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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Feb 28. 2024

폭력의 동반자 크로아티아

대크로아티아주의의 발진- 토미슬라브



크로아티아 역사의 시작


10세기 초 남슬라브족 중 발칸반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왕국을 세운 크로아티아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지리적으로 비잔티움제국과 로마교황 사이에 이해가 맞물리는 현장이다. 크로아티아지역 아드리아해 항구도시 역시 비잔티움제국 영향아래에 있었지만, 점차 프랑크왕국 카를대제에 의해 복속되고, 북서부와 남동부로 발칸반도가 나눠지면서 두 제국의 영향에서 까닭 없이 보냈다. 


긴 역사에 있어서 아주 짧은 기간에 독립왕국을 세웠을 뿐 대부분 이민족 영향을 받으며 제국으로부터 피지배민족으로 살거나 자치권을 획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의외의 효과가 나타났다. 현재 중세 유적들이 크로아티아 곳곳에 산재해 관광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자 국민 생활수준 역시 몇 단계 상승한다.      



크로아티아 플리체비체 국립공원




가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는 남슬라브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5~7세기경부터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진출해 정착하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그러나 일부 크로아티아 역사가들은 남슬라브민족과 일단의 선긋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여타 남슬라브민족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운 샤르마냔(Sarmatian)인의 일파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보헤미아지방과 폴란드 남부를 정복했으나, 발칸반도로 이주하면서 남슬라브족과 섞여 자연스럽게 문화가 통합 흡수되고 동화되어갔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하나의 꺼리만 제공할 뿐 아무런 효력도 발생하지 않는 공허한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세르비아 역사가들에게 역공격의 꺼리만 제공하는 수준이랄까? 7세기에 이르러 온전히 발칸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민족은 민족적 기원만 같을 뿐 역사가 전개되면서 단절과 고립, 그에 따른 종교와 경제력 차이, 사회제도, 관습 등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어졌던 탓에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아드리아해 바닷가에 그리스와 일리리아(Illyria)인들(알바니아인 조상격)이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정착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로마를 괴롭힌 전사의 땅이다. 로마제국 우산 아래서 풍부한 물산으로 인해 로마제국 소비재 생산지로서 빠르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해안, 즉 달마티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주로 일리리아인)은 지속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캅카스 아르메니아 선조인 아바르족의 침략과 훈족 역시 꾸준하게 약탈을 이어갔다. 


또한 동‧서 로마로 갈라지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비잔틴제국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정교를 받아들였다. 훈족의 서방침략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낳았고, 크로아티아 땅은 게르만족과 아시아 유목민들 차지였다. 이때 동쪽 캅카스를 무대로 유라시아 유목민 아바르족이 아드리아해 도시들을 약탈하면서 초기 로마교회 건축물 대부분이 파괴를 면치 못했다. 약탈자들이 물러가자 우크라이나를 지나, 헝가리 판노니아평원(부다페스트 지역 대부분)과 도나우강 건너 발칸반도까지 먼 길을 이동해온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하면서 깊숙하게 뿌리내린다. 


6~7세기 즈음 이곳은 비잔티움제국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이들은 농경민족답게 유목민족과는 아주 딴판으로 느리면서도 습관적 이동에 인이 쌓였다. 그러다 기름진 땅을 만나 정주생활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너머의 동경을 품고 아드리아해 북쪽 바닷가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삶을 이어갔다. 로마의 걸출한 왕 유스티니아누스대제 시절에 도나우강 건너 마케도니아에 이르렀고, 그리스 북서부와 지금의 알바니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지방 전체가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했다. 


이들은 때론 훈족과 어깨를 당당하게 하면서, 혹은 아바르족과 손을 잡는 등 비잔티움제국은 물론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와 대결구도에 돌입하기도 한다. 이로써 발칸 내륙과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오롯이 남슬라브민족 차지가 된다. 이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터전을 닦는다. 크로아티아 선조들은 달마티아 해안가와 아드리아해 가운데 있는 코르출라 등 여러 섬에까지 정착하면서 영역을 넓혔다.      


