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태동과 2차 세계대전
▲ 그리스 아테네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유럽에는 지각변동이 요동쳤다. 대제국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로마노프 절대왕정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발칸반도에도 슬라브족의 새로운 나라 독립국이 불사조 정신으로 세워지면서 새로운 긴장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쟁 후유증은 유럽경제가 몰락하면서 반대로 미국이 세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1930년대 세계는 긴박한 리듬을 타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쟁 후폭풍인 대공황으로 인해 대량으로 실업자를 양산했다. 그 여파로 나라마다 휘청대기는 엇비슷한 상황으로 변했다. 더구나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벗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1차 대전의 종식과 동시에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에 원인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전국 일방적인 조약체결은 많은 모순을 품고 있었다. 패전국 독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승전국이면서도 보상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티끌(?) 같은 노력으로 태산 같은 보상을 바라다보니 불만이 태산처럼 솟아났다.
그러다 결국 이탈리아에 무솔리니가 등장하면서 전체주의적 파시즘체제가 수립되어 국제질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배타적 민족주의 바이러스가 창궐해 기승을 부리자, 평등이란 공산주의 철저한 기본 이념에 파시즘은 대항마로써 설득력을 얻는다.
패전국 독일은 더욱 심각했다. 행색이라곤 상갓집 개와 다를 바 없었다. 막대한 전쟁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위기로 몰아갔다. 그러나 그 여파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반등을 일으켰다. 어차피 굶어 피골이 상접해 죽거나 피투성이가 돼서 맞아죽거나 매양 같았다. 이때 등장한 나치당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국민의 심경을 정확하게 읽었고, 독일 국민은 태양을 등지고 열변을 토하는 그의 연설에 열광했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대중 선동을 정치적 목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
어떻게 보면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독일국민이 히틀러를 선택했다. 히틀러 역시 국민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미술마저 ‘나치미술’과 대비해 ‘퇴폐미술’로 비교하면서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파시즘을 대변하는 승리와 애국, 투쟁과 혁명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예술작품을 불태우거나 팔아서 전쟁준비에 쏟아 부었다. 그 충격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미술가가 생겨났다.
1935년 제2차 세계대전 전초전이 벌어졌다.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영토분할에 불만을 품었던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급습하고 동아프리카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1938년 패전이후 민족적 굴욕감에 치를 떨던 독일 역시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하면서 뮌헨협정을 이끌어 내 보헤미아 지방을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한발 더 나아가 그해 3월 1차 세계대전 동맹국 오스트리아 합병에 성공하면서 패전국으로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베르사유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나치 독일은 거칠 것이 없었다. 체코를 침략해 보호령으로 만들었고, 이탈이아 역시 발칸반도 알바니아로 진격해 옛날 로마제국 시절처럼 식민국가로 만들었다. 한편 독일은 국제정세에 눈치만 보던 소련을 불러내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재갈을 물리는 데 성공했다. 공산당을 가장 기피하는 파시즘이 공산주의 원조국과 손을 잡은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1939년 9월 이를 지켜보던 영국과 프랑스가 결국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파시즘 이념적 대립이었다.
그동안 우리의 그리스는 어땠을까. 인간의 야심이 진보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몰락도 함께 가져온다. 그리스는 그동안 치룬 전쟁, 특히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한 상처가 덧나면서 내부로부터 곪아갔다.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는 혼탁한 정국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국민은 1924년 3월 25일 터키와 전쟁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운다. 이처럼 혼란을 거듭하던 때 1936년 군부 내 실권자인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했다.
전제군주 타도와 평등을 외치며 발칸반도 신생독립국에 몰아치던 공산주의 바람은 의외로 거셌다. 국가를 공산주의 위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메탁사스 장군 쿠데타의 변이었다. 그리스 국민도 쿠데타의 주역인 군부를 지지했다. 지독한 왕당파였던 메탁사스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앞도적인 지지율로 왕정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하면서 망명 중이던 게오르기오스 2세를 다시 불러들여 국왕에 앉혔다.
한발 더 나아가 의회 해산과 함께 정당을 해산시켰으며, 헌법상 권리를 모두 백지화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한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는 허수아비일 뿐 1941년 죽기까지 권력을 휘둘렀던 메탁사스 작품이었다.
