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정교와 암흑기 세르비아
* 베오그라드 구 시가지
시대적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세르비아는 완전히 격리된 채 이슬람 생활양식에 순응하면서 묵묵히 삶을 이어갔고,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달랐음에도 데브시르메(Devsirme), 즉 전쟁포로 중 소년징발과 공납이란 방식에 의한 직업군인 에니체리에 기꺼이 발을 들이며 전쟁을 수행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희대의 살육자 티무르가 공격했을 때 이슬람 술탄을 위해 결사항전 했던 세르비아 병사들이었다.
이렇듯 지금에 와서야 유럽의 영역에 유입되지만, 당시에는 그저 이슬람제국 백성일 뿐이었다. 피지배민족은 봉건제도 아래 중앙과 분리된 느슨한 구조 속에서 충성을 다하며 질서에 편입된다. 종교가 비교적 자유로웠으니, 세르비아정교를 가지고서도 다른 이슬람민족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슬람 연구자들 주장대로 이교도 강재 개종금지는 성경 코란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일련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종교단체 집단 거주지이자 통제를 위한 집단 밀레트를 중심으로 제국에 순응하면서 세르비아민족이라는 영속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 정교회라는 믿음을 보장받으며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에 순응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생활수준도 엉망이었다. 오랜 세월 오스만 지배를 받은 세르비아는 말 그대로 식민정책으로 문맹의 나라였다. 교육기관이라곤 세르비아에 대학교는커녕 중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두 개가 전부였다. 문화를 전파하는 인쇄소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세르비아어조차 배울 수 없어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정해 학교에서 교육할 정도였다.
이웃 몬테네그로는 더 열악했다. 1834년 까지 어떤 교육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세르비아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터전을 옮겨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1767년 두 나라 모두 합쳐 20개가 넘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18세기 말에는 무려 70여개로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로베니아는 사정이 더 좋아졌다. 1849년에 초등학교가 1천 개를 넘었다. 세르비아인 귀에도 이런 소식이 들렸을 법했다. 그러자 당연히 크로아티아로 가면 잘살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도중에 목숨을 잃거나, 국경 수비대에 뇌물을 주고 겨우 성공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에 터전을 잡으면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훗날 배타적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살육의 발판이 된다.
어둠과 암흑의 시대로 돌입! 그러나 그 와중에 눈치 빠르고 발 빠른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네 일제강점기처럼 제국에 빌붙어 자민족 고혈을 짜내는 인간도 생겼다. 베지르 메메드 소콜리에 의해 세르비아정교가 활기를 띤다. 하지만 어떠한 관용에도 대가가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리스마저 오스만트루크제국 발아래 들면서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를 그리스정교 교구에 예속시켜 버리자 세르비아인은 자존심이 상했다. 세르비아정교회는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스만트루크 지지를 얻어 독립교구로 거듭나고자 종교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1557년 목표에는 성공했으나,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지지하며 정당화하는 악수를 둔다. 일련의 이 사건에는 오스만제국에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메메드 소콜리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까지 해가며 술탄 쉴레이만의 수족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에 의해 세르비아는 페치교구가 부활 했고, 자신의 동생 마카리우스를 세르비아 주교로 올려 부흥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엄격하게 바라보면 밀레트라는 종교조직 속에서 세르비아인 통제를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대신 산악지방이 대부분인 발칸반도 지형상 트루크 귀족 지배에서 벗어난 농민의 패쇄적인 삶은 정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러자 조직적인 항쟁은 오랜 세월동안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르비아정교라는 정체성은 꾸준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정복전쟁을 즐겼던 술탄 무스타파 2세(재위 1695-1703)는 정교회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페치 교구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르비아정교회는 지지기반이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종교자체는 민중항쟁의 구심점에 있었지만, 이는 세르비아정교회에 성인으로 추앙된 인물들이 가슴 뛰는 추억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정교에는 대략 58여 명의 성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네마냐왕조 시조 네마냐를 비롯해 세르비아정교회가 독립교구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사바와 세르비아 최초 황제 스테판 듀산, 코소보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18세기에 시작된 세르비아 항쟁은 민족적 항쟁이 아니라 발칸반도 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주장처럼 신앙에서 파생된 순교자적 저항에 힘이 실린다.
세르비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의 근원을 먼저 알아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민족의 정체성과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단초가 될 만한 요소가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면, 발칸반도 내 여러 나라와 민족들이 섞이면서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욕망의 화신에 의해 장엄한 민족주의가 화려하게 탄생하면서부터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압제 4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자의든 타의든 세르비아가 독립을 맞이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왕국을 거쳐 민족이라는 장대한 용어가 사건과 역사와 인물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세기 중엽 대세르비아주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도사인 부크 카라지치(1787~1864)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출발하는가?’, ‘세르비아인이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등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세르비아인에 대한 미래에 해답을 찾았다. 자칭 타칭 대세르비아주의 창시(?)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언어학에 몰두하면서 발칸반도에 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꾼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세르비아 정치가이자 제1 발칸동맹을 주도했던 가라샤닌(1812년~1874년)의 노력으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오랫동안 대세르비아주의 이념에 몰두했다.