기실 남슬라브민족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발칸반도 연구자 자료에 의하면 비잔티움제국이 아바르인을 물리치기 위해 크로아티아인을 제국의 군대에 편입했다는 기록(헤라클리우스황제/ 재위 610~641년)이 있다고 한다. 아마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때부터 비잔티움제국의 뒷배를 믿고 세르비아인과 충돌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시기적으로 세르비아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같은 지역을 두고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다는 뜻이다. 크로아티아 역사가들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 선조가 내륙으로는 지금의 헝가리 땅이자, 헝가리 선조들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판노니아 평원에서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방을 거쳐 몬테네그로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자리 잡았다고 거품을 문다. 


세르비아 사가들 시각으로선 가당찮은 주장이다. 이들은 비잔티움제국을 근거로 든다. 7세기에는 발칸반도 대부분을 세르비아인들이 차지했으며, 9세기 말에는 달마티아까지 정복했노라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크로아티아 지역 거의 모든 땅을 세르비아인이 정복했다는 말이다.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면,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맞는 주장이다. 


사정이 어찌되었던 현재 이들 땅은 그리스와 로마 비잔티움제국을 거쳐 노르만족 바이킹, 헝가리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오스만터키에 이어, 결국 오스트리아, 독일 등 지속적으로 외부 세력의 영향아래 들었다는 것이 변치 않는 진실이다. 


크로아티아는 다양한 민족의 지배에 들기 시작하면서 한 국가 내에서도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한 내륙과 헝가리와 세르비아 경계인 보이보디나, 그리고 아드리아해의 해안도시 달마티아로 구분되면서 경제는 물론 극명한 문화적 차이를 보였다. 



달마티아 스플리트 항





대크로아티아주의의 원조 토미슬라브


역사를 되돌려 서기 803년 샤를마뉴대제가 위용을 부릴 당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비잔티움제국 정교에서 가톨릭으로 자연스럽게 개종이 이루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제국의 영향 하에 있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정교문화권과는 본격적인 경계선이 형성된다. 그러나 어느 한 시점에 선이 그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10세기 초까지 달마티아 지방은 오랫동안 비잔틴제국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어 가톨릭인 자그레브와 지역적 경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도를 펼쳐놓고 경계 짓는다면 오류란 뜻이다.


로마 가톨릭과 서유럽문명권에 동승한 크로아티아는 9세기~11세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과거에 로마제국 당시 세워졌다가 아바르족에 의해 파괴된 100여 개의 교회를 새롭게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초기의 로마네스크양식 교회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진정 종교의 힘이다.


어쨌거나 비잔티움제국 발아래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만 엿보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불가리아가 비잔티움제국에 반기를 들면서 비잔티움이 눈과 귀가 불가리아로 향했을 때 순식간에 독립을 선언해버린다. 


더구나 지리적 이점과 국제정세 흐름을 타고 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해 귀족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재산을 교회에 환원하면서 권위는 물론 정통성까지 충족하려 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면서 교회에 재산을 헌납하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선물로 승화되고, 크로아티아 군주들은 로마교황으로부터 하느님 은총과 함께 충복으로 인정을 받는 개가를 올린다. 


기실 하층민으로부터 자신들의 권력과 정통성을 부여받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크로아티아인들 삶에 가톨릭이 깊게 파고들면서 아드리아해 족장이던 토미슬라브(재위 925~928)에 의해 독립국가로 우뚝 선다. 비잔티움으로서는 당장 응징을 가하고 싶었지만, 제국도 혼란을 거듭하던 정권 교체기였다. 



토미슬라브 대관식. 오톤 이베코비치 작

  


912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6세가 죽자 그의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 913년 6월 6일에 쓰러져 죽었다. 형수 조에는 후계자인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챙기기 위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이때 섭정대리인 대주교 니콜라오스는 그녀를 외딴 수녀원으로 보내버린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일곱 살 난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번의 쿠데타와 총대주교의 음모에 휘말리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 시메온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로아티아가 이 틈바구니를 이용해 ‘크로아티아공국’이라는 타이틀로 독립왕국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토미슬라브는 세르비아 듀산왕과 마찬가지로 대크로아티아주의 원조로 추앙받게 된다. 



