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탈 당함과 동시에 크로아티아 서유럽 문화권으로 흡수
11세기 말이 되자 비잔티움제국은 국제적으로 나약한 존재로 낙인이 찍힌 상태. 소아시아 셀주크투르크가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천 년 제국은 쉬이 망하지 않는 법, 비잔티움제국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기독교권 방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 원정을 추진했다.
1095년 교황은 예루살렘으로 출병하기 위한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을 꾸리기 위해 크로아티아에 약속대로 참전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1098년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나 이를 추진하려 했던 반(왕) 즈보니미르를 암살해버린다. 경제적 이득과는 하등에 상관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할 영주들이 아니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함께 재정파탄을 우려했다.
이후 국왕의 빈자리는 무주공산처럼 보였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하는 법, 왕위 계승문제로 바람 잘날 없던 크로아티아는 귀족들 간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손도 대지 않고 크로아티아를 합병(?)해버린다. 한동안 불가리아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면서 비잔틴제국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이어가던 크로아티아왕국은 종말(?)을 맞아야 했다.
그 까닭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헝가리 출신 왕비가 결정적이었다. 암살당한 즈보니미르의 왕비 엘레나 리예파는 자신의 지위가 위험에 처하자 해결책을 내놓았다. 자신의 오빠 라디슬라브를 크로아티아 왕으로 추대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헝가리로 편입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에게는 불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될 때까지 제국 치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자신의 영토와 자치권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경우다. 헝가리 왕과 크로아티아 왕을 겸업하던 라디슬라브가 죽자 1102년 그의 동생인 칼만이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부터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는 온전하게 크로아티아 왕권을 손아귀에 거머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복속된 사건은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비난만 할 일이 아니다. 크로아티아가 이때부터 온전히 동유럽의 문명권에서 서유럽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만트루크제국 아래 놓여 세르비아정교만 고집한 채 어둠에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세르비아와는 딴판으로 전개가 된 셈이다.
지금까지는 세르비아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가던 크로아티아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이질감이 형성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족성과 가치관의 차이로 변화된다. 이는 서유럽 전통이 쌓여가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마찰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탐욕은 탐욕을 부르고, 부는 더 많은 부를 갈구한다. 종교를 빙자한 교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힘을 축적한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경제력을 이용해 땅을 사들이며 경쟁적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침략이라는 혼란한 틈을 타 재산을 끌어 모으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무주공산에 깃발 꽂기, 위기의 땅주인을 겁박해 헐값에 사들이기,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토지세로 강제로 거둬들이기 등 약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힘을 축적했다. 심지어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가격경쟁과 풍부한 물량으로 골목상권까지 노리는 상황도 연출되었다.①
이들의 롤 모델은 자치독립국이면서도 합스부르크제국의 우산 아래서 살아가는 헝가리를 본받고 싶어 했다. 한편 번영의 기세에 동승한 수도사들에 의해 라틴어로 된 성경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책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엄격하게 이때부터 세르비아와 명확한 문화적 경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세기 중반이 되면서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에 노출되면서 기세가 꺾였다. 더구나 헝가리 대 보헤미아 공략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헝가리 땅은 초라하게 줄어들었고, 반대로 보헤미는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돌프에 의해 크로아티아와 체코, 슬로바키아는 물론 헝가리 땅 일부까지 그들의 발아래 들게 된다.
이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합스부르크를 지원하면서 최초로 제국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는다. 이 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의 인연은 무려 19세기 중반까지 싫던 좋던 줄기차게 이어지게 된다.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기세를 몰아 초라해진 헝가리 왕 찰스 1세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경제적 독립과 함께 사법권에 이어 독자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역시 이때를 기회로 주요 무역도시로 거듭났다. 아드리아해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공국 역시 경제는 물론 문화적 발전에 전성기를 구가한다.
반대 계층도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봉건왕조 압제가 농민들을 괴롭혔고,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면서 농민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자 농민항쟁을 불러왔다. 더구나 믿었던 교회마저 권력의 단맛에 길들어지면서 영주들 편에 서자 농민들은 가톨릭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다.
교회의 개혁을 약속했던 프라하 카를대학 학장 얀 후스가 오히려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하고 만다. 영원한 권력의 중심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으려는 봉건영주 반들의 승리였다.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희망을 안겨주던 교회가 부패하면서 수도원은 물론 수사들까지 탐욕에 물들자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보고밀교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설상가상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에서 승리한 오스만트루크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을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서진을 이어갔다. 1463년 보스니아 점령에 이어 세르비아의 마지막 수도 스메데레보를 차지하고 크로아티아를 넘보고 있었다. 헝가리와 함께 힘을 합친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은 요새를 만들어 최후의 방어막을 치면서 버티기에 들어갔으나, 오스만제국은 마을을 약탈하는 등 주변을 공격하면서 이들의 힘을 소진시켰다.
