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동쪽을 향해 버스로 한 시간을 달리면 스메데레보가 나온다. 인구 7만 명이 채 되지 않은 도시지만, 베오그라드 지척에 있는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도나우강이 도심을 감싸며 흐르고, 낡은 석축성벽이 우뚝 솟아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폭력의 역사를 서둘러 입을 연다. 로마제국 당시에는 로마 땅이었다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땅이자 세르비아 수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 침탈과 아픔이 담긴 저력(?)의 도시다. 그리고 오스만과 헝가리 국경을 긋는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군 긴 장화발이 장악하면서 하켄크로이츠 폭력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인간의 능력은 창조와 건설에 발휘되지만, 모방과 파괴에 더욱 뛰어난 재능을 자랑한다.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은 주로 낡아 초라하기까지 한 스메데레보의 성을 보기 위해서다. 도나우강과 사바강 합류지점에 서 있는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처럼 도나우강과 스메데레보 도심을 관통하는 예자바강 사이 두물머리, 혹은 합수머리에 버티고 있어 사람들은 ‘물 위의 성’이라고 부른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차역을 지나야 했다. 성 입구 허물어져가는 성벽과 마치 띠처럼 어울리는, 언제부턴가 멈춘 녹슨 열차의 처연한 모습은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도나우강이 도심을 감싸고 흐르고, 강물을 바라보며 낡은 석축성벽이 우뚝 솟아 있다. 로마의 땅이었다가 오스만제국 땅이자 세르비아의 수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 침탈과 아픔이 담긴 저력(?)의 도시다. 그리고 오스만과 헝가리의 국경을 긋는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군의 긴 군화발의 폭력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스메데레보성은 1430년 무렵 세르비아공국 군주 브란코비치 명에 의해 세워졌다. 물론 장기간 공성에 대비한 수성의 역할이 성 내부 곳곳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성벽두께 2m, 한눈에 보아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본뜬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비잔티움 스타일이다. 25m 높이 망루(성 전체에 25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함), 우물, 화장실, 마구간, 계급과 신분의 차에 따라 거처의 높낮이 차이도 애써 찾아보았다. 한 곳에서 알게 모르게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만, 지원금이 딸려서인지 급할 것이 없는 모습이다. 세월에 허물어지고,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원형은 상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니 입체그림을 그려내는 소프트웨어 성능도 딸리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서 무척 드물게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니 할 말을 잊는다. 관광객 낙서에 온몸을 그대로 맡기는 구간도 있다.
우리나라 청잣빛 하늘을 닮은, 도도하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풀어 놓고 그야말로 멍 때리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늘 시간을 급조해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쟁이는 형태를 잃어버린 채 서 있는 성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돌계단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전쟁의 화급함을 상상했다. 아비규환 속 절규도 그렸다. 그러다 좁은 아치형 통로를 몇 개 돌아서자 탁 트인 망루에 이방인이 올라서 있었다. 건너편 도나우강을 바라보는 망루가 외성(外城)의 존재를 알렸다. 독일 남부 산악지방에서 발원해 흑해로 흘러드는 물길 그 아랫부분에 속하는 스메데레보 도나우강은 그래서 더 넓고 잔잔하며, 한적하기까지 하다. 다분히 세월에 삭아 내린 성채와 고색창연하게 어울리며 장엄하기까지 했다. 허물어지는 성벽 아래를 걷는 젊은 아낙과 조막만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해맑은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동방의 수도자 글이 생각났다.
