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①

대 그리스주의 속 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

by 박필우입니다

* 1878년 산 스테파노조약 삽화(위키백과)





대 그리스주의 속 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


1877년, 잠시 숨고르기 하던 러시아가 재차 터키를 공략했다. 터키가 손을 들자 영국과 프랑스는 또 한 번 긴장했다. 오스만터키는 러시아 요구대로 콘스탄티노플 서쪽에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인 산스테파노에서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제국의 땅 일부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인정하는 수모를 당했다. (1878년 산스테파노조약)


발칸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러시아 발칸침략에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쓴맛을 본 오스트리아가 발품을 팔아 국제사회에 여론은 환기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족 대동단결을 외치며 점령의 정당성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을 주창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 분위기를 타면서 러시아 타도 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러시아 발칸반도 점령은 유럽 내 반러시아 정서에 불을 댕겼던 것이다. 기세에 눌린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산스테파노조약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유럽 정세는 또 다시 먹구름 속에 들었다. 뒤이어 베를린 회의가 열리고 결과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뒤‘세르비아 편’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미국의 전쟁개. 미국-독일 위기, 1916년 1월~3월.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문밖에서 "진고(Jingo)"라는 라벨이 붙은 짖는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 독립정부도 시류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예견했듯 초대국왕 오토가 그리스 국민의 정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뒤이어 강대국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왕위를 이어받은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입헌군주정과 흡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또한 개신교의 장자 루터교도였으나, 정교도인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손녀 올가를 아내로 맞이하며 국민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그리스 국민이 어떤 연유에선지 몰라도 공화정보다 왕정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대그리스주의라는 향수에 젖은 국민 신뢰를 얻는다. 1897년이 되면서 대그리스주의가 국민 지지 속에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옛 영토를 복원하려는 의지가 오스만터키와의 전쟁을 불렀다.


크레타섬에서 오스만터키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크레타를 돕기 위해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군대를 주어 출전시켰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그리스 독립은 허용하지만, 영토를 넓히는 데는 묵과하지 않았다. 발칸반도에 그 누구도 일등 강자가 되어서는 곤란했다.





강대국 의지대로 터키가 제안한 크레타에 자치령을 허락했지만, 그리스는 따르지 않았다. 진군을 거듭하던 그리스군은 아테네 시민으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민족과 조국이라는 의분에 찬 정의가 가슴에 폭풍 같은 바람을 일으키자 수천 명의 젊은이가 콘스탄티노스 1세를 따라 입대러시를 이뤘다. 그러나 의기만 충만했지 전쟁준비는 부족했던 그리스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는 터키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진 후에야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스는 크레타를 국제자치령으로 인정해야 했고, 영토 일부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00만 터키 파운드를 전쟁 배상금으로 물어야 했다. 그리스 본토는 온전했으니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때마침 러시아가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맛본 후, 덩치만 컸지 별것 아니라고 국제사회에 소문이 나자 숨을 죽여야 했다. 한편 오스만터키제국 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제국 내 유럽영토 대부분 떨어져나간 데다가 쿠르드, 이집트 아라비아까지 분리 독립에 대한 욕구가 심해지자 오스만터키는 아래로부터 혁명의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이미 1889년 비밀리에 조직된 ‘청년투르크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년장교들로 조직된 이들은 결국 20년이 흐른 1908년 무스타파 케말(케말 파샤)를 대표로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을 일으켜 대번에 성공한다. 그리고 곧바로 발칸반도에서 화려했던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나섰다. 이들 부활의 의지는 발칸반도 신생독립국들과 마찰은 필수였다.


이를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신생강국 도이칠란트의 뒷배를 믿고 발칸반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발칸의 나라들, 즉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은 1912년 힘을 합치기 위해 발칸동맹을 맺으면서 터키와 오스트리아 이 둘을 동시에 견제했다.


드디어 발칸동맹과 터키와의 한 판 승부, 1차 발칸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터키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스스로 전사의 나라 몬테네그로였다. 이에 발칸동맹국이 하나 둘씩 합세하자 장기전에 돌입하리란 예상을 뒤엎고 결과는 뜻밖으로 나타났다. 보잘 것 없었던 신생독립국이 힘을 합쳐 그래도 명색이 대제국인 오스만터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유럽을 놀라게 했다.


