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군단(軍團)
뒷산 중턱 폭포가 추위에 얼어 붙었다. 겨울은 겨울인 것이다.
여름 초입 어느 날 이었다.
"얘들아 이리 와서 수박먹자~"
큼지막한 수박 한 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께서 부엌칼로 위에서 아래로 힘주어 지그시 누르셨다. 잘 익은 수박이 붉그스럼 속살을 활짝 드러내며 쩍 하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어머니는 잘 익은 수박 속을 주걱으로 알뜰하게 긁어내어 양푼이로 담으셨다. 달달한 물기를 머금고 수박 속살이 덩어리째 양푼이에 수북수북 담겼다.
어머니는 식구들 수에 맞춰 여섯 대접으로 골고루 나누어 담으셨다. 그리고 순서대로 아버지께 먼저 드리고 이어서 나와 동생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한 여름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 쬘 무렵 선풍기가 쉴새없이 돌아갔다. 낮 12시 55분에 맞춰 라디오에서는 '김삿갓 방랑객' 5분 드라마가 흘러 나왔다.
그늘진 시원한 마룻 바닥에 둘러앉아 우리 가족은 달고 시원한 수박파티를 함께 즐겼다. 어머니는 아침일찍 장에서 수박을 사오셨다. 그리고 샘에서 길어 온 찬 물에 담그 놓으셨다.
수박을 긁어내고 남은 줄무늬 껍데기는 어미소 몫이었다. 우걱우걱 쩍쩍 소리를 내며 어미소도 맛있게 먹었다. 어미소는 귀한 우리집 일곱 번째 식구였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어린 형제들에게 미리 약속을 하셨다. 보리타작을 앞 둔 시기였다. 밭에서 남은 보리이삭을 많이 주우면 그것으로 여름에 수박을 사주시겠다고. 수박 먹을 생각에 오뉴월 땡볕아래에서 밭고랑마다 누비며 형제들은 열심히 보리이삭을 주워 모았다.
키우던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 염소는 새끼를 한번에 두마리씩 낳는다. 150일만에 세상에 나온 새끼는 앙증 맞고 귀여웠다. 복실복실 까만 털이 부드러웠다.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폴짝 폴짝 여기저기 오르고 내려가며 뛰어 다녔다. 잡고 안으면 매애하고 엄마찾아 울었다. 새끼염소는 뒤집어 놓은 여물 통이나 쌓아 놓은 짚더미 위로 올라가 놀기를 좋아했다. 숫염소는 다가오며 솟아오른 뿔로 아무나 대고 무조건 들이 받았다. 그 뿔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버티기 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산자락 뒷골 풀숲으로 염소들을 몰고 나가 매어놓고 오셨다. 염소들은 나무 잎이나 자란 풀들을 하루종일 뜯었다. 어머니 대신 해질 무렵 염소들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보면 자기들을 데리러 오는 줄 먼저 알고 여기저기서 빼꼼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우선 그들의 숫자를 세어보고 무사한지 확인부터 했다. 염소들은 집에 얼른 가고 싶어서 모두가 매애 매애 하고 울었다. 동시에 사방으로 제 갈 길을 찾느라 북새통을 이루기에 매어놓은 끈이 더욱 조여가 쉽사리 풀기가 어려웠다.
산에서 내려갈 때는 어미가 빠르게 앞서고 언니 오빠 새끼들이 졸졸졸 뒤따랐다. 그들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뛰었다.
어느듯 하루 해가 서산에 걸리듯이 기울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 샘솟는 물이 있었다. 일년 내내 맑은 물이 흘러 나왔다.
밀과 보리 수확이 한창인 오뉴월에는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바쁘게 샘으로 가서 주전자 가득 시원한 물을 떠다 날랐다. 고되게 일하시던 부모님들이 그 때 그 시원한 생수라도 마시고 조금이나마 덜 지치고 다시 일할 새 힘을 얻으셨기를...
산자락 아래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동네는 작지만 양지쪽이었다. 건너편 음지마을보다 해가 항상 먼저 뜨고 늦게 졌다.