“네가 무한한 사랑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신의 은총을 입은 순간에 잊지 말아야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스메데레보 성과 기찻길
이방인에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낯선 곳에서 먹거리다. 스메데레보성, 길차길옆 작은 식당, 비록 낡은 비닐조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머리를 숙인 채 우연히 들어서서 맛본, 메뉴판을 들고서도 도무지 이름을 읽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두께 2cm 됨직한 다진 쇠고기를 넣고 토마토를 비롯해 양파 등 채소가 가득 들었다. 우리나라 햄버그와는 맛은 물론, 크기에 있어서도 비교가 안 된다. 대․중․소가 있어 가장 작은 것을 주문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어마무시한 크기라서 실수로 잘못 나온 줄 알았다. 인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란다. 포장해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넌지시 분주하기 짝이 없는 주방을 훔쳐보다가 깜짝 놀랐다. 훈제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 중 가장 큰 것이 우리나라 개다리소반 너비만 했다. 콜라와 곁들여 먹는 맛 또한 일품이다. 사이사이 구멍이 숭숭 뚫린 부드럽고 촉촉한 빵과 잘 구워진 다진 고기가 잘 어울렸다. 때마침 참새 두 마리가 나눠먹자며 교대로 식탁에 앉는다. 저 쪼끄만 참새조차도 제 눈에는 낯선 이방인 생김이 만만한 게다.
공원 의자에서 장바구니를 하나 씩 들고 빨간색 캔 음료를 마시는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에 인생의 황혼에서 맛보는 여유를 보았다. 따스한 햇살아래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말을 거는 할머니 모습은 이보다 행복한 표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문득 고국 땅 붙이들이 생각났다.
옛 헝가리 땅 노비사드
세르비아 제2의 도시, 베오그라드 북부 노비사드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도나우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다. 철도망과 도나우강 운하를 통한 중부 유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그런 만큼 파괴를 부르는 전쟁의 역사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이 말은 그 옛날 중부유럽을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요새에서 시작되어 확장을 거듭한 도시인 터라 이민족 방어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라고 증명하듯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견고하게 남아 있다. 도나우강을 일차 자연방어막으로 두고 그 뒤에 튼튼한 성벽을 높게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페트로바라딘 요새. 노비사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땅이었다. 현재도 노비사드에는 헝가리 사람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노비사드는 세르비아말로 ‘새로운 정원’이라는 뜻이다. 오스만트루크의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뒤 90km 떨어진 노비사드는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쉴레이만 대제가 가톨릭 세계의 본거지 오스트리아를 침략할 때 소수의 병력을 첨병으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성채 정상에 오르면 굽이쳐 흐르는 도나우강의 반짝이는 윤슬에 내 눈이 반짝이고, 은빛 도나우강을 바라보노라면 그간의 여정에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경이로운 경험을 한다. 이곳 노비사드 역사적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땅이라는 데 있다. 나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주축국에 가담했고, 패전을 맛보면서 국토를 좁게 만든 원인이었다. 현재도 노비사드에는 헝가리 사람이 40%를 차지하고 있는 사연이다.
그 이전에 오스만제국이 발칸 맹주로 떠오르자 베오그라드 주민이 그들을 피해 헝가리 땅이었던 노비사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요새취락이 형성되었다. 그래선지 노비사드는 세르비아말로 ‘새로운 정원’이라는 뜻이란다. 새로운 정원에서 새롭고 행복한 삶을 꿈꾸었지만, 오스만트루크제국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뒤 90km 떨어진 이곳 노비사드는 그냥 두었을 리 없었다. 놀랍게도 새로운 정원의 요새 페트로바라딘을 쉴레이만 대제가 가톨릭 세계 본거지 오스트리아 빈을 침략할 때 소수 병력을 첨병으로 보내 순식간에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성벽의 견고함이나, 지형지물을 보았을 때 그리 쉽게 공략당할 성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랬다고 하면 그런 거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 공략할 기반도 여기서 다졌다고 한다. 그곳에 올라서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의문이다. 이 굳건한 옹성이, 물길을 앞에 둔 철옹성이 부지불식간에 얼마 되지 않은 첨병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역사가 믿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곳 헝가리 병사들이 오합지졸 무기력했던지, 쉴레이만 오스만제국 병사들이 상대적으로 용감무쌍하면서 뛰어난 전투능력을 발휘해 철옹성을 가볍게 뚫었다고만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18세기가 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가면서 절정기를 맞았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곳으로 보이보디나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이주민이 몰려들면서 도시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곳 노비사드에는 정교 사원을 비롯해 유대교 사원, 가톨릭 성당 등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17개의 사원이 사이좋게 서로 하늘을 향해 서 있다. 페트로바라딘 요새에서 과거를 잊기 위한 행사인 듯 매년 세계 유명 팝가수들을 초대해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축제인 ‘EXIT’가 열리기도 한단다.
