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이 오스만트루크 메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되면서 그리스는 물론 발칸반도에 오스만트루크 통치시대가 도래했다. 그리스는 로마 500년에 이어 400년 가까이 침묵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오스만트루크는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 있던 발칸반도 북쪽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기독교 교권에서 이슬람 교권으로 탈바꿈시켰다. 발칸반도 내 이슬람 압제하의 기독교는 대내외적으로 몸을 사리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몸은 통제할 수 있어도 믿음과 사상만은 어쩔 수 없었다. 식민지인 마지막 자존심이 종교였고, 목숨을 건 신앙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은 여느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민족 종교를 인정하면서 관대함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슬람화 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식민지 백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상은 무거운 세금과 신분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제국 내 교회 건물 역시 이슬람 사원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었다. 이교도에 대해 굴욕감을 주기 위해 교회 출입문은 지상에서 높이 1m이상 만들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았다. 식민지배 종교인만큼 기어서 들어가고 기어서 나오란 뜻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면을 1m 낮춰 교회를 올리면서 드나드는 문을 2m 높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스 수도의 아테네대성당만 봐도 주변 광장에서 1m 아래로 움푹 꺼진 곳에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오스만제국은 군인이라면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공평하게 땅으로 보상을 해주었다. 그렇게 되자 세월이 지날수록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스는 물론 세르비아 명문가들조차 개종에 동참한다.
산악지방인 발칸반도는 소통보다 단절과 고립된 취락의 조건이 대부분이라 마을 전체가 개종하는 일도 있었다. 토착종교와 뒤섞인 느슨한 기독교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이 많이 이루어졌다. 신이라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다보니 같은 민족이지만 종교가 달랐고, 이웃 간에도 종교가 달랐으며, 같은 핏줄을 가진 친족 간에도 종교가 뒤엉키는 상황으로 변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훗날 가공할만한 아비규환의 판이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스 독립
발칸반도 오스만트루크 식민지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던 안하던 병역의 의무는 공평하게 졌다. 제국 내에서 겉으로는 밀레트, 즉 민족과 종교 공동체로써 집단 거주지역이 공존하면서 평화가 지속되는 듯했지만, 침략전쟁에는 식민지 백성이라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쩌면 죽음으로 내 몰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원이었을 법했다. 오스만트루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변모시킨 여세를 몰아 동쪽 페르시아와 아랍세계를, 남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평정한 후 본격적으로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앞에서 싸우고 있는데 주위에서 신경 거슬리게 할 만한 요소들을 사전에 제거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크왕가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크고 작게 치고받으며 유럽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진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오스만제국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과 계속된 전쟁에서 귀족의 힘이 막강해지자 반대로 술탄 권력은 초라해져갔다.
더구나 러시아마저 오스만제국 등에 칼을 들이대는 형국으로 변하고, 1571년 스페인 함대를 중심으로 베네치아공국-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과 ‘레판토 해전’에서 맞붙어 궤멸되면서 점차 종이호랑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귀족들은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르네상스를 경험한 서유럽의 경제발전과 가공할 무기에는 애써 눈감고 있었다.
▲ 오스트리아 빈의 쉰브룬 궁전.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합스부르크가문의 여름 주거지로 알려졌다.
특히 오스만 직업군인 에니체리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개신교도들 반란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격에 나선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난공불락 빈을 포위했지만, 위기를 느낀 인근 폴란드를 중심으로 가톨릭국가 연합군 8만 명이 빈을 돕기 위해 출정했다. 결국 1683년 칼렌베르크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은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이 승리를 계기로 연합세력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대 이슬람전선을 펼치게 된다. 오스만제국은 안간힘을 썼지만, 뒤이어 1798년 나폴레옹과 한 판 전투에서 단 일주일 만에 이집트를 통째로 내줘야 했으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허울뿐인 제국의 실상을 알고도 그냥 있을 그리스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 정교 전통을 지켜가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더구나 부동항 확보라는 목표에 국운을 건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은 툭하면 치고받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하며 국제정세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프랑스혁명. 들라클루아
18세기 말이 되면서 민족주의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19세기 초가 되자 그리스 사람들은 경제력이 높아지는 동시에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큰 물줄기에 합류하면서 독립에 대한 욕구가 더욱 물밀듯 밀려왔다.
더구나 나폴레옹 부추김이 유럽에 더해지면서 민족주의라는 생전 처음 맛보는 환희에 찬 용어가 탄생했다. 민족이란 깃발아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앞세워 흩어지고 새롭게 뭉치면서 비장미 넘치는 기운이 샘솟았다. 민족이라는 의기 앞에 헤쳐모여의 동기가 부여되면서 독립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는 초승달(사실 그믐달이지만)제국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는 땅덩어리를 더 많이 가지려 불쏘시게 역할을 자처한 제국주의 소산이었다.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도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독립 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그 선두에 그리스가 있었다.
그리스는 1814년에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가 ‘헤타이리아 필리케’가 조직되고 1821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더구나 그리스 독립은 유럽인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 압제에 신음하는 그리스는 유럽 역사와 문화,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적 뿌리로 등극하면서 반드시 독립시켜야 할 땅이었다.
