 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에도 잘 견디셨는데 갑작스럽게 찾아 온 병이 엄마를 하늘나라로 먼저 데려간 것이다.
박탈감에 휩싸여 어떻게 할 수조차 없었던 병수는 울고 또 울었다. 슬픔이 오래갔다. 물 머금은 스펀지처럼 엄마생각만 하면 눈물이 그냥 쏟아졌다.
오늘 새벽에 밤꽃 향기를 따라 나섰던 이 길은 엄마께서 밭매느라 호미를 들고 자주 다니셨던 길이다. 농번기 보리수확 할때는 보자기 씌운 밥 소쿠리를 이고 날으던 길이다. 이 길로 쭉 가면 엄마께서 아버지와 가꾸셨던 사과 과수원이 나온다. 사과나무는 처음 심었을때 그 나무 그대로다. 거의 반 백년을 향해간다. 엄마와 아버지의 땀이 그대로 배어 남아 있는 곳이다.
집에 오니 길고양이들이 여러마리 나와서 언제나 그랬다시피 밥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병수가 다가가면 고양이들은 본능적으로 먼저 몸을 피한다. 밥그릇에 한가득 밥(고양이 사료)을 부어주고 한발짝 발을 떼면 그제서야 그들은 모여들어 먹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주인 양반 오늘은 울었나배. 심심하면 우는 울보. 우리는 모르겠고 밥이나 먹자.
돌아서서 현관을 들어서며 병수는 엄마께 인사를 한다. "엄마 간밤엔 잘 주무셨어요?" 엄마는 "온냐 그래 니도 잘 잤나? 꼭두 새벽부터 어데 그래 갔다오노?"
시골에서 고향에서 병수는 이렇게 엄마와 산다. 엄마가 비록 계시지 않는다 해도 엄마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이다. 엄마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에 병수에게 반은 이룬 꿈인가 싶다. 밭에 심어놓은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면 동생들한테도 택배 하나씩 보내 줄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엄마께서 소곤소곤 말씀하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