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르비아주의 망령
^ 코소보 전투장면을 묘사한 그림(아담스테파노비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이 몰살당하고 어둠의 역사를 440여 년간 경험해야 했다. 이로써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로 거듭나면서 훗날 가공할 살육전의 씨를 뿌려놓았다.
발칸반도로 이주해온 슬리브족과 더불어 세르비아 민족 역시 이들과 궤적을 함께 했다. 발칸반도로 이동하기 이전에 고대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던 땅을 세르비아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전한다. 이들은 7세기에 들어서서 발칸반도에 정착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르비아 민족은 고대국가 확장에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고 있었고, 세르비아라는 민족 이름아래 이들을 뭉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사이 엄격한 통제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여느 슬라브인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인 역시 처음에는 부족에서 시작해 점차 주위를 확장했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통해서 노예가 등장하고, 지배계급이 막강한 힘을 이용해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대의 권력자가 나타났다.
9세기 중엽 세르비아를 통일한 대족장 블라스티미르는 자신이 견고하게 다져놓은 나라의 안정을 비잔티움제국과 친교를 통해 획득하려고 했다. 비잔티움제국으로서도 하등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세르비안 정교회 보급에 전초기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전사들뿐만 아니라, 툭하면 제국을 괴롭히는 불가리족 최전선 방어벽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세르비아인은 부족장을 ‘추판(Župan)’이라고 불렀다. 대불가리아주의의 시발점인 시메온이 세운 제1불가리아 제국이 슬라브민족 중에서 최초로 세운 왕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잔티움제국의 영향에 들어 있던 세르비아인은 늘 불가리아왕국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추판들은 그때마다 비잔티움에 도움을 청했고, 결국 1018년 슬라브민족 최초 제국이자, 비잔티움제국을 괴롭히던 제1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한다.
세르비아는 비잔티움 영향권 아래서 그럭저럭 버티던 중 12세기 들어와 내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지금의 몬테네그로 수도 포도고리차에서 세르비아 부족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자비다가 죽자 네 명의 아들이 중원의 패자를 가리는 힘겨루기가 일어났다. 피의 전쟁 끝에 나머지 세 명의 형제를 제압한 네마냐란 인물이 권력을 움켜쥔다. 이때가 1166년이다.
이렇게 등극한 네마냐는 27년간, 즉 1196년에 이르기까지 세르비아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그를 추판 앞에 위대함을 붙여 ‘위대한 추판’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일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며 끊임없이 추인을 시도했다. 네마냐는 나라 안정과 발전을 위해 세르비아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정교를 중심으로 단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신념은 지금 보스니아 땅의 느슨한 정교로 치부되는 보고밀교도를 비롯해 이단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이단자들에 대해 국외추방령을 내리면서까지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부터 끝끝내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네마냐는 첫째 아들 부칸의 불만을 무시하고 둘째아들 스테판 네마니치(196~1228)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199년 죽기까지 3년 동안을 세르비아의 사원을 건립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의 노력으로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땅(보스니아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정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사후 뛰어난 후손 덕분에 대를 이어 권력을 이어감으로써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네마냐왕조’라는 명칭을 얻어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다. 첫째 부칸과 스테판 형제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내전으로 확산된다. 이때 그나마 부드러운 성정의 막내 사바 네마니치 중재로 일단락되고 왕좌를 이어받은 네마냐 둘째아들 스테판 네마니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정신적 요채로 등극하면서 아버지 명성을 이어갔다. 그의 영역은 비잔티움제국과 서로마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스테판 네마니치 역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권력을 다지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국왕으로서의 추인을 받기 위해 자신의 중간자적 역할을 은근히 내비췄을 법하다.
서쪽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함락당하고 게르만족이 활개를 치던 유럽에서 기독교권을 이용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권력 중심에 있었다. 그에 의해 왕권을 인정받은 스테판 네마니치는 날개를 단 듯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교황청에 뇌물을 바치고 겨우 추인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서로마와 경쟁관계였던 비잔티움제국이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비잔티움제국은 이미 12년 전 성지탈환을 빙자한 4차 십자군에 의해 치욕적인(오스만트루크제국의 메메트 2세에게 멸망할 때도 이렇게 치욕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약탈을 당한 후, 프랑크인과 베네치아인에 의해 정략적으로 세운 라틴황제 시대였다.
잠시 흥분하자면, 기독교가 로마제국 300년 박해를 벗어나 유럽전역에 퍼지게 되자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를 장검으로 사용해 같은 그리스도 교도를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하면서 동․서 로마 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셈이다. 더구나 혜성처럼 떠오르는 불가리아를 근근이 막아내던 비잔티움제국은 자중지란까지 일어나면서 불과 1세기 전과 비교해 반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4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 황제들로서는 스테판 네마니치를 왕으로 추인하든 하지 않던 별 의미가 없었다.
