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쉬의 경쟁자 블랙조지가 해외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1817년 7월 밀로쉬는 그암살자를 블랙조지에게 보내 머리를 잘라 술탄에게 선물로 바친다. 밀로쉬는 정적 제거는 물론 술탄에게 충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무한 신뢰를 얻는다.
1815년 유럽세계 역시 변화의 급류에 휘말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한 후 몰락하고 엘바섬에 유폐된다. 그리고 섬을 탈출해 프랑스를 재점령하면서 100일 천하를 이루었지만, 끝내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에게 패해 대서양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재차 유폐되면서 세계 제패라는 말도 안 되는 꿈에 종지부를 찍는다.
기회를 틈탄 러시아 차르는 용기를 가다듬고 부동항의 확보를 위해 재차 발칸반도로 진출하자 이에 놀란 것은 터키뿐만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들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오스만터키 술탄은 넓은 제국을 안간힘으로 지켜내느라 동서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이틈을 노린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조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얻어 기세를 올린다. 영국과 프랑스는 바짝 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오스만터키로부터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밀로쉬는 문제가 많았다. 1814년 9월 블랙조지, 즉 카라조르지예 추종세력들이 새로운 혁명봉기를 위해 모임을 결성하고 밀로쉬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금지원은커녕 오스만터키에게 이를 고해바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외운송 독점권에 이어 운송장비까지 독점했다. 이후 블랙조지를 따르는 해외파와 밀로쉬를 추종하는 국내파로 세르비아는 툭하면 정정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 제공자다.
1815년 11월이 되면서 세르비아민족회의는 최고지도자에 밀로쉬를 추대한다. 2년 후 1817년 초 오스만터키는 골치만 아픈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착하게 말 잘 듣는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공국 왕좌(공작)에 앉혀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슬람에 몸을 비벼 자치권만 획득한 밀로쉬에 세르비아인 불만이 증폭된다. 세르비아인들은 밀로쉬와 카라조르지예(블랙조지)를 비교하며 블랙조지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 했다. 그러자 밀로쉬로서는 블랙조지가 세상에 없어져야 온전한 자기의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을 굳힌다.
블랙조지가 해외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1817년 7월 블랙조지가 그리스 혁명지도자들과 연합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혁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밀로쉬로서는 그냥 두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암살자를 블랙조지에게 보내 머리를 잘라 술탄에게 선물로 바친다. 밀로쉬는 정적 제거는 물론 술탄에게 충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무한 신뢰를 얻는다. 블랙조지를 추종하던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세르비아 하층민에게 있었다. 가난과 핍박 등 혼란한 정국 속, 이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세르비아농민의 불만은 증폭되어 갔다. 그러나 왕권을 유지하려는 밀로쉬는 농민을 달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가두곤 했다. 이전의 에니체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는 이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1821년 3월 6일 그리스 독립투쟁이 본격화되고, 러시아가 오스만터키제국 턱밑에 대포를 포진하면서 세르비아 완전한 자치권을 요구했다. 오스만은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세르비아인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1828년 러시아는 오스만터키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듬해 8월 러시아군대가 아드니아노플을 점령한 후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오스만제국은 그제야 두 손을 들었다. 아드리아노플조약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
뒤이어 1830년 2월 6일 밀로쉬는 세르비아 중부도시 크라구예바츠에서 세르비아자치를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선포한다. 오스만제국이 만든 왕이자, 세르비아 자치국 왕위를 획득한 밀로쉬는 날개를 다는 듯했다. 여세를 몰아 밀로쉬가 강력한 중앙집권형 권력을 추진하자 군사반란을 불러왔다. 밀로쉬가 간과하는 게 있었다. 예부터 세르비아는 지방 고유 자치권이 강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쉬 민낯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통치권 약화로 이어졌고, 블랙조지 추종세력들은 밀로쉬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그 와중에 경제정책 실패로 세르비아 경제적 뿌리인 농업정책마저 바닥을 쳤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법, 세르비아 귀족들이 밀로쉬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더구나 내정간섭을 이어가던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터키 역시 밀로쉬 독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러시아는 밀로쉬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마치 요즘의 국회처럼 위원회를 만들어 왕권을 견제했다. 결국 1839년 6월 위기를 느낀 밀로시는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폭정은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그 맛에 취하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 예라 할 것이다.
토마 부취치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의 17인으로 구성된 귀족위원회가 본격 가동하면서 이들은 열아홉 살인 밀로쉬 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를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귀족위원회의 입장에서 보면 고맙게도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못 되 죽어버렸다. 세르비아는 왕위 계승문제로 바람 잘날 없이 9개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 섭정단은 이제 막 열여섯 살이던 밀란의 동생인 미하일 오브레노비치를 허수아비로 앉혀 쥐락펴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마저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열일곱 명 중에도 강경파가 있게 마련이다. 미하일을 쫓아내고 블랙조지 가문을 찾았다. 지난 날 반란군의 선두에서 에니체리와의 싸움을 벌이던 블랙조지의 향수를 잊지 못했다. 그 선두에 토마 부취치가 있었다. 그는 군부세력을 앞세워 밀로쉬 후손과 그를 지지하는 자는 모조리 처형하거나 국외로 추방해버린다.
