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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r 20. 2024

욕망이 낳은 폭력의 연속성

우스타샤(Ustaša)와 체크니크(Cetnik)

▲ 독일 바르샤바 침공(독일 연방 기록 보관소)




크로아티아 폭력조직 우스타샤     


무지한 인간이 신념으로 무장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선봉 우스타샤 주요 목표는 자국 내 세르비아인 학살이었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에 의해 일어난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 학대에 대한 피의보복, 무차별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슬람인도 학살에 당당하게 동참해 지난 일에 대한 화풀이를 시원하게 피로 쏟아냈다. 적국인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이 아니라 크로아티아인에 의해 학살당하는 세르비아인 비극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말이 크로아티아 내전이지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죄 없는 여자와 아이들 포함해 35만 명(부상자 포함 7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음)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며 세르비아정교회 교인들을 협박해 많게는 30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인이 개종을 단행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정작 더 놀란 건 독일군이었다. 살육에 이골이 났다곤 하지만, 국제적 여론의 눈매가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근까지 이어지면서 힘없는 하층민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갔다. 세르비아인 학살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독일은 가택연금 상태였던 농민당 당수 마체크를 또다시 찾아가 크로아티아 정부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마체크는 지난 날 그랬던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뢰정부에 협조할 수 없다는 변이겠지만, 도무지 진정한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협박도 통하지 않자, 독일 정치장교는 소리를 높였다.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군인들이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 정교도인들을 학살하고 있다(위키백과)



“세르비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은 당신에게도 있다”


마체크는 집에 들어앉아 폭력을 중단하라고 목소릴 냈지만,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함몰된 젊은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전쟁 막바지로 이르면서 우스타샤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죽어 지옥의 불길에 던져지더라도 크로아티아를 위해 그 불길을 받아들이겠다”


젊은 우스타샤 행동대 말이다. 당시 민족주의가 얼마나 기승을 부렸던 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했다. 그들이 자랑하던 아드리아해 항모까지 연합국에게 저당 잡히자 졸지에 만신창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타샤는 건재했다. 이탈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아드리아해 달마티아와 스플리트 지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 손에 들린 망나니 칼자루가 이빨이 빠지고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현실을 깨닫자 더욱 광란으로 치달으면서 죽음의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독일마저 발칸반도에서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기댈 언덕이 사라지게 된다. 현실을 실감하면서 잔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스스로 저질렀던 행동에 책임을 저야 했지만, 타인의 목숨은 초개처럼 여겼으면서도 자신들의 목숨은 보배처럼 아까웠다. 발칸반도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당시로서는 영국군이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에 투항했다. 영국군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정해진 규정대로 전쟁 포로로 대우했다. 그리고 주축국 독일과 피흘려가며 투쟁을 벌였던 티토의 파르티잔(빨치산)에게 몽땅 인계해버렸다.


그 인원이 가족까지 포함해 무려 10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몇 주 뒤 그들을 보았거나 어디로 간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도 남아 있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살육전에 이어 잔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블랙핸드 부활 체크니크(Cetnik)     


다시 유고 망명정부를 돌아보자. 전쟁이 길어지면서 영국 런던으로 옮긴 유고 망명정부는 그 꼴을 하고서도 여전히 대세르비아주의 망령에 취해있었다. 17세 왕 페타르는 일단 군사 쿠데타의 주역 시모비치 장군을 수상으로 앉혀 군부로부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크로아티아인에 의한 세르비아인 학살사건을 전해 듣는다. 말이 전이되면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페타르 2세. 11살에 유고슬라비아 국왕에 오른 그는 섭정에 밀린 후, 17세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 구테타에 성공하면서 연합군 편으로 돌아선다.(위키백과)

광분한 페타르 2세는 전쟁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대세르비아주의 성공을 위해 자가발전하면서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의 무능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는 세르비아민족주의 의기는 카라조르지예(블랙조지) 왕가의 지속적인 권력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그러자 페타르에게는 두 가지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급부상하는 공산주의 저지가 그 하나요, 유고 내 병사들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여 자신의 체면 세워주는 것이 두 번째였다.


무능한 제왕아래 뛰어난 재상이라도 있어야 했지만, 시모비치장군은 한계가 분명했다. 독일과 전력투구해도 모자랄 판에 공산주의 파르티잔과의 승부라니? 페타르는 일단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나름대로 땀흘려가며 독일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드라지 미하일로비치 대령을 망명정부 전쟁장관으로 임명하는 기염(?)을 토한다. 망명정부라도 연합군에 발이라도 담그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그래도 1941년 임명장이 전장에 도착하면서 대세르비아주의로 철저하게 무장된 미하일로비치는 페타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미하일로비치는 전쟁 와중에서도 먼 훗날을 바라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일선 지휘관 회의에서 그는 크로아티아가 적임을 분명히 했고, 독일군과 크로아티아 중 후자를 먼저 죽일 것이라고 다짐하며 분노했다. 



훗날 대세르비아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독일군과 크로아티아군, 그리고 공산주의자 파르티잔도 죽여야 할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렇게 보면 주위 모두가 적인 셈이다.


그리고 가급적 전면전을 피하고 무기와 체력을 비축해두라고 지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군사령부 소속의 전투대원들 스스로를 ‘체크니크(Cetnik)’라고 불렀다. 즉 세르비아 최초 군부 쿠데타의 주역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 조직했던 대세르비아주의 망령인 ‘블랙핸드’ 사생아가 탄생했다. 반공산주의와 반크로아티아 공식적인 단체가 이렇게 생기면서 각 지부 지도자 권한이 막강해졌다. 먼저 벌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가 이들에게도 공식적으로 통했다.


이들이 세르비아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인구 20%을 잃은 경험과 2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을 등에 업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에 경악했다. 더구나 세르비아 성지 코소보에서조차 이탈리아를 등에 업은 알바니아인의 세르비아인 학대는 분노를 넘어 절규에 가까웠다.


체크니크 첫 번째 목표는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위대한(?) 목표이자 명제였다. 그러나 웃기게도 이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선 세르비아 괴뢰정부 네디치 정권과도 손을 잡았다. 전투요원이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릴라전은 아예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무장한 채 어깨에 힘을 주고 대형만 유지한 형상이었다. 더 웃기게도 힘없이 비실대는 죄 없는 사람 잡아다 파르티잔 밀명이라고 죽여 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하여튼 전투참여는 어느 쪽에도 들지 않는 이상한 부대였다.


반면 반파시스트 투쟁에 가장 용감하게 맞서는 이들은 요시프 티토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파르티잔이었다. 이들 지상과제는 파시스트를 몰아내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을 아우르는 유고슬라비즘의 완성에 있었다.     


(다음 편에는 티토의 나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풀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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