그리고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위대한 인물과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세계가 우리(We)와 그들(They)로 규정될 때 가라샤닌은 물론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에서 코소보 전투를 살려냈다. 짐작컨대 이 행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정의라고 확신했다. 정의를 내걸었지만, 편향된 애국심이 가슴에 요동쳤고, 권력자 구미를 당겼다.
‘이교도와의 최후의 성전’, ‘이민족과 세르비아민족의 아프고도 전설적인 전투’는 민족주의 발흥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코소보 쥐짜(Žica)에는 세르비아정교 첫 교구가 세워진 곳인 만큼 세르비아로선 가장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이 찬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가 성지로 거듭났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코소보의 정신을 이어받아…”로 시작하는 구호와 선동문이 인기를 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던 민족주의는 카라지치 주장대로 중세 발칸을 호령했던 듀산황제가 거느렸던 영토적 개념이 세르비아뿐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다. 타 공화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의 국가를 향한 군사적 저항을 정당화해버린다. 또한 세르비아정교를 확대하면서 민족정기를 종교와 접목해 호응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자 정점에 다다랐다. 나아가 가라샤닌은 마지막으로 언어를 끌어들였다. 남슬라브족 중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쉬토방언을 중심으로 문화와 영토 범위를 규정해버린 것이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 성지로 거듭났고, 20여 년 남짓 제국을 구축했던 듀산황제는 세르비아인 영원한 황제로, 코소보전투가 벌어졌던 1389년 6월 28일은 성 비투스의 날이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하는 성전의 날로 태어났다. 이제 세르비아인은 ‘강자 스테판 듀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민족이라는 의기에 요동쳤고, 민족 이상에 상처를 내는 일에는 자동적으로 분기탱천했다. 당연히 코소보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도 되살아났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잊지 못하듯 세르비아인으로서는 민족주의라는 의기가 가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이 위대한 인물들을 세르비아민족주의 영원히 빛나는 별로 가슴에 크고 환하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누구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되어 살육의 싹이 자라난다. 세르비아의 강력한 호응에 힘입어 대세르비아주의로 확대 확산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웃기는 말이지만, 스테판 듀산이 거느렸던 영역은 세르비아 정치지도자는 물론 세뇌당한 국민 머리에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상징적인 국경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세르비아주의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를 거듭하는 전차처럼 변했다.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학살전쟁, 더 나아가 20세기 가장 더러운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 살육전 신념으로 거듭나게 된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망령은 이렇게 해서 창조된 후 도미노처럼 연이은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다.
물론 세르비아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 우스타샤 정권이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 명(부상자 포함 70만 명)을 학살했던 상처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자신들만 가해자라며 핍박을 가해대니 억울하고 원통할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성지라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코소보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진을 치고 나라를 세웠다며 국제사회에 선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세르비아인으로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것이 아니라, 허락도 없이 남의 집 지붕에 건물을 올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간의 묘한 사정이 있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 금세 다른 물이 채워지듯 네마냐 왕조가 이슬람제국에 멸망한 후 코소보에 살던 일부 세르비아인은 압제를 피해 지금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노비사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떠나고 난 빈집에 오스만제국이 평정한 알바니아계 이슬람이 몰려들어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소보 땅에 알바니아인이 80%이상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나아가 마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듯 세르비아 성지에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선언하며 국경을 긋고 세르비아를 자극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국제사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냉혹하기만 한 국제사회는 빨아먹을 것도 없는 코소보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든 말든, 폭력이 자행되던 말든 아무도 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나라가 없었다. 그러자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민족 희생을 미끼로 교묘한 전술을 펼친다. 즉 코소보의 세르비아인 경찰을 살해해 세르비아인으로 하여금 의도적인 폭력을 부추겼다. 울고 싶은 놈 뺨을 갈겨준 대가는 혹독했다. 세르비아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를 향한 제노사이드를 감행했다. 결국 알바니아계는 자신들 뜻대로 자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제사회 관심을 끄는 것에 성공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의 개입이 본격화 되자, 세르비아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는 신념에 찬 민족주의자의 편향성이 집단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의와 불의로 나눠지고, 거짓과 조작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쉽게 예를 들어준 경우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역사를 위조하는 것쯤은 정의로 규정해버리고, 그 뜻이 가팔라질수록 진실은 간곳없이 선동과 폭력이 확산되고, 결국 처참한 상처로만 남는다. 아비규의 현장에는 이들이 믿는 신조차도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알바니아 내 세르비아인 학대가 일어나며, 몬테네그로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핍박은 어쩌면 성악설을 정당화한 인간들로서는 당연한 것일 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 역시 바늘방석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또한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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