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사람의 도리란?
식구들이 모여 마루에 앉아 아침식사를 할 무렵이었다. 한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 왔다. 엄마가 일어나 밥을 한사발 퍼담아 주고 보냈다.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가 대문까지 거지(거지 즉 시골말로 '끌뱅이'들이 흔하던 시절이었다)를 따라 나갔다. 거기서 '안녕히 가세요'라고 허리 숙여 인사하고 다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집으로 찾아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인사하도록 부모님이 늘 가르치셨다. 사람이 오면 인사 먼저하는 것이 배운사람의 도리라고 하셨다. 방에서 누가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문열고 뛰쳐나가 신발신고 밖에서 인사하고 맞아 들였다. 공부하다가도 그랬다. 밥먹다가는 물론이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나가 인사부터 했다. 그분이 누구시던간에.
오시는 분이 어른이면 엄마는 곧바로 술상을 내오셨다. 술은 주로 탁주 즉 막걸리인데 마을 구판장에서 술도가로부터 떼다 팔았다. 혹은 집에서 엄마가 쌀을 쪄서 누룩으로 3~4일 삭힌 술이 가끔씩 남아 있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산너머서 오시면 엄마는 직접 술을 담그셨다. 이때 손님 오셨다고 집안의 할아버지들이 집으로 찾아 오셨다. 집안 어느 집에라도 오시는 손님은 모두 집안 손님으로 대접했다. 다른 할아버지들과 정을 나누며 술을 드시는 외할아버지의 긴 수염에서 술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담근 술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갓쓴 두루마기 차림으로 다시 산너머 가셨다.
명절이 되면 집안어른들을 찾아 뵙고 절 인사 드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가까운 이웃의 어른들까지 찾아 뵙기도 했다. 외가에 가거나 외지살다 고향에 다니러 왔거나 그럴 때도 빠지지 않고 집안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절 인사를 드렸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이나 이웃에게도 인사는 기본이었다. 아침을 점심을 저녁을 잡수셨는지 시시때때 인사말은 달랐지만.
초등학교 5학년때 부산 동래온천장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기차는 이때 처음 타보았고 동래 화송관 여관에서 묵었다. 온천극장에서 중국 무술영화 단체관람 그리고 여관 목욕탕에서 단체 온천 목욕을 하기도 했다. 화장실이란 말을 처음 대했고 그것을 화장터란 개념과 혼동했다. 사람의 뼈가 타는곳으로 받아들여 그곳이 변소인 줄 몰라서 처음엔 고생했다.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동래온천 동물원에도 갔다. 거기서 여러마리 물개를 처음 대했다. 신기한 기억이었다. 동창하나가 바나나를 사서 먹으면서 한입 맛보게 했는데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 바나나였다. 볼록한 공기 주머니를 꾹꾹 누르면 앞으로 나아가는 말 장난감을 하나 샀다. 그리고 큰집 할머니 드리기 위해 큰 봉지 사탕 선물도 샀다.
어렸지만 배웠기에 수학여행가서도 먼저 어른들께 드릴 선물부터 챙길 수 있었다.
객지에 있다가 집에 올때는 항상 집안 어른들께 절하며 문안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사가지고 온 차반(과자나 빵 등 먹을 거리)을 나누어 드렸다. 그것이 많든 적든 간에 나누는 것이 예의이고 도리였다. 고기나 생선을 사왔다면 같이 드시도록 집안을 한꺼번에 모두 모셨다. 사람이 많고 집이 좁으니 어른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각각 따로 방으로 모셨고 아이들은 마루, 엄마들은 부엌차지였다.
닭을 잡아 국을 끓였거나 염소국을 끓였다면 한냄비 먼저 퍼담아 큰집 할머니께 갖다 드렸다. 집에 두부를 해도 조청을 끓여도 밀떡을 찌고 호박죽을 끓여도 어른들께 먼저 올려 드렸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이 일들을 항상 본으로 보이시며 실천하셨다. 어른들께 공경을 다하는 것이 배운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엄마가 밥을 차리시면서 자주 하는 말씀이다. '아버지 식사하시라'고 해라 하는. 배가 고팠던 우리였다. 재빨리 일어나 일하시는 곳을 찾아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밥상 앞에 앉으시고 밥 숟갈을 드셔야 우리도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배고프다고 혼자 먼저 먹는 일은 없었다. 들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하고 있는 이웃에게 가장먼저 같이 먹자고 권하셨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곧장 달려 오지는 않는다. 그분들도 똑같이 준비해 온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마음이고 인사였다.
늘상먹는 밥 외에 다른 먹을 거리가 생겼다면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온 가족이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혹시 한명이라도 다른 곳에 있다면 그 몫은 따로 놓아 두었다. 그가 돌아와서 먹게 될 때도 혼자 먹지 않았다. 반드시 같이 먹자고 권하고 난 후에 먹었다. 먹자 한다고 덥썩 달려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골 작은 동네에 장사하시는 분들이 가끔 드나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용어대로라면 '방물장수'가 맞을 것이다. 빗이랑 화장품 그리고 실과 바늘 등 보따리에 이고 다니면서 파는 분들이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어양할매'였다. 비녀꽂은 머리 작은 체구에 검정치마 흰 저고리 차림이셨다. 그당시 엄마 할매 할 것없이 갖추는 보통 여인네 옷차림이었다. 집에 오시면 정이 많은 엄마가 꼭 밥을 차려 주셨다. 그분은 엄마한테 고맙게 대해준다고 늘 칭찬하셨다. 잠은 비슷한 연배이신 큰 집 할머니 댁에서 주로 주무셨다.
'하문 들다 바라'(한번 방문하고 인사드려라)는 부모님께서 자주하셨던 말씀이다. 어른이 계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모른채 하지말고 자주 찾아가 인사드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였다. 정이었다. 그리고 '들다 볼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마라'고 하셨다.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뭐라도 하나 사서 들고 가라는 말씀이었다. 가면 거기서도 가만히 있지않고 온당히 대접해줄 것이라는 의미였다. 없는 돈에 부담이 안 될 수는 없었지만 당연하게 여기고 늘 그렇게 했다. 지난 주에 연로하신 장모님을 찾아 뵈었다. 전화통화는 자주 하고 있어도 그리고 택배로 물품을 보내도 되지만 엄마 아버지 하시는 말씀 즉 '바빠도 들다보고 오너라 혼자 계신데 한번 갔다 와봐야제 가마이 있으면 되나 안된다'하는 음성이 귓가에서 메아리 쳤다. 그래서 사과나무 가지치기 바쁘지만 일하다 말고 예상에 없던 용돈 봉투 챙기고 농사지은 사과 두박스, 누렁호박 세통, 고구마 줄기 말린 나물 등 챙겨서 작은 차 모닝으로도 고속도로 국도 할 것 없이 두시간여 몰고 기꺼이 다녀왔다. 장모님께서 기뻐하셨다. 돌아오니 한밤중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의 도리를 다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엄마 아버지한테서 배운대로 살고 혹여라도 염치없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신세만 지고 살면 엄마 아버지는 '그라먼 되나 사람이 본데없이 살면 안된다' 하실 것이다.
※ '본데없이'는 '근본없이'라는 뜻의 시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