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는 그의 역작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것은 본능이라고 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우리란 언어와 종교와 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하고, 우리는 언제나 그들과 다르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와 너로 구분하는 민족, 즉 네이션(nation)이란 말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민족’이란 19세기 이전에는 없던 말(단어)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 국민인가라는 의식이 지금처럼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민족이란 말은 라틴어 ‘이방인 집단(Natio)’에서 기원한다. 단순하게 ‘무리(Rabble)’에서 사람간의 계급이 생기면서 평민(Pleb)이라는 단어로 연결되고, 16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에서 대중들을 뜻하게 되었다. 이어서 ‘권리를 가진 민중(a Sovereign People)’이라는 다소 긴 뜻으로 해석되다가 나중에 ‘그들’이 추가되면서 슬금슬금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이 생기고 집단끼리 타자화하는 배타적 개념으로 변했다. 이때부터 내 존재의 가치, 즉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해준 것이 민족주의였다.
'프랑스 혁명' 들라클루아
18세기의 유럽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의 독립전쟁이 일어나면서 세계는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연이어 민중으로부터 프랑스혁명이 촉발되며 자유와 평등, 우애(박애)의 이념을 표방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 구체제와 절대왕정에 대항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탄생이라는 터전을 닦은 셈이다.
절대왕정,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신분을 안고 태어난 까닭에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왕이나 군주로부터 보호받거나 충성을 다함으로써 자신을 의탁하고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 여파는 민중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급격한 산업의 발달로 중산층이 확산되고, 금권金權이라는 경제권을 쥔 새로운 계급층이 형성되면서 타고난 운명을 깨트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정치체제에 도전의식이 심어지면서 대중은 지배계급에 반등의 기회를 찾았다.
이때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면서 유럽은 또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나폴레옹은 정복전쟁을 일으키면서 정벌의 정당성과 각 왕정의 해체를 위해 민족, 즉 백성 스스로가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불을 지폈다. 프랑스혁명 당시 민중이 내걸었던 자유와 평등, 박애에 덧대 민족 자주와 단결, 그리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특히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침략해 라인강 일부 지역을 16주로 갈라버린다. 이러한 일련의 민족주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생전 처음 맛보는 혈기에 고동치는 가슴을 울분으로 삭이면서 눈을 외부로 돌려 우리 외에는 모두가 적으로 바라보게끔 눈에 붉은 필터를 끼워버렸다.
예를 들면 “우리가 남이가!”처럼 “프랑크족이여 일어나라!”, “도이치 민족에게 고함!”, “앵글로 색슨족은 죽었는가!”, “중국인들은 한데 뭉치자!” 등등…. ‘민족’은 ‘우리’라는 의기로 무장된 마음에 울타리를 견고하게 쌓아올렸다. 기실 지금 필자가 말하는 ‘민족民族’이란 단어도 일본에서 군국주의 망령이 기승을 부릴 때 네이션(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하면서부터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백 년 동안 제국 압제 속에 주변인으로 받아낸 박해와 국경이랄 것도 없는 힘없는 부족으로 살아온 사람들 최후 선택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외세의 지배에서 받은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속성을 간파한 자칭 민족주의자 등장은 우리끼리라는 닫힌 민족주의로 역사를 되살려 스토리텔링을 가미했다. 즉 대중에서 탄생된 지도자 의도에 따라 변질되거나 타락적 속성인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칭 지도자는 중세봉건시대 억압된 주입식에서 파생된 민중항쟁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정권을 잡자말자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부추겼다. 과거 피지배계급을 향한 강압적인 명령과 수직계통에서,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충성스러움이 저절로 우러나오게끔 하는 데에는 우리라는, 우리끼리 공유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만큼 좋은 소재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재료를 가지고 대중을 길들이면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고, 나아가 타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 즉 인종청소를 부추겼다.
발칸반도 이질적 민족주의
발칸반도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슬라브민족의 이동경로와 이동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발칸반도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지정학적 위치와 침탈의 역사를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으면서 현재 지도로 확정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으로 반복해서 언급하겠지만) 발칸반도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접목되면서 이것이 역발효 과정을 겪으면서 피와 살육으로 변해버린 아픔의 땅이다. 에게문명을 필두로, 그리스 민주주의,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로 인한 헬레니즘, 로마 지배하의 기독교권,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 분열을 거친 후 오스만 이슬람에 이어 두 차례 세계대전 중심에 서는 등 인류 긴긴 폭력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인 제국주의에 발버둥 치면서 탄생한 것이 저항민의 승리이자, 질긴 결실 민족주의다.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가 똘똘(?) 뭉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르비아 사람이 들으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겠지만, 코소보도 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짚고 가자. 발칸반도 각 나라들은 미국 독립선언과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촉발된 이래 1923년 오스만터키제국이 붕괴되고 19세기를 지나면서 그 정체가 드러났다. 거슬러 오르면 발칸반도에 지배력을 높이려는 오스만터키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꾸준한 도발은 폴란드 해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프로이센까지 달려들어 결국 1795년 폴란드는 나라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제국의 욕망은 예서 그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술탄의 무슬림 지배에서 기독교를 앞세운 자신들 전제왕조의 발아래 놓으려는 야심찬 계획은 유럽 각국 반발을 불러왔고, 크림전쟁을 비롯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터키와 러시아가 치고 박는 것을 구경하면서 영국, 프랑스는 물론이고, 서유럽 나라들 계산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고만고만한 여러 부족과 민족이 통일국가로 거듭났다. 그리스도 이때를 놓치지 않았으며, 남아메리카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식민지인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도 줄줄이 독립에 동참하며 새로운 민족국가로 탄생했다.
진화를 거듭하던 민족주의는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초진화상태로 돌입한다. 서구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종족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는 비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더욱 탄탄하게 다져졌다. 그 위에 광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는 전제군주국에 대한 해체작업의 일환으로 서구 강대국에 의한 펌프질도 있었다. 즉 오스만터키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치하에 있던 나라, 여러 부족에게 독립이라는 새싹위에 희망의 물줄기를 뿌려대는 서유럽국가들 노력이었다.
국제정세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다. 긴박한 상황이라면 특히 더하다. 서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시작으로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 이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기습적으로 점령해버렸다. 이때 대세르비아주의가 급부상하면서 기다렸다는 듯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그리고 파괴와 죽음, 살육 등 발칸반도에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 승자의 막강한 끗발을 이용한 서유럽 강대국은 그동안 오스만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영토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와 중부유럽은 물론 중동까지 도토리 같은 나라 탄생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더구나 각 민족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그것이다.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한다는 이 말은 소수민족, 그리고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에게 독립의 열정과 불가능은 없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리나라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이라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한다’는 말이 억압에 길들여진 약소민족 가슴을 막무가내로 울려댔다.
우리나라는 물론 독립투사들이 민족주의자로 불리게 된 때도 이때부터다. 민족 핵심개념인 모두가 민족의 평등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은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에 대한 성공은 평등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①①① ①
(계속)
① 이정호 外. 《영화 속 역사와 현실》, ‘귀신이 온다’(백영경), 221쪽 10째 줄, 2017. 8. 23., 지식의 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