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티토의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다. ‘티토’란 이름은 그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몸담으면서 사용했던 가명이다. 크로아티아어로 “너(Ti)가 이것(To)을 하라”, 즉 “네가 해라”라는 농담에서 따온 말이 이름으로 변했다.
티토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공으로 발칸 반도를 떠돌며 살았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오스트리아 육군에 강제 징집되어 전장에 투입되다가 러시아군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것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계급사회가 사라진 공산주의라는 것에 빠져들었다.
티토는 유고에 돌아와 사회당에 몸을 담고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이때 그가 별명인 ‘티토’를 호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장파업에도 앞장서면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유럽의 서쪽 끝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까지 참전하면서까지 공산세력에 열정을 바쳤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서구 유럽을 배회하다 유고로 돌아온 그는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그동안 전쟁경험을 이용해 선두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주축국을 상대로 선전을 펼쳤다.
▲ 유고 파르티잔(위키백과)
티토를 비롯한 파르티잔 세력들이 전쟁 기간 내내 험준한 산악지형인 발칸반도 곳곳에서 나치를 괴롭혔다.독일이 점령지라고 생각했던 유고에 무려 3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배치해 이들과 전투를 치러야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때 주축국 중 독일을 제외한 나라들은 자신들 국경에만 치중했던 터라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며 전쟁을 치러야 했던 독일로서는 30만 명이라는 대군을 유고에 박아둠으로써 결정적으로 패전을 면치 못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까닭이다.
나치를 괴롭히는 파르티잔 세력 중 그 선봉에 티토가 있었다. 독일군이 공산 파르티잔 연합체인 아브노이 본거지, 즉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국경 인근 험준한 산악지형인 드르바르에 엄청난 공습을 퍼부었을 때도 티토 한 명을 잡기위한 작전이었다.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려 반드시 티토만은 죽여야 한다며 눈을 뒤집으며 광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공습이 끝나고 나치는 티토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확보한 후 검은 셔츠단 오토 슈코르체니가 특공대를 지휘해 본거지를 급습했다. 그러나 티토의 행방은 묘연했다. 나치의 설계자이자 히틀러의 오른팔 하인리히 힘러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왼쪽 위 파란 점이 티토가 숨어 있던 산악지역 드러바르다
“우리 독일에도 티토와 같은 지휘관이 있었다면 벌써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처럼 티토는 적국의 전장 한 가운데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주축국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탁월한 외교술은 그를 전쟁영웅의 반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티토의 말이다.
“전쟁은 병사들이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전략가가 치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전격적으로 지원하는 소련의 의도대로 놀아나지 않았다. 서방에 줄을 대면서 경쟁구도로 몰아갔고, 심지어 소련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 은연중 전쟁불사를 내비쳤다. 티토의 이러한 태도가 소련을 견제하려는 서방국가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탁월한 외교력이 발휘하면서 전쟁이 끝나고 대부분 동구권 국가가 소련의 발아래 들어갔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어림없었던 것이다.
파르티잔 세력, 즉 유고의 권력 중심에선 그는 나치에 부역한 왕족은 물론 괴뢰정부 추종자들을 깨끗하게 숙청한 후 1948년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세운다. 그의 비동맹외교는 북한과도 손을 잡는 등 제3세계 대표로서 실용적인 외교로 신생국가 유고슬라비아가 고립무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와 연관되는 사건도 있다. 희대의 살인마 북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을 당시, 남쪽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려올 때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티토였지만,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북침설을 일축하면서 소련의 군사원조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더구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등 명언을 남긴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해 서구 일부 지식인조차 북침설에 힘을 실었으나, 그는 남침설을 수정하지 않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면서도 한반도의 실존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 반해, 티토가 세상을 보는 눈은 그토록 정확했다.
티토는 걸출한 리더십으로 대세르비아주의, 크로아티아민족주의, 슬로베니아주의, 가톨릭, 정교, 이슬람 등 얽인 실타래 같은 민족구성과 각 민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 등 골 깊은 배타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각 사상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에 골이 깊은 터라 집권 내내 이 많은 것들의 복합적인 일로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의 유고슬라비즘에 대한 의지는 굳건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시작된 살육을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글쎄 죽기 직전까지 몸서리치며 걱정했을 수도 있다. 티토가 꿈꾼 모두가 하나 된 유고슬라비즘은 그가 대략 200살 까지 건강하게 살았더라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문득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말이다.
