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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r 19. 2024

2차 세계대전과 발칸반도

폭력의 서막이 열리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모스타로로 향하다 중간쯤에 볼 수 있는 야블라니치 브릿지이곳은 2차 대전 중 독일군과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 세력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부서진 철교와 멈춰선 기차가 당시를 설명해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승전국임에도 밥그릇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이탈리아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로 재무장을 하면서 독일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 기세를 올린 독일은 순식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에 이른다. 사실 1차 세계대전 전쟁 패전국으로서의 독일의 어마무시한 전쟁배상금은 자연스레 독일국민을 나치의 깃발아래 모여들게 만들었다. 일자리는 줄어들었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연합국 중 가장 강하게 목소리를 쳐대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나라라며 날을 세웠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이미 예견했다는 듯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연합군을 이룬다. 하지만 독일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1940년 6월에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뒤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 프랑스까지 함락시켜버렸다. 독일은 이탈리아는 물론 군국주의 망령이 든 일본과도 동맹을 맺으며 소련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일시에 깨트리며 소련을 침공했다. 전쟁에 가장 필요한 군량미와 전투기, 탱크 등 기름확보를 위해서라면 그따위 종잇장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역사를 간과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다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기억했어야 했다. 비록 무혈입성 했으나 항복하는 군사 한 명이 없었고, 식량은커녕 추위에 땔감마저 부족해지면서 프랑스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던 사실을 상기했어야 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처까지 도달했으나 소련의 반격과 추위, 굶주림에 독일병사들이 지쳐갔다. 결국 꽁꽁 언 탱크가 멈춰 섰고, 나치는 수백만 명의 병사만 희생한 채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발칸반도 대부분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압제에 들었다. 국제사회 중심축이라며 주축국으로 불렀지만, 이때 방관하던 미국을 상대로 일본의 야심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진주만 맹폭으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태평양에서 일본함대를 침몰시켰고, 일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 두 개의 맛을 본 후에야 전쟁피해자 코스프레 호들갑을 떨며 손을 들었다.      


한반도의 분단도 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따라 폭력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5년 뒤, 3년간의 길고 긴 살육전인 한국전쟁을 낳았다.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독일을 상대로 승리했으며, 아이젠하워 장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으로 독일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다. 결국 히틀러는 권총 자살하면서 엄청남 피해를 남긴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연합국이 아무런 조건 없이, 단서하나 달지도 않은 채 항복을 받아들인 까닭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엄청난 전쟁배상금에 대한 반등을 이번 전쟁으로 인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규모와 민간인과 군인 등 사상자 약 7,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한편으로 이 전쟁으로 인해 대영제국의 몰락과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세워지게 된다. 더구나 세계 패권의 중심이 서유럽에서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권력이 이동한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장개석의 타이완이라는 초라하게 찌그러진 모습, 마오쩌뚱 중국장악에 이어, 한반도 분단도 2차 세계대전 결과에 따른 폭력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5년 뒤, 3년간의 길고 긴 살육전인 한국전쟁을 낳았다.           




2차 세계대전과 발칸     


다시 발칸반도로 되돌아가자.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칸반도 조각보의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이 각 민족의 감정을 이용해 갈등조장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던 크로아티아 파벨리치가 ‘우스타샤’를 앞세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이들은 지금껏 참아왔던 세르비아 알렉산다르의 강력한 중앙집권에 당했던 피해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다. 자연적으로 지방분권형 국가 연방제를 요구했다. 지난 날 어이없게 나라를 통째로 알렉산다르에게 가져다 바쳤던 순진한 경험을 잊지 않았다.      


이 기세를 선거에까지 몰아갔다. 1938년 12월 경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상태에서 실시된 선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불공정 선거가 판을 치면서 마치 세르비아 측의 일방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투표함 상자를 열자 상황은 크로아티아를 흥분시켰다. 마체크가 악전고투하며 이끌어가던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54%를 얻은 정부여당과 근소한 차이인 45%를 얻는 기염을 토했다. 이 충격으로 총리 스토야디노비치가 사임했고, 베오그라드는 드라기샤 체트코비치를 새로운 총리에 앉혔다.    