1493년부터 대치상태로 수십 년,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그야말로 황폐해져갔다. 주민이 떠난 자리엔 잡풀만 무성하게 자랐고, 일부 수비병력 역시 의욕을 상실했다.
결국 미르코 데렌친을 중심으로 한 크로아티아방위군은 ‘피의 평원’, 즉 크르바브스코평원(지금의 우드비나Udbina) 마지막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8천 여 오스만제국의 기병들에 의해 도륙 당한다.
훗날 세르비아에 코소보의 ‘검은 새의 들녘’이 있다면, 크로아티아 사람들 가슴에 ‘피의 평원’이 대크로아티아민족주의로 살아나 가슴을 쿵쿵 두드리게 된 것이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달마티아를 비롯한 아드리아해의 도시들을 베네치아에 할당해야 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런데 1526년 8월 29일 헝가리 러요시 2세가 오스만제국 쉴레이만 대제와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러요시마저 목숨을 잃었다.
헝가리 왕조가 대가 끊어지자 러요시 2세의 여동생(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을 빌미로 신성로마제국황제이자 합스부르크왕가 카를 5세에게 흡수된다. 이는 헝가리로서는 바라던 바였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위협을 합스부르크왕가 우산 속에 몸을 숨기며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크로아티아 내륙 역시 합스부르크왕가에 편입되면서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훗날 합스부르크제국의 황제로 등극)는 헝가리 왕과 크로아티아 왕으로 추대된다.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제국에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는 곁다리로 따라들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처럼 오스만트루크제국 하에서 암울한 세기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크로아티아 인들에게는 행운이다. 비록 베네치아의 간섭과 압제는 피할 수 없었으나, 문화와 무역의 통로역할은 충실히 이어갈 수 있었다. 이로써 경제적 부의 축적과 문화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면 정말 이만한 다행이 또 있을까. 유럽의 르네상스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보헤미아, 북이탈리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내륙까지 지배하면서 거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서방정벌을 이어가던 오스만트루크제국과 본격적인 양대 산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발칸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대각선 위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의 영역, 아래에는 오스만트루크제국에 편입이 되면서 앞서 거듭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폭력의 경계가 그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크로아티아는 점차 합스부르크왕가 아래에 놓이게 되고, 슬로베니아와 함께 서유럽과 가톨릭문화권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이 역사적 과정을 두고 크로아티아 역사가들은 심기가 불편하다. 헝가리에 복속이 아니라 정치적 연합이라는 말이다. 헝가리 역사가들은 당연하게 병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속이나, 합병이나, 연합이나 군사지휘권과 백성의 주권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인 것을….
그리고 이를 넘어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에 들어간 후에도 자치권을 확보하고 있었다며 크로아티아 정통성을 이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국인을 왕으로 모신 영주들의 자치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눈물겨운 역사적 논쟁이다.
크로아티아 땅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만트루크제국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최전방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이슬람제국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한 세르비아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남슬라브민족정착촌'을 형성하면서 이들 세르비아인을 국경 수비대를 만들어 실전에 배치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중이라 적은 돈을 받더라도 몸 바쳐 충성을 다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만트루크와의 잦은 충돌 속에 세르비아인은 최전선에서 인간방어벽이 되어주었다.
또한 헝가리 봉건 영주 등 제국에 반기를 드는 토착세력들을 합스부르크왕가의 명을 받은 용병들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을 ‘하이두끄(Hajduk)’②라고 불렀는데 이를 직역하면 ‘산적’, 좋은 말로는 ‘의적’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세르비아 용병들이 승리를 거두면 토지로 보상해 주었다. 슬픈 현실은 이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영주 반들이 토지를 빼앗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전력을 다해 오스트리아에 충성해야 했다.
국경 수비대 진지를 만들 때도 세르비아인들의 노동력이 이용되었다. 이 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국경에 몰려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인구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보스니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지역에 거주하게 되면서 현대에 들어와서 분쟁의 전사이자 핵으로 작용한다. 중간 방어선은 18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대략 10만 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국내 정세가 급변했다. 가톨릭 열기가 급격히 퍼지면서 정교회 세르비아인에 대해 반감이 고조됐다. 그 와중에 러시아 측에 경계심이 증폭되면서 세르비아인 정교를 개종키 위해 정책을 폈다. 따라서 세르비아 용병들 지위가 하락하고,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도 세르비아 인은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제2의 고향이 된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것이다.(훗날 이들의 후손들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크로아티아 괴뢰정부 우스타샤에게 학살을 당한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합스부르크제국의 최전선이 크로아티아라면,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최전선이 세르비아가 된다. 가공할 폭력의 역사적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①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자치권을 넘어 왕권을 넘보았으나, 오스만제국의 두 차례 빈 공격의 실패 후 오스트리아제국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꿈으로 끝났다.
② 아드리아해의 도시 스플리트를 연고지로 하는 크로아티아 프로축구팀 이름이 ‘하이두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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