이때를 기회로 스테판 동생 사바 네마니치가 전면에 나섰다. 1219년 그는 비잔티움으로 달려가 왕국의 백성 모두 비잔티움제국 영향아래 동방정교를 믿음으로 가진 하나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혓바닥 장구채 놀들 현란한 그의 말이 먹혀들었다. 드디어 스테판 네마니치 대에 와서 독립왕국이 국내․외에 선포된다. 사바는 한발 더 나아가 동방정교 독립교구로 승인 받는 기염을 토하면서, 자신이 세르비아 초대 대주교에 임명된다. 솔직히 비잔티움제국으로서는 거대한 영토가 눈뜨고 잘려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속사정이야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하늘도 이들 편이었다. 세르비아인 영토적 민족주의 원조 격인 네마냐 왕조는 로마의 지지를 얻어내면서도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종교 역시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정교인 까닭에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안전을 기반으로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종교 자치권 획득은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다. 이로써 훗날 세르비아 국민의 사랑과 영혼인 문화적민족주의가 탄생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즉 발칸반도 내에서 대세르비아주의의 정신적 영역인 대제국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훗날 세르비아 민중은 네마냐와 사바를 성 시메온(Sveti Simeon)과 성 사바(Sveti Sava)라는 성인으로 추앙한다. 더구나 불가리아와 한 판 전쟁이 벌어질 때면 성 시메온이 우리의 창칼에 빛나고 있다며 ‘성 시메온의 힘으로’라는 주문을 걸어 자가 발전해 전투를 벌이곤 했다. 세르비아인 강력한 연대감은 네마냐왕조가 일으킨 세르비아정교회로부터 나왔으며, 스스로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 세르비아인으로 일취월장하며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가 된다.
세르비아의 영웅 스테판 듀산(위키백과)
네마냐 왕조가 생산되고 100여년이 흐른 후 위대한 세르비아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스테판 듀산이 등장한다. 그는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다. 그만큼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영토 확장 전쟁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저물었다는 뜻이다.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제국도 눈치를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특히 비틀거리는 비잔티움제국 영토를 야금야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발칸반도 전역,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영역까지 장악해 제국 영역에 포함시켰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거듭났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 그가 승승장구한 데에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했다. 동․서로마 사이에서 교역로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를 이용한 막강 용병으로 영토 내 반란을 진압하면서 북쪽 마케도니아 전역을 손에 넣는다. 국력은 종교 지위도 격상시켰다. 스테판 듀산 스스로 세르비아인을 비롯해,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알바니아인의 황제라 부르며 발칸반도에 위세를 떨쳤다. 스스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왕’이라 부르며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영역에 세르비아 정교회 확산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비잔티움제국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하필이면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제국에게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오스만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샘이다. 결국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 멸망은 물론 천년을 넘어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 종말을 앞당겼으며, 더 길게 보면 발칸반도 이슬람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렸던 스테판 듀산, 무한한 생명일 듯했던 그도 역시 인간이었다. 1355년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오던 도중 급작스레 죽어버리고 만다. 세르비아의 걸출한 영웅이자 굳건하게 버텨주던 기둥이 쓰러지자 곧바로 제국은 몰락의 기운이 요동쳤다. 아버지 이름 앞에 ‘강자’를 붙였듯,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스테판우로스 앞에 네나먀 왕조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로 ‘약자弱者’라는 별칭을 붙여 ‘약자 우로스 5세’라며 세르비아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더구나 발칸에서 힘으로 밀어붙이던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세르비아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로스 5세는 약자라는 명칭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산기능도 불구였다. 그러자 내치가 흔들리고, 이전투구가 판을 치면서 국제정세에 재빠르게 대응할 능력마저 상실해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비잔티움제국은 자신들이 불러들인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압박을 가해오자 이제는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를 비롯해, 불가리아, 보스니아, 헝가리 등 십자군이 꾸려지면서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된다. 이를 시작으로 두 종교간 전쟁은 발칸반도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오스만트루크제국 적수가 되지 못했다.
1363년과 1371년 두 번에 걸친 마리짜강 전투에서 우로스를 비롯해 그 형제들까지 전사하자 세르비아는 졸지에 오스만터키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르비아 귀족들은 듀산의 후손 라자르를 왕으로 옹립하고, 오스만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미 상쇄하던 기력이 다한 후라 때는 늦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오스만제국과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 코소보에서 오스만과의 한 판 대결은 결국 세르비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코소보 전투'는 <맛보기 세계사> 1편에 자세하게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