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폭력의 싹이 자라다
하층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친 헝가리 인사들에 의해 선진문물 헝가리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자칭 정치 지식인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련한 짝사랑은 차별을 가져왔다. 헝가리인은 크로아티아인을 미개인 취급을 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크로아티아는 민족영웅 토미슬라브는 물론 민족의 기원을 찾아내 역사를 기록했고, 중세 왕국 발전과정과 찬란한 문화의 향기를 덧입혀 자존감까지 충족했다.
오스만과 마지막 전투 ‘피의 평원’도 새롭게 조명했다. 그들만의 성경이 발간되는가 하면, 크로아티아 전설이나 설화 등 사연을 들춰내 아픔을 노래하면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고고학적, 인류사 연구가 이루어지며 그 뿌리를 더 깊숙하게 박아 놓았다. 종교의 정통성과 민족성을 결부해 하느님으로부터 일방적 동의를 얻는다.
유럽에 불어 닥친 르네상스를 경험한 해외파들이 조국 크로아티아를 찾으면서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민족 자주성과 민족성에 대한 의식, 즉 ‘우리(We)’와 ‘그들(They)’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크로아티아 민족 정체성 형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과 문화와 문학과 언어로 찬란한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민족이동부터 발칸정착, 주위세력들로부터 침략 받으면서 나름의 문화로 승화시킨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적 자존, 그리고 민족 정체성에 완성을 이루어 내고야 만다.
민족 정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은 토착세력 민족문화 토대 위에 비잔티움제국 문화를 흡수했으며, 이어서 프랑크와 로마교회, 합스부르크제국, 게르만 문화뿐만이 아니라 헝가리 전통적인 문화까지 다양한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접목됐다.
그런데도 고유한 문화와 동일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들만의 고유한 언어의 통일과 주변국들 견제를 위해 만들어낸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니까.
크로아티아 토미슬라브가 세운 최초의 중세왕국은 엄격히 말하면 후손들이 헝가리에 복속되면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면 화를 낼까? 이들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대별, 지역별로 각기 다른 대국의 그늘에서 숨 쉬며 살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베네치아 영향아래,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은 헝가리 지배하에, 크로아티아 서쪽 아드리아해로 불쑥 튀어나간 이스트라반도는 오스트리아 영향아래,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는 중세 해양국가 라구사공국으로 진화(?) 되면서 19세기를 맞는다. 주위로부터 억압 받으면서 성장했고, 그 영향으로 가톨릭국가가 생겨났다.
19세기 초 프랑스 나폴레옹 군은 1804년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을 꺾으며 기세를 이어갔다. 비록 해군이 넬슨제독에게 패해 영국입성에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에 악명을 떨쳤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05년 아드리아해의 북쪽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이스트라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접수해버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사바강 남쪽지역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까지 접수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통째로 묶어 ‘일리리아’라며 식민지배의 속주라고 분명히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러한 역사적 무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바람을 탔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슬라브민족 그들의 선인이 일리리아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폴레옹이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제국 당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던 고대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도매금으로 몰아서 붙여버린 것이다. 자칫 불가리아를 비롯해 남슬라브민족이 일리리아민족에서 파생된 것처럼 되어버렸다.
나폴레옹 몰락이후 이곳을 점령한 합스부르크제국마저도 이곳에 괴뢰정권을 만들어 왕국 이름을 일리리언왕국이라며 역사를 우습게 만들고 말았다. 뒤이어 크로아티아 언론이 한발 더 나아가 ‘일리리어니즘’을 핵심 주제로 각 지역의 지식인들의 주장을 시리즈로 싣는다. 모든 슬라브인이 살아가는 땅은 일리리아인 혹은 크로아티아인 영토라는 주장까지 대두된다. 결국 이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와 대세르비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를 계기로 스스로 발칸반도 선주민을 받아들이면서 원 뿌리를 더 먼 과거까지 박아버린 셈이다.
역사의 왜곡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단숨에 증명해냈다. 그들로서는 나폴레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법하다.
이에 용기백배한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힘을 모은다. 도서관을 개관하면서 문예부흥에 기치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동원해 일리리아 음악과 전설과 설화까지 샅샅이 뒤져 살려냈다. 일리리아인의 전설을 동원해 흙으로 돌아간 지 수천 년이 지난 전사를 일으켜 세워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마치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에 의해 되살아나고, 코소보인에 의해 세르비아인의 민족성지 ‘검은 새의 들녘’이 찬양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지금의 마케도니아공화국 민족영웅으로 되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과 세르비아인, 그리스인들 복장 터지는 일일 게다.①
크로아티아 귀족은 물론 중산층까지 지지에 나서며 크로아티아 전역은 물론 슬로베니아와 가만히 있는 보스니아까지 합쳐 일리리아 남슬라브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간의 사연은 각설하고, 1848년 2월 파리혁명과 독일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지켜본 크로아티아인은 본격적으로 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남슬라브족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슬로베니아는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스스로가 주역이 되어야 한다며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지만 말이다.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합스부르크왕가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멀리 떨어진 크로아티아보다 당장 헝가리 땅이 급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1848년 3월 크로아티아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의 왕격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옐라취치의 행동은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게 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해 7월과 8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러시아마저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사연인 즉 러시아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 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정말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헝가리의 지배에 들어간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② 우두머리 안테 파벨리치가 극우당을 계승하면서 훗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나치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자국 내 살아가던 세르비아인 정교를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목을 내세워 35만 명(부상자 포함 70만 명)을 학살했다.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말도 안 되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무서운 민족주의가 아무렇지 않게 화려하게 포장되는 순간이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만큼은 탄력을 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오스만터키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훗날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20세기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①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2,370여년이 지난 20세기에 문제가 생겼다. 유고연방을 이끌던 티토 사후, 1992년 마케도니아는 유고 연방에서 떨어져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그리스와 전쟁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문제의 발단은 국가의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마케도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옛날 그리스 테살로니키 태생의 알렉산드로스가 지배했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는 다르다. 오랜 세월 북방에서 이주해 자리 잡은 이주민과 그리스인 혼혈이다. 그런데도 그리스 지방명인 마케도니아를 나라 이름으로 명명하고, 국기에 알렉산드로스 문장을 넣는가 하면, 국제공항 이름을 ‘알렉산드로스대왕국제공항’이라 붙였다. 이를테면 알렉산더가 자신들의 조상이란 뜻이다. 그리스는 광분했다.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미국과 유럽이 중재에 나섰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그리스의 역사적 당위성과 정통성을 훼손함으로 국가 명을 ‘구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공화국’으로 한다.” 유엔에 등록된 국가명이다. 2018년 6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북마케도니아 공화국(Republic of North Macedonia)’으로 국명을 정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함으로써 일단락됐다.
② 앞으로 폭력에 대해 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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