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고도 생소한 도시들
▲ 깔레메그단에서 내려다본 사바강과 도나우강 두물머리. 가운데 붉은 지붕의 팔각형 건물이 네보이샤탑이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 내륙국 고도(古都) 베오그라드로 대표되는 나라다. ‘베오그라드’라고 하면, 남쪽 슬라브의 나라 ‘유고연방’시절 수도이자 ‘가든 오브 플라워즈’, 즉 유고슬로비아 영웅 티토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 니슈부터 국토 중앙 세메데레보, 그리고 수도 베오그라드를 지나 북쪽을 향해 노비사드에 이르면 왼쪽은 크로아티아, 조금만 더 가면 헝가리 국경이 지척이다. 세계사 중심에서 늘 상처를 입어야 했던 태생적 폭력 현장이자 아픔의 터전, 반도인 까닭에 우리네 한반도와 그 어떤 인연의 끈이 닿는 듯 가슴 설레며 찾았던 도시들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사연을 어찌 몇 권의 책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에서 늘 지배와 수난을 당했던, 너무나 엉켜서 끝끝내 사무쳐버린 아픔을 상상하며 발길을 향했다. 그리고 꿈에서나 보았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에 피맺힌 역사가 마르지 않은 채 곳곳에 묻어 있음을 보았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대한 이미지는 어느 영화에서나 봄직한 폭력의 중심에 선 곳이었다. 베오그라드 발 보스니아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 1998년 최 근래에 이뤄진 베오그라드 발 코소보 살육전, 그리고 나토의 베오그라드 공습 등 ‘악마의 시대’에 중심적 이미지가 뿌리박혀 있는 곳이라면 이들이 화를 낼까. 그러나 나 혹은, 우리 아니면 모두 살육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상한 민족주의가 기승부리는 닫힌 나라 수도라는 생각은 도착과 동시에 대번에 깨어졌다. 물론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지만 말이다.
어느 나라건 수도는 북적일 수밖에 없다.(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북적인다고 말 못하겠지만) 현재 30대 후반부터 40대, 더 위로는 5․60대가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활기찬 발걸음과 환한 얼굴에 그간 악의 전사들로 거듭나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던 사람들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18세기 말까지 세르비아는 물론이고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민족주의 싹이 움틀 만한 조건이나 의식 자체가 거의 없었다. 대신 그 중심에 정교, 가톨릭, 혹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있을 뿐이다. 신을 믿는 사람조차도 어디교구 소속인지 관심이 없었다. 삶이 곧 믿음이었고, 종교가 그냥 삶이었다.
다만 수많은 침략을 당해내면서도 처참하게 견뎌낸 세르비아정교는 정체성이자 가치 정점이었다. 그리고 상징적 구심점 세르비아정교회 대성당 ‘성 사바(St. Sava) 성당’은 오스만제국 이슬람과 오스트리아 가톨릭 세력의 침략에도 민족 저항정신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그런 만큼 상처도 깊다.
깔끔한 미감, 비잔티움 형식을 닮은 외형과는 달리 만들다 만, 어느 순간 어떤 물리적 힘에 의해 멈춰버린 듯한 성당 내부 모습은 세르비안 선지자와 성자들이 슬픈 모습으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공간은 이방인 마음까지 점령하는 듯했다. 그리고 올려다보는 살아 있는 시선들…. 침묵 속에서 울러나는 숙연함, 신을 향한 간절한 물결을 보며 꿈과 내면을 훔쳐볼 수 있었다. 이들 역시 보스니아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원망(怨望)과 원통(怨痛) 등 불행했던 사연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는 배타적 사고가 아니라 한(恨), 즉 스스로 발효해 원인을 내 안에서 녹여내는 듯했다.
베오그라드 도심에 시민 휴식처이자, 여유와 여백의 공간 칼레메그단 성채가 있다. 공원 이름이 요새(Kale)와 전쟁터(Megdan)라는 절박한 단어가 합해진 만큼 베오그라드는 오스만제국과 비잔티움제국 틈바구니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져야 했다. 오랜 세월 그렇게 흘렀을 도나우강(다뉴브, 돈, 두나이, 드네브 등으로도 불린다. 이곳이 세르비아니 드네브강이라고 해야겠지만….)이 잔물결 일으키며 침묵으로 대신하고, 사바강과 만나는 교차점의 두물머리 풍경은 역사를 잊은 사람들에게 도심의 삶에서는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시름을 풀어주기에 딱 알맞다. 그 위에 우뚝 솟은 칼레메그단 성채는 일출과 일몰의 광휘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서 있다. 이름처럼 격동의 세월을 온 몸으로 견뎌낸 칼레메그단은 이슬람과 기독교 연합군과의 수전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2014년 처음과 달리 2017년에 찾은 칼레메그단에서 한가롭고도 녹녹한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았다. 그러다 생뚱맞게 서있는 이슬람의 영묘(靈廟)를 만났다. 빨간 기와지붕의 육각형 건물이 초라하게 반겼다. 창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갈했다. 터키 국기와 함께 걸린 나자르 본주, 파란색 유리에 눈을 그려놓은 터키식 부적이었다. 무덤 주인은 오스만트루크제국 술탄 아흐메드 3세(제위 1703~1730) 시절 이곳에서 재상을 지낸 다마트 알리 파샤란 인물이다. 고국에 안장되지 못한 채 세르비아정교의 중심지이자, 세르비아 상징적인 요새인 이곳에서 홀로 외로움에 잠들어 있다.