토미슬라브. 세르비아 듀산왕과 마찬가지로 대크로아티아주의 원조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즉 대크로아티아주의 원조다



서쪽 로마 교황 이반 10세로서는 교권의 확장을 반기면서 쌍수를 들어 독립국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비잔티움제국은 불가리아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던 중이라 이렇다 할 여유조차 없었다. 토미슬라브는 로마교황의 태도에 감읍한 나머지 교세확장에 노력을 약속하면서 충성맹세를 한다. 그는 서쪽 로마를 위협하는 헝가리 마자르족의 공격을 일선에서 막아낸 혁혁한 공로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는다. 한발 더 나아가 로마교황 존 10세에게 연합군을 꾸려 제1불가리아제국을 선제공격하자고 나섰다. 시메온이 죽고 없는 제1 불가리아제국과 한판 승부에서 크로아티아가 승리를 거두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은 승승장구한다. 이러한 일련의 의지는 토미슬라브가 죽은 뒤에까지 이어지면서 더욱 탄탄한 가톨릭 국가로 거듭난다. 


935년 크로아티아 왕 크레시미르는 아드리아해 북부 달마티아를 비롯해 해안을 따라 리예카는 물론 남쪽 헤르체고비나(20세기 폭력과 살육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모스타르에 이르는 네레트바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북쪽으로 헝가리와 국경을 당당하게 마주하게 된다. 크레시미르는 로마 교황을 넘어 비잔티움제국 바실 2세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왕으로 공식 인정을 받아 명실공이 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온전히 왕국의 기틀을 세운다.  


네레트바강. 지금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지역이다. 이곳 역시 최근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크로아티아왕국은 11세기 후반 뻬타르 크레시미르 4세를 정점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고, 이때 11세기 소아시아에서 등장한 셀주크투르크의 군사적 압력은 비잔티움제국 세력약화를 부채질 하고 있었다. 이 틈바구니를 역이용했던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와 달마티아 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중세왕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다. 아드리아해 무역권을 장악하자 신흥 귀족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레시미르 4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죽자 복잡한 후계구도가 벌어진다. 여러 도시의 영주 ‘반’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설쳤다. 이때 로마교황 의중을 간파한 슬라보니아(크로아티아 중동부지역의 한 주) 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재위 1075~1089)가 가톨릭교회에 충성과 십자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맹세하면서 로마교황청 후원으로 왕좌에 오른다. (계속)



① 헤라클라우스 황제는 군대와 행정을 과감히 개편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황제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상태였던 비잔티움제국이 군사·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온전히 방어함으로써 이후 80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산드로스 : 성기를 조각해 원형경기장 멧돼지에 붙이는 등, 이교 제사를 지내며 성불구를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다

③ 시메온의 비잔티움 공략 : 불가르 시메온이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기세 좋게 콘스탄티노플 코밑에 포진했다. 시메온은 비잔티움 성벽을 따라 6km에 이르는 군대를 포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신 주변의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압박했다. 비잔티움은 제국의 후계자인 포르필로게네투스(훗날 콘스탄틴 7세)와 시메온의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에 시메온은 군사를 돌렸다. 하지만 비잔티움 여론은 불가리아와 굴욕적인 협상을 맺은 총대주교에게 불만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의 힘으로 황제 어머니 조에가 황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조에는 “어찌 제국의 황제가 야만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냐”며 반발했다. 이를 안 시메온은 재차 군사를 일으켜 아드리오폴을 공략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에는 아르메니아출신 명장 로마누스 레카페누스 장군에게 시메온을 상대하게 했다. 양 군대는 밀고 밀리는 접전을 이어갔다. 그러다 927년 시메온이 죽자 지도자를 잃은 불가리아는 크로아티아 토미슬라브 공격을 받는 등 시름시름 앓다가 1018년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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