높은 뒷 산 골짜기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내렸다. 여름방학 동안 소를 먹이러 산에 갈 때나 겨울에 나무하러 산에 갈 때나 밭 일이나 논 일 할 때도 근처에는 어김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은 여름엔 연못을 거치면서 아이들의 수영장이 되어 주었고 벼가 자랄 수 있도록 논 한가득 채워 주었다. 맑은 연못 한 곳에서 어울려 놀다 허우적 댈 때 동네 형이 다가와 구해 주었다. 그 형 이름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때 못한 고맙단 인사를 언제나 할 수 있으려나. 수십년이 지난 10살 전 일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이른 봄이 찾아와도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다. 이 시기가 가재잡기에 좋을 때였다. 계곡 맑은 물 속 돌들을 하나하나 들출 때마다 어김없이 한마리씩 가재가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깊은 물 속 바위 틈에 사는 가재는 팔을 걷어 올려서도 닿지 않았다. 그럴 땐 매단 개구리 뒷다리를 이용해서 유인했다. 가재가 있을 법한 바위 틈 쪽으로 줄을 드리워 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숨어 있던 가재가 먹이를 발견하고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급기야 집게 발로 움켜 잡고는 바위 틈 안쪽으로 끌고 가려고 슬슬 움직였다. 이때 힘조절을 통한 가재와의 한판 기싸움이 벌어지는데 긴장감이 가히 한때 유행하던 '인형뽑기'와 다를 바 없었다. 가재가 놀라 그만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잡고 난 가재는 빠일갛게 졸여서 반찬으로 이용했다. 잡는 재미랑 먹어보는 재미로 가재는 산골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어 주었다.
이 시기가 지니면 가재는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물렁물렁 뿌우연 새 껍질의 가재는 더 이상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다음해 그 봄이 다시 올 때까지는.
집채보다 몇배나 더 큰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동네 앞 솔등에 있었다. 여름철 그 시원한 그늘 아래로 아이들이 나와 모여 놀았다. 어린 동생을 업고 오기도 했다. 아이들한테는 딱지 쥐기 놀이가 한창 인기였다. 동그란 모양이거나 네모난 모양의 딱지는 갯수가 서로 다르게 별이 테두리를 따라 그려져 있었다.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쪽이 화투처럼 딱지를 포개고 썪어 양손에 나눠 쥐면 진 쪽에서 딱지를 걸고 둘 중 한 곳으로 베팅을 했다. 양손을 동시에 펴보아 맨 안쪽 딱지에 새겨진 별들의 수를 따져 서로 이기거나 졌다. 거기에 따라 걸었던 만큼의 딱지를 따거나 잃었다.
딱지를 모두 잃고 새로 사러 동네 간이 가게에 갔을 때 아버지와 동갑이신 주인은 혼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계셨다. 딱지를 고르고 있는데 주인이 한장 밖에 없는 당첨권이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며 한 번 골라 보도록 하셨다. 오십개도 더 되었던 많은 쿠폰 딱지 중에 맨 뒤엣 것을 골랐다. 주인이 깜짝 놀라시고 '야 너 대단하구나' 하시며 당첨 선물을 내주셨다. 딱지 게임은 내기를 거는 족족 잃었는데 왠일인가 나도 놀랐다.
재미있는 야구 이야기가 나오는 만화책 한권이 떡하니 당첨된 것이었다. 동네에서 이만한 운있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교과서 이외에 책이 귀하던 시절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원 스트라이크 원볼, 투나씽, 삼진 아웃 등 야구에 관한 거의 모든 용어를 이 책하나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당첨선물이었다.
그 뒤로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로 소풍가서 하는 보물찾기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흔하디 흔한 복권조차도.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 가는 길 이외에 어떤 요행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뒷문에 차곡차곡 짚으로 쌓아놓은 동가리가 있었다. 닭들이 하루 한번씩 올라가 알을 낳았다. 아버지께서 알을 거두어 오시면 어머니는 알을 받아 반쯤 보리쌀을 채운 등근 박에 하나하나 쌓으셨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마시기 좋게 구멍뜷어 날달걀을 주시기도 하셨지만 박 속이 가득차면 돈을 받고 파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나름 알들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로 인해 달걀이 하나 없어졌다면... 부모님께서는 그런가보다하고 쉽게 넘어 가셨을까. 분명 알낳은 닭의 울음소리를 아까 전에 들었는데도 말이다. 부담이 컸지만 어쨋거나 저녁에 소죽 끓이며 그 안에 넣고 익혀 혼자 몰래 먹었다. 두 분이서 이미 다 알고 계셨겠지만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 후로 두번다시 달걀을 훔치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지게를 한 몸처럼 달고 다니셨다. 맨 지게든 바지게를 얹은 지게든 지게 위에는 항상 무거운 짐이 얹혀 있었다. 벼 보리 곡식이든 거름이든 땔감 나무든 소먹일 꼴이든.
어머니께서도 잠시나마 편하게 누워 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 주무시는지 본 적이 없고 언제 일어나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골 하늘 아래 한 곳에서 날마다 커가는 어린 아이의 작은 머릿 속으로 지난 한 날이 어두워지고 또 한 날로 채워지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