  

2차 세계대전이 점차 가까워오고 있었다. 유고 집권세력은 크로아티아와의 협상 테이블에 끌려 나가야 했다. 안정을 구가해도 부족할 판국인 터라 일단은 급하게 협상은 타결된다. 주 내용은 크로아티아가 자치국의 위치를 확보했고, 더불어 슬라보니와 달마티아는 물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일부 지역까지 합병해서 수중에 넣어버렸다. 그 외에 외교와 국방만 의존하곤 대부분 자치권이 주어졌다. 더구나 노동당 당수 마체크가 왕국의 부총리로 취임하면서 세르비아인을 아연 긴장시켰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2차 세계대전 서막이 열렸다.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유고왕국은 각국의 처절한 민족주의자 간 난투극이 벌어진다.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발칸반도를 향하고 있음에도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하루해가 뜨고 졌다.      


1941년 2월 그리스에 영국군이 주둔하자, 긴장한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섭정 파블레 왕자를 앞에 앉혀놓고 입심을 발휘하며 다섯 시간을 혼자 떠들었다. 중립을 풀고 3국동맹에 가입하라고 뜻이었다. 히틀러는 후방을 정리한 후 소련으로 진격할 복안이었다. 섭정 파블레 왕자에게 주축국에 합류하면 그 뒤를 감당해 줄 것이라며 슬그머니 옆구리에 찬 장전된 권총을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당근도 들이밀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고향 테살로니키 땅을 주겠다며 꼬드겼다.      


유고왕국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구식 무기가 대부분 독일제였다. 막상 전쟁을 치르자면 무기는 물론 폭약과 부품 등 공급에 차질이 빤하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국이 독일에게 공격당했을 때 자신들을 도와줄 아군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독일-유고왕국 간의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역으로 제의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면서 뜻을 모으기 위해 내각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뻔했다. 16대 3으로 독일팀 승리였다.      


세계 최강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1941년 3월 협정 조인식이 있었다. 히틀러는 유고 대표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놈들, 장례식에 온 꼴이네!”


히틀러와 무솔리니(위키백과)




전통적으로 독일에 반감이 컸던 세르비아인은 좋아할 리가 없었다. 히틀러로 받은 것은 테살로니키를 유고왕국에 양도한다는 공수표뿐이었다. 그러자 독일의 유고침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총리가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흥분했다. 이때 또다시 군부가 나섰다. 전쟁의 긴박함 속에 쿠데타라니? 툭 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바리들이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쿠데타 주역들에게 대의명분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레야 볼 수 없었다. 그 중심에는 똥별 두산 시모비치 장군이 있었다. 그는 막상 판을 뒤집어엎었으나, 적절한 대안이 없었다. 대안의 부재는 결국 대부분의 정치 각료들을 그 자리에 앉혀놓았다. 다만 섭정 왕자 파블레에서 어린 왕 페타르세 2에게 이양된 것뿐이었다. 이때 군부 쿠데타와 하등에 상관이 없다는 듯 베오그라드 시민은 연일 독일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이를 잘 간파하고 있었던 베를린에서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유고왕국을 갈가리 찢어놓아야 각개전투로 격파하기 좋았다. 일단 크로아티아에 마수를 뻗쳐 자그레브에는 포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슬로베니아를 다독여 베오그라드에 협조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약을 발랐다.    