일명 세르비아의 아테네로 알려진 노비사드 중심가이자 번화한 광장 ‘슬로보데(Slobode/자유) 거리’는 역사를 반대로 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픈 과거를 자꾸만 들춰내 증폭시키는 일은 상처를 들쑤시는 결과를 가져온다. 되새김질 해 아파하지 말고 그냥 훌훌 털어버리란 뜻이다. 이곳 사람들이 그랬다. 물결치듯 흐르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기는 듯했다. 해가 기울기도 전에 남녀노소 누구랄 것도 없이 광장에 모여서 즐긴다. 사람들 얼굴에는 즐거움이 넘치고 웃음꽃이 만개했다.
레스토랑에 북적임도 한 몫 더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와 춤, 축제랄 것도 없는 이들 일상이다. 다만 일주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은 쉰다. 생소하게 생긴 길손은 귀동냥으로 흥을 얻어 어깨춤이 들썩였다. 그러다 거칠게 생긴 칠 척의 남자와 마주친 눈빛에 움찔 했다. 그러다 가만히 마주보니 파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다. 수염 아래 두터운 입이 가로로 찢어 풍성하게 웃는다. 가슴에 낯선 인간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노비사드 슬로보데 거리
광장 맞은편 네오르네상스식 시청사의 웅장한 건물이 무척 매혹적이다. 중심부에 뿔 같은 탑이 불쑥 솟았는데, 도시 경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지상 60m 높이라고 한다. 일반인에게 공개하는데 이방인은 은혜를 입지 못했다. 개방 시간이 지난 탓이었다. 아쉬움에 가슴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구름에 잔뜩 가렸던 하늘이 열리고 뾰족한 첨탑의 ‘성 마리성당’이 명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반겼다. 하늘이 하나를 닫으며 하나를 열어 보인 게다. 파란 하늘과 성당건물의 네거티브한 선이 매혹적이다. 구름이 심술을 부리기 전에 앵글에 담았다. 단 한 컷! 구름이 하늘을 급하게 닫는다.
상념을 깨듯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남녀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일열 횡대로 행진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손과 입에는 모두 담배를 물거나 들었다. 그 중 한 명은 채 일곱 살도 안 돼 보였다. 기이한 장면에 동방의 이방인은 이 땅에 난립한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만두어야 했다.
노비사드 즈마이 요비아 거리 역시 매일 축제날이다. 끝을 모르는 골목, 즐비하게 들어선 레스토랑의 이국적인 정취는 오히려 이방인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서둘러 또 하나 축제의 거리 두나브스카 광장에 들어서자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 동상이 나타났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인 그는 매일 이 골목에서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동상 앞 주교 궁전은 수많은 전쟁 속에서 1741년에 세운 정교회성당이었지만, 1849년에 부서진 것을 훗날 블라디미르 니콜리치가 1901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하늘 높은 줄 알아선지 높은 첨탑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비잔틴 양식에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흔적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도나우공원 녹색의 한적한 공간을 지나면 가장 먼저 찾아보았던 도나우강 건너 페트로바라딘요새가 언덕 위에 솟은 모습이 나타난다. 대교와 부서진 다리난간이 물길에 점점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이곳에, 은빛 물길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피의 역사가 자행되었다. 강변에 서 있는 ‘희생자조각(Raid The Family)’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트로바라딘 요새, 이 안경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이것을 보기 위해 찾는다니 이 또한 까닭을 알 수 없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월 21일부터 3일간 행해진 헝가리 파시스트들에 의한 만행의 현장이다. 이들 파시스트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살육했다. 지구촌 어디에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의 현장 중 한 곳이다. 동상에서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하게 잔상처럼 나타나는 상상의 기억에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