세르비아 17인의 귀족위원회는 블랙조지 후손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권위가 있든 말든 세르비아에 명문가가 탄생하는 순간이 연출된다. 그 첫째가 블랙조지 후손 알렉산더 카라조르제비치(카라조르지예)란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밀로시 아들이나 동생처럼 의복만 번지르르 했지 실권이라곤 개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도 세르비아 왕가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면서 일약 대대로 왕족 칭호를 받으며, 더 못난 밀로시가문과 쌍벽을 이루며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그가 16년 동안 왕좌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스스로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었다. 그 역시 17명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를 보다 못한 세르비아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승자는 역시 17인의 위원회였다. 이 일로 조르지예는 크네즈에서 물러나야 했다. 웃긴 것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 17인 위원회에 의해 루마니아로 도망친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기 때문이다. 블랙조지 후손들은 또다시 절치부심 타국 땅을 전전하면서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풍찬노숙을 이어가야 했다.
1860년 밀로쉬는 아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아들 미하일로도 권력 맛을 보게 되지만, 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위원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르비아니즘을 주창한 가라샤닌 정책을 따랐다.
1868년 세르비아니즘 이상을 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하던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가 암살당하자, 그의 사촌인 열네 살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크네즈에 올랐다. 그러나 10년 뒤 어린아이였던 밀란은 의외의 업적을 남긴다.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에 의해 믿었던 러시아가 친 불가리아로 돌아서자 친 오스트리아로 급선회한다. 그해 6월 베를린조약에 의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영향 하에서 온전히 독립국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1878년 6월과 7월에 있었던 베를린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겁박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도이칠란트, 러시아, 터키가 참가한 베를린회의에서 새롭게 맺은 조약이었다. 이때 대슬라브민족 대동단결을 원했던 세르비아인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프로이센과 전투에서 패하고도 헝가리를 병합해 이름도 이상한 이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터키제국 영향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스부르크왕가아래 편입해 버린 후, 1908년이 되면서 완전한 합병에 성공한다.
세르비아 국민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지난날 스테판 듀산에 의해 만들어진 세르비아 영원한 국경선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세르비아는 조국독립의 길목에서 강대국들과 어깨들 당당하게 혹은 대등하게 하리란 대망의 꿈은 한낱 물거품으로 변했다.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항쟁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질 뿐이었다. 오스트리아로선 세르비아니즘이든, 유고슬라비즘이든, 남슬라브 통합이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세르비아 정권을 잡고 있던 밀란은 친오스트리아를 향했고, 경제 역시 오스트리아에 의존했다.
그러던 중 불가이아 국경 브레자보 마을을 놓고 분쟁이 일어났다. 1885년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지원 하에 러시아가 뒷배를 봐주고 있던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와는 다르게 불가리아가 승리를 거두면서 베오그라드까지 위험에 처했다. 오스트리아 중재로 겨우 전쟁을 끝낼 수 있었지만, 이후로 오스트리아 간섭이 노골적으로 변했고, 상처투성이 밀란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밀란을 더 치욕적이게 만드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밀란은 장가를 아주 잘(?)들었다. 사사건건 왕비 나탈리야 간섭은 왕으로 하여금 진저리치게 했음직하다. 그러나 왕비는 기세등등하게 일국의 왕인 남편 알기를 옆집 강아지처럼 취급했다. 급기야 참다못한 왕이 왕비를 나무랐고, 가정폭력이 대판 일어났다. 나탈리야는 동서고금 부부싸움이 대게가 그렇듯, 어린 아들 알렉산드를 데리고 왕궁을 훌쩍 빠져나가 친정으로 가버린다. 일국의 왕이 가정 하나도 건사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는 우리 조선이나 세르비아나 매 한가지였다.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밀란은 그럭저럭 왕좌는 유지했지만,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잖아도 비실대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치만 살피던 그는 아들 에게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 몰라라 뒷방 늙은이로 들어앉는다.
1889년 13세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 나탈리야의 수렴청정도 아닌 대리청정이 이어지자 아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왕위고 뭐고 그따위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마치 고려 7대 왕 목종을 떠올리는 사건이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다가 결국 동성애에 빠져버린, 대장군 강조에 의해 목이 달아난 불우한 왕처럼 말이다.
풍족한 궁궐생활에 시간이 남아돌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스캔들이다. 주색잡기와 주지육림에 빠진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파티에서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연상인 콜걸출신 드라가 마신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자 이제는 드라가 마신 가족들이 왕궁을 드나들며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계속)
왼쪽 드라가 마신과 나탈리야 오브레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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