메탁사스는 자국민 통제에 맞는 체제를 위해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지중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영국과의 관계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메탁사스는 중립을 유지하려고 기를 썼지만 1940년 10월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그리스가 영국에 기우는 것을 염려해 옛 로마의 영토(식민지?)였던 그리스를 침략했다. 알바니아를 점령한 이탈리아로서는 발칸반도가 욕심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그리스, 아니 메탁사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군의 대항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메탁사스는 교묘한 방어전술로 이탈리아군을 막으면서, 영국의 지원을 얻어(이미 그리스에 영국군 비행장이 있었다.) 알바니아 국경까지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전선에서 패한 후 도망치듯 물러나고 말았다.(사실 히틀러조차 혀를 찰 만큼 이탈리아 전쟁수행 능력은 형편없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1월 29일에 메탁사스는 후두암이 악화되어 아테네에서 죽음을 맞았고, 중앙은행총재였던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가 뒤를 이었다.
나치는 소련 침공을 계획하고 그 중간 거점을 그리스로 점찍었다. 그리스에 영국군 비행장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히틀러는 쿠데타로 어수선해진 유고를 단 10일 만에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런 후 그리스의 영국군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에서 폭탄을 퍼붓고, 해변으로 전차와 독일군을 상륙시켰다.
그리스는 개전 일주일 만에 그리스 북부를 내 주고 만다. 영국이 개입했으나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후퇴했다. 그리스 총사령관 파파고스는 착하게도(?)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만이라도 지킬 마음으로 항복했다. 아테네가 점령되자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와 그리스 정부는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한다. 1941년 4월 20일, 그리스는 전쟁 추축국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영토를 나눠 가지면서 나치 괴뢰국으로 변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면 그리스도 대한민국 못지않았다. 독재 치하 그리스 사람들은 터키독립전쟁에서 그랬듯 지하무장투쟁을 펼쳤다. 우리의 위대한(?) 친일파처럼 그리스인 친독파가 엄연히 존재했다. 점령국 독일군에 의한 그리스 내 유대인학살도 이어졌다.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희생자에 누가 될까 언급하지 않겠다.
▲ (좌)1822년 채택된 그리스의 첫 국기, (중앙) 데메트리오스 안드리아니스가 찍은 대 나치 그리스 저항군 레지스탕(사진 가운데가 지도자 Panagiotis G. Tesseris), (우) 그리스 ELAS 제2사단 군인들
* 출처 / Wikimedia Commons(가운데사진 Φτογρατική έκθεσι υπintρεσιας ΔιπλΩματικού και Ιστορικού Αρχειου. 외교역사자료실 사진전)
1944년 11월이 되면서 마침내 그리스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 노력으로 독일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나라 친일파와는 달리 괴뢰정부에 앞장섰던 친독파의 말로는 비참했다. 프랑스 역시 괴뢰정부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사들은 결코 그냥두지 않았다. 국가 정통성과 미래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실천의 문제였던 까닭이다.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1차 세계대전 때처럼 전쟁배상금 문제를 입에 담는 나라가 없었다. 역사에서 지혜를 찾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칸반도에 유일하게 공산화되지 않은 그리스를 미국과 유럽은 애지중지 했다. 만약 그리스마저 공산화가 된다면 지중해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빤했다.
소련은 연합국 지위를 이용하여 영토 주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점령지를 공산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이른바 공산주의 팽창정책이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로비아, 그리고 한반도 38선 이북까지 그 희생물이었다. 동유럽 일대가 소련의 영향력에 들자 영국 처칠 수상은 ‘철의 장막’이라며 팽창주의를 맹렬하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소련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리스는 물론 터키를 공산국가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터키와 그리스에 4억 달러 군사원조와 함께 서유럽에도 경제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전쟁 후 피폐해진 서구유럽 경제를 튼튼하게 해야 공산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NATO)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가 나토의 시발점이자, 동서냉전의 연결고리였다. 그리스와 터키가 공산세력으로부터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을 지켜내기 위한 미국과 서구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2차 세계대전 후 발칸반도에 공산국가가 많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반 나치, 반 파시스트 바람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혁명의 빌미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무장 게릴라 활동이 뛰어났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이 막을 내리자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무력투쟁을 이끌어온 공산세력(유고 파르티잔)은 국민의 절대적지지 속에 자연스레 권력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오래도록 유고를 이끌어온 티토 역시 무장 게릴라 투쟁의 지도자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