기실 터키 주력부대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한 판 전투가 벌어지던 중이라 잔여 병력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터키로서는 뼈아픈 패전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 터키 국경이 된 이스탄불을 비롯해 인근지역만 남기고 500년을 호령했던 대제국은 영광의 이름만 남게 된다.


제2차 발칸전쟁은 욕심이 부른 난타전이었다. 1차 발칸전쟁으로 오스만터키가 떠난 자리는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라고 생각했다. 국경도 느슨한 터였고, 살아가는 사람들 정체성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던 국경 인근은 종교까지 뒤엉켜 문화적 자존감만 살아 꿈틀댔다. 이때 마케도니아 땅이 불가리아 촉수에 걸려들었다. 불가리아는 기습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선점해 넓은 영토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대불가리아주의라는 혼령이 욕망을 부추긴 탓이었다.


옛 영광을 꿈꾸기는 세르비아와 그리스 역시 다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불가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루마니아도 관망 자세에서 승리가 빤해 보이는 곳을 숟가락을 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불가리아주의 귀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는 발칸의 맹주라는 장대한 꿈을 품고 전쟁을 일으킨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의 영원한 맞수로 생각했던 터키까지 발칸 동맹군에 가담했고, 전사군단 몬테네그로도 빠질세라 거들었다. 그러자 군사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이틈에 터키는 동트라키아 땅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개전 두 달 만에 두 손발 다 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상처만 남긴 전쟁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해 세르비아 등 승전국은 다투어 전리품을 챙겼다. 덕분에 불가리아 영토만 쪼그라들었다. 선동질하던 대불가리아주의 귀신은 그제야 자취를 감춘다.


이 모습을 보고만 있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아니었다. 유럽 강대국의 이권다툼과 견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상한 이중제국은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부활의 꿈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발칸반도는 민족과 종교, 문화를 비롯해 옛 영토 부활에 대한 의지, 외세 간섭이 뒤섞인 긴장의 촉수가 고개를 쳐든 채 누군가가 건드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1.불가리아 소피아대성당.JPG 불가리아 소피아 대성당(사진제공 박재현 작가)


한편 그리스는 게오르기오스 1세가 불가리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왕자시절 터키와의 전쟁에 지휘관으로 앞장서 패배를 거듭하자 아버지와 함께 인기가 곤두박질치면서 공화파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뒤이어 두 차례 발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즉위 직후에 알렉산드로스 고향 테살로니키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어느 정도 인기를 만회할 수 있었다.


이때, 도무지 지치지 않는 대세르비아주의가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한 발의 총성이 유럽 전역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이 철없는 청년이가 쏜 총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유는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은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가능하지만, 점령국 오스트리아가 걸림돌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선 발칸반도를 지배의 구실로선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편’에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열아홉 살 청년에 의해 시작된 전쟁에서 그리스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는 응당 발칸반도였다.


그리스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등 연합군에 가담해 루마니아와 손잡고 불가리아를 공격해 승전국이 된다.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와 도이치제국으로 줄을 잘못 선 탓에 또다시 패전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발칸반도 승전국, 특히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 땅덩어리를 또 내주어야 했다. 대제국 오스트리아도 역사에서 제국이란 깃발을 내려야 했다. 러시아 또한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화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된다.




22.오스트리아황태자.jpg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다행일까. 그리스는 승전국이 되면서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몰아 대그리스주의 꿈을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19년 그리스는 또다시 터키제국을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아무리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종이호랑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에너지를 얕보았다. 1922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대패하면서 드디어 대그리스주의는 꼬리를 감추어야 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한 후폭풍은 그리스 정치 판도를 뒤집어 놓는다. 망명에 이어 두 번 씩이나 국왕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1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해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채 일 년을 못 견디고 죽음을 맞는다. 그리스는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마저 국왕지지파와 공화파가 갈려 원수처럼 지냈다.


이때 발칸반도에는 슬라브민족 최초의 통일국가, 즉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조각보 나라 집합체 ‘유고슬라비아’란 나라가 탄생한다. 기실 민족적 이질성만 두드러진 나라들 연합국가였다. 이제 발칸반도에는 그리스를 비롯해,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고 유고란 국가로 정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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