▲  세르비아 똥별 두산 시모비치 장군



그러나 미련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민족을 위한 행동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941년 4월 초, 밀실에서 독일 밀명과 만난 크로아티아 농민당 대표 마체크가 크로아티아를 독립국가로 만들어 준다는 약속에도 돌부처처럼 끄덕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던지, 아니면 침략자의 괴뢰정부 수반에 오를 수 없다는 정치적 철학인지는 끝끝내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엄청났다. 그렇다면 독일로서 답은 하나였다. 무솔리니가 자금을 대고 오랫동안 키워온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폭력의 선봉이자 망명조직인 ‘우스타샤’를 전진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세르비아를 무력으로 장악한 시모비치 장군은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전략을 기가 막히게 짰다. 우리나라에도 일명 똥별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권위만 있고, 책임은 없는, 품위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반짝여서 일명 똥별이라고 부른다. 세르비아 역성혁명 군인들 역시 똥별이었다. 온통 국경 주위에 친 나치국 뿐이건만 북부 크로아티아지방으로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 판단하고 병력은 그곳으로만 집중 배치했다. 그러나 웬걸? 헝가리군이 보이보디나로, 불가리아군이 마케도니아로,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를 점령한 후 남쪽에서 물밀 듯 밀려오자 총 한 번 쏘아보지 못한 채 베오그라드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1941년 4월 6일 이후 유고왕국 침략 4일 만인 4월 10일에 크로아티아에 무솔리니가 점령하면서 우스탸사 괴뢰정권이 ‘크로아티아자치국’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우스타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르세이유에서 살해당한 세르비아의 왕 알렉산다르의 악정을 피해 이탈리아로 망명한 크로아티아 극우보수정당 파벨리치가 이탈리아의 협조를 얻어 조직한 폭력단체라고 밝힌 바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무솔리니가 12년 간 돈과 정성을 들여 크로아티아 민권당의 당수 출신 파벨리치를 중심으로 가꾸어온 지하폭력조직이었다.      


유고왕국이 주축국으로부터 침략당한지 일주일, 유고 왕과 정부는 고국을 떠나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인근 그리스로 달아났다. 베오그라드에 무혈입성한 주축국의 일방적인 평화협정으로 일단락을 맺는다. 전쟁 시작과 함께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 지배에 쏙 들어가 버렸고, 보이보디나는 1919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겹도록 헝가리의 지배를 또 받아야 했다. 어쩌면 헝가리 지배의 운명을 타고 난 땅이었다.    

  

슬로베니아는 이리저리 발자국 찍는 놈이 주인이었으니, 독일군이나 이탈리아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발칸반도는 오롯이 주축국의 군화에 눌려 앞으로의 상활을 어떤 식으로든 예측이 불가능 했다. 더구나 무솔리니는 러시아가 부동항의 확보가 염원이듯 아드리아해 달마티아와 스플리트를 지배하자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리고 세르비아는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각각 지역에 괴뢰정권과 파시스트군대를 조직했다.      


크로아티아 자치국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협의한대로 우스타샤가 중심이 되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아드리아해는 이탈리아에 양보 했어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손에 넣은 것에 대만족한 크로아티아 자치국은 당연하게도 전 크로아티아 민권당의 당수 파벨리치가 수장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아이모네 왕자를 데려와 토미슬라브 2세라 칭하며 왕으로 등극시켜버린다.      



토미슬라브는 세르비아의 듀산과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민족주의의 원조로 추앙받는(서기 925년 아드리아해의 족장이던 토미슬라브가 크로아티아 사상 첫 왕국을 세움) 인물이 1000년을 훌쩍 뛰어넘어 걸출한(?) 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토미슬라브 국왕의 대관식. 이베코비치(Oton Iveković) 작(위키백과)



그리고 민족주의를 추기며 크로아티아 국민 호응을 받는다. 크로아티아인으로서는 때마침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수중에 떨어졌으니 이래저래 좋았다. 불쌍한 것은 보스니아에 살아가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이었다. 결국 우스타샤 핵심 멤버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전 농민당 당수 마체크와 가톨릭 종교지도자인 대주교 스테피나츠를 구금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유고왕국 세르비아 페타르 2세를 비롯해 똥별 등 망명한 정객들이야 목숨을 건지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고진감래苦盡甘來, 아니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몸을 편하게 할 수 있었으나,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에 버려진 세르비아 출신들은 죽음의 칼춤에 목을 내 놓아야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크로아티아 내 인구분포를 알아보자. 참고자료에 의하면 당시 6천5백만 인구 중 크로아티아인 3천5백만 명, 세르비아인 1천8백만 명, 이슬람교도 70만 명, 독일인 15만 명, 유대인 1만8천 명, 그리고 일부 이탈리아인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봉합할 능력도, 행정경험도, 군대 지휘경력도 없는 단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라는 의기만 출중한 인간들뿐이었다.      


피를 부르는 폭력의 서막이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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