그 이면에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 천도를 계기로 그리스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동로마가 오스만제국에 멸망하기까지 1100년이 넘도록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 기독교 용어에 그리스어가 특별히 많은 것이 이상하지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400여 년 가까이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하나 터키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서구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를 최초의 유럽으로 여기듯 그리스와 로마는 자신들 문화와 태생적 정신적 뿌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스 독립
1822년 1월, 그리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오스만제국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오스만제국은 기존 질서 유지를 위해 탄압을 가속화 했다. 이때 서구사회는 예술과 문학은 물론, 과학기술발전에 진일보하면서 전쟁무기까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고,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트루크 두 제국의 넓은 영토가 식욕을 자극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신성강국으로 떠오르는 프로이센까지 두 제국에 압박을 가해왔다.
더구나 폴란드와 스웨덴, 이탈리아 등 고만고만한 나라까지 합세하면서 유럽 각국끼리 이합집산이 이루었다. 이 기세에 밀린 오스만제국은 점점 쪼그라들었으며, 결국 기독교권이 이슬람교권 역전에 성공한다. 더군다나 넓은 영토를 차지한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서아시아 나라들과 페르시아,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중해 곳곳에서 터지는 전쟁도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실신 일보직전에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리스 독립에 더욱 힘이 실린 것은 때마침 18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낭만주의란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전적 엄격함과 사회 규범을 중시한 신고전주의에 대항해 떠오른 낭만주의였다.
개인주의적이며 지성적인 감성을 중시하는 풍조인 만큼, 서유럽에 대한 뿌리 그리스란 향수를 자극했다. 일파만파, 유럽에 미치는 낭만주의 사조는 ‘그리스사랑운동’으로 이식되면서 그리스 독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화두가 됐다. 그리스 독립이라는 이 영웅적인 명제에 자발적으로 전쟁비용을 쾌척하는가 하면,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이 발칸으로 몰려들었다.
독립전쟁의 횃불을 높이 든 그리스는 ‘자유냐 죽음이냐(Eleutheria e Thanatos)’구호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국기가 푸른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는 청색과 독립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모두 아홉 줄인 것은 이 구호 아홉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정식 국가로 공인받기까지의 9년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좌측 상단의 십자가는 그동안 독립이라는 영웅적인 전투를 이어가게 했던 정신적 지주 그리스 정교의 상징이다.
그리스 독립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연합했고, 자발적 용사들이 그리스로 몰려들자 탄력을 받으면서 1827년 독립의 꿈을 이룬다. 그해 10월 20일 지중해를 접한 그리스 나바리노(필로스) 전투에서 오스만군대가 궤멸당하다 시피 하면서다. 그리고 1829년 국제사회에 정식국가로 인정받으면서 여타 민족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안겨주면서 민족독립이란 대명제에 박찬 감동을 안겨준다.
그리스 초대 국왕 오톤 초상
1832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참석한 런던회의에서 비잔티움제국 핏줄이면서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출신 왕자 오톤(Othon)을 그리스 초대 국왕에 앉혔다. 전제군주국가가 된 그리스로서는 좋다 싫다 할 여유가 없었다. 비잔티움 핏줄로 왕위 계보를 이었으니 정통성을 강조한 진골 중의 진골을 환영했다. 17세 젊은 왕자는 바이에른 출신 조력자와 3천5백여 명 군인을 배에 태워서 그리스에 입성했다. 이후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불 보듯 빤한 이치다. 영국 차관은행의 높은 이자율은 그리스 국민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했다. 무엇보다 그리스 정교를 믿는 나라 국왕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었다. 애초부터 그리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국민들로부터 위엄은커녕 군부 지지도 받지 못했고, 어느 한 구석이라도 존경받을만한 요소라곤 없었다.
하나 덧붙이자면, 1836년 발칸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던 때 프랑스인이 당시 그리스를 여행한 후에 한 말이다.
“투르크족의 노예로 살아가던 그리스 사람들 모습은 실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 후의 그리스는 끔찍하기만 했다. 절도와 폭력, 방화와 암살이 그리스인 삶이자 취미가 되어 있었다.”
한편 오스만터키제국(이하 오스만터키로 통칭)과 오스트리아제국 역시 식민국가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는 반대로 유럽 각국이 두 제국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의 확보라는 러시아의 오래된 꿈이 서진으로 이어지며 발칸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가 흑해를 둘러싼 발칸지역을 기습적으로 침략하자 깜짝 놀란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잠시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다. 러시아가 지중해를 차지하면 프랑스는 물론 영국으로선 인도로 가는 무역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1853년 러시아가 두 강대국에 의해 주춤주춤 발칸반도에서 후퇴를 거듭하자 이에 만족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은 크림반도(크림전쟁 1854년)까지 따라가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내 땅에서 남의 군대끼리 치고 박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오스만제국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허울뿐인 존재로 국제사회에 낙인찍힌다. 조선 구한말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두 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다.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만터키를 도운 것은 발칸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발칸반도가 한 덩어리 나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 강대국은 후발주자 프로이센처럼 또 하나의 대국이 등장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