칼레메그단을 한 바퀴 돌면서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구를 잘못 찾아 성채 뒤편으로 들어선 행운이었다. 성채에 올라 먼데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삼각주의 잔잔한 물길을 바라보다 두물머리에 서 있는 육각형 타워 ‘네보이샤탑’이 눈에 다가왔다. 쾌청한 날씨처럼 해맑게 장난치는 그곳 청소년들과 달리 이방인의 머리를 쿡쿡 누르는 것이 있었다. 저곳이 세르비아봉기를 제압하는 과정에 잡은 세르비아 민중을 학살하던 장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네보이샤탑은 배를 산으로 옮겨 비잔티움제국을 무너트린 메메트 2세의 침략에 대비해 1460년경에 쌓은 베오그라드요새 최전선 방어막인 포대탑이었다. 이미 1456년 메메트 2세는 강에 군선을 띄우고 베오그라드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인근 기독교권 연합군 선단과 수전에서 패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러던 것이 1521년 오스만제국 걸출한 술탄 쉴레이만대제에 의해 함락당하고 만다. 그리고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악마가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자 건물의 용도가 처절하게 변했다. 19세기에 세르비아 걸출한 전사 블랙조지를 중심으로 대 오스만제국을 향한 세르비아인 봉기가 일어났다. 자유의 본능이 소멸하기 직전에 일어난 최후의 항쟁이었다.
살육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에 의해 고귀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에니체리를 중심으로 한 무슬림 군대는 이곳을 저항하는 세르비아인을 잡아다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는 장소로 바꿔버렸다. 3층 전시실에는 제국 후반기 마지막 발악하듯 인간을 살육하던 잔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다 아치형 성문에서 태권도 소녀를 만났다. 안간힘으로 발차기를 연이어 해대는 딸의 동작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 시선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딸과 아버지는 이방인을 발견하고 동시에 엄지를 척 올리며 말했다.
“태권도 넘버 원!”
어떤 식으로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겉모습은 같은 발칸반도 내 그리스나 세르비아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분명 격동의 역사를 짊어진 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한, 가슴이 두근대는 미래 청사진을 가슴에 품고 역동적인 도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씬하게 빠진 청춘남녀 시원시원한 발걸음에 힘이 넘치고, 이방인 서툰 말에도 친절한 미소로 끝끝내 화답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적이며 꼴사나운 비틀림에 지나지 않은 어린 학생에 의한 멸시어린 시선과 조롱이 매우 자연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반갑게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제지가 뒤따른다. 그런 후 이방인을 향해 미안해하는 모습은 21세기를 온전히 살아가려는 삶의 여유 같았다.
공화국 광장에서 마주친 청춘들이 내뿜는 열기는 서울 홍대거리 못지않았다. 전철 속에서 세르비아대성당 성 사바 가는 길을 묻는 이방인에게 목적지는 잊은 듯 갈등의 기색이라곤 추호도 없이 전철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함께하고 돌아서던 자매 눈길은 잊을 수 없다. 뽀얀 얼굴, 파란 눈동자, 마치 깨끗하면서 친근한 서설(瑞雪)의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과거 누구에겐 악마의 도시였다면, 현재 베오그라드는 내게 천사의 도시인 양 하는 경험도 했다. 늦은 밤, 숙소 주인장과 약속이 엇갈리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됐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용기를 내 찾아들어간 옷가게에서였다. 주인도 아닌 아가씨 둘의 장난기 섞인 농담은 도시의 천연 조미료 같았다. 휴대폰 한 통화 사용하는 데 100유로를 달라니? 단박 얼굴색이 변하자 농담이라며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로 웃으며 전화기를 내민다. 이들에게 민족은커녕 이방인에 대한 적대의 감정은 어디에고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날을 넘기지 않고 단잠에 들 수 있었다.
낯선 땅 잠을 설친 이방인은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부스스한 신새벽에 일어났다. 산책삼아 나선 도심에서 사람들 얼굴에 여백의 행복을 보았다. 눈인사를 건네는 이방인을 향한 손짓은 넉넉했고, 초조함에 내쫓기듯 내딛는 발걸음을 본 적도 없다. 물론 비교의 오류, 혹은 규모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식당에서 만난 세르비아 신혼부부 말이 생각났다.
“코소보가 무슨 나라라고….”
여전히 코소보는 현재진행형이 분명했다. 세르비아인의 성지 코소보에 이방인이 독립을 선언한 이 억울하고도 미칠 듯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코소보가 중세 서사시적 영광이 서린 세르비아인 고향이라는 인식의 뿌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았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코소보 프리슈티나 박물관에서 각 나라 국기들 중 유독 태극기를 망토처럼 펼쳐 걸치고 사진을 찍던 프리슈티나대학교 2학년 여학생 말이 떠올랐다.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알아들었다. 그러나 답은 글쎄…. 갈 길이 멀다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대한민국은 ‘BTS’의 나라였다.
* 코소보 전투와 관련해 아래 '맛보기 세계사 1'편 17번 꼭지에 자세하게 풀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