“티토시절이 그립다. 경제는커녕 정부와 마피아가 한 통속이 되어 질서란 찾아볼 수조차 없고, 폭력은 힘없는 서민을 대상으로 곳곳에서 일어나도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다.”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 젊은이들조차 백주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큰소리로 떠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젊은 여인들의 날렵한 옷차림에서 막을 수 없는 유행의 물결만 보았다. 호텔 숙소에서의 엄숙함, 주위를 살펴가며 속으로 우물거리는 듯한 대화, 지하차도의 막무가내로 쓴 낙서만이 자유를 절규하고 있었다. 인간은 차별을 감내할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의 젊은이들조차 백주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큰소리로 떠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젊은 여인들의 날렵한 옷차림에서 막을 수 없는 유행의 물결만 보았다.
각설하고, 티토는 공산당 집권세력이 관료화로 변해가는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장과 국영기업 등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즉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면서 개인 소유를 철저하게 막았다. 이로써 공동생산에서 빚어지는 낮은 생산력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공산당원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민중이 골고루 나눠 갖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정적은 늘 세르비아계였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유고슬라비아 수도를 사라예보로 옮기는 계획도 구상했을 정도였다. 결국 코소보에 자치를 허용한 것이 세르비아인 자존심을 건드렸다. 대세르비아주의를 꿈꾸는 이들로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훗날 코소보의 독립국가 실현이라는 무지갯빛 환상에 맞서 무자비한 살육의 씨를 뿌려놓은 셈이었다. 티토가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공산당 내 대세르비아주의의 망령에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에 의한 테러가 공공연하게 일어난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1980년 티토 사후 동구권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세계대전의 진원지인 사라예보에서 열어 지구촌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축제를 열렸다. 여전히 티토의 파르티잔 세력이 중심이 되어 유고연방을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베오그라드측 심기는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의 속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파르티잔 세력들이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게 평화를 위해 자제하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이로운 약이라도 구역질 날 때가 있고,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처지에 따라 속이 불편할 수 있다. 세르비아인에게 동계올림픽은 짜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어머니와 둘이서 흑백텔레비전으로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당시 개막식에 등장하는 그곳 아가씨들의 매력적인 모습에 반했다. 세상에 저처럼 하나 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떼로 몰려 있다니? 깜짝 놀랐다. 그때 옆에 넋 놓고 계시는 어머니께 이렇게 중얼거렸다.
“엄마, 나 유고슬라비아 꼭 가 볼 거다!”
어머니 대답은 간략했다.
“말라꼬?”
지금 이따위 글을 쓰기 위한다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을까. 그 뒤로 더러운 폭력이 일어날 줄 알았던가. 하여튼 티토는 앞서간 인물이었다. 그는 장기집권 인물 가운데 가장 신사적(?)이었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하되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거나 공공연히 살인죄를 뒤집어 씌어 합법이라는 도구로 살해했던 독재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가 그렇고, 스탈린을 위시해 알바니아의 호자,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그리고 마우쩌둥도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이승만도 비켜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티토는 대부분 정적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후 여생을 편하게 보장했다. 물론 등에 칼을 꽂으려 한다거나, 유언비어 유포,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는 예외였다. 그래서 장기집권 독재자 중 그나마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최소한 인권에 대한 존중을 하려 애쓴 인물이라는 뜻이지 티토라고 완벽하거나 깨끗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민주주의 신봉자만큼 친 소련파를 싫어했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앞세워 연방에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에게 냉혹했다. 오랜 권력을 잡으면서 일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비밀경찰을 앞세운 탄압도 엄연히 존재했다.
1974년 티토는 헌법을 개정하면서 종신 대통령에 오르는 우를 범한다. 그러나 채 6년이 안 된 1980년 오른발 혈장에 문제가 생겨 절단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난 노회한 나이였다. 결국 그해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1980년 88세 생일을 3일 앞두고 떠난 그는 생일날 치러진 장례식에 무려 4명의 국왕과 31명의 대통령, 22명의 총리, 47명의 외무장관이 참석하면서 지금껏 장례식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국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는 기록을 세운다.
유럽의 변방, 가난한 나라에 이처럼 많은 인사로 추모행렬을 이뤘다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외교적․국제적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다는 방증이다. 유고는 그로 인해 국제무대에서 국력 이상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는 필자가 건드릴 것이 못된다. 독자 스스로 몫이다. 그러나 편견에 사로잡힌 비난보다는 비판이라는 정확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 잘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긍정적인 일도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 1984년 제14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사라예보 시내. 두 번의 방문에도 하늘은 맑은 날을 허락하지 않았다. 올림픽이라는 축제는 파르티잔 세력들이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이로운 약이라도 구역질 날 때가 있고,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처지에 따라 속이 불편할 수 있다. 세르비아인에게 동계올림픽은 짜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