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칸반도는 세계 질서에 편승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요시프 티토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대세르비아주의가 더는 발을 붙이지 못했고, 대신 티토의 의지에 맞춘 유고슬라비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고국왕 페타르 2세로부터 전쟁장관에 임명되면서 극우세르비아민족주의 단체였던 블랙핸드 줄기세로 ‘체크니크(Cetnik)’를 창설해 대충이나마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던 미하일로비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베오그라드에 입성한 티토를 비롯해 파르티잔 세력들이 그를 살려둘 명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그가 학살한 20만(필자로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 희생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고, 대세르비아주의 신봉자인 그를 유고슬라비즘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티토로서도 어쩌면 그의 사형이 당연했다.
결국 미하일로비치는 전쟁범죄자와 반역죄라는 죄목으로 총살된다. 그러나 훗날 1980년 티토가 죽자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세르비아주의의 화신들에 의해 티토의 동상을 무너트리는 데 정신적 지주로 부활한다.
엄청난 희생을 뒤로한 채 전쟁의 포화가 멈추고 세계는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발칸반도에 침략자가 물러가자 아브노이(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 세력이 중앙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파르티잔을 가로막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유고 망명정부 페타르 2세와도 대충 의견이 모아졌다. 왕의 복귀는 인민투표로 결정하는 만큼 일단은 보류, 그리고 전쟁 괴뢰정부 부역자를 제외하고 전쟁 이전의 의원들 복귀로서 구색을 갖췄다. 총 28석 정부각료 중 23석을 파르티잔이 차지했다.
파르티잔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대세르비아주의를 신봉하는 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이들 중심에 세르비아인 란코비치가 있었으나, 티토와 첫 대결에서 패배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그렇다고 대세르비아주의의 끈질긴 망령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되었건공산당 감시 하에서 1945년 11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투표는 90% 이상이 찬성표로 공산정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제헌국회에 이어 페타르 2세가 간절하게 바라던 왕정복원은 물 건너갔고, 왕정폐지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 유명한 7개의 국경을 맞댄, 6개의 공화국이, 5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4개의 언어로, 3개의 종교까지 합쳐, 2개의 문자를 사용하는, 1개의 국가가 탄생된다.
오시프 티토
1953년 헌법 개정을 마친 티토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산당이 가장 먼저 공산주의자답게 공동으로 집단농장을 실시했다. 그러나 몇 천 년을 이어온 내 땅 내 곡식에 대한 농민의 집착을 이들이 얕보았다. 그리고 산업 시설에 대한 공장도 공동생산 가동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농산물과 마찬가지로 생산력 저하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인간의 소유 심리와 내 것에 대한 본능이 여지없이 발휘(?)되면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놈만 바보라는 심리가 만연했고, 나의 노력이 타인의 이익으로 귀속된다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생산력 50% 가까이 떨어지자 공산당은 한 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적정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아 일부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공산당 권력이완을 가져오게 된다.
그나마 세르비아 경제는 나은 편에 속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절박한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1953년부터 1970년대까지 북부지역을 기준을 볼 때 저개발지역은 65% 수준을 밑돌다가 이듬해부터 격차가 더 떨어지면서 결국 50%까지 벌어지자 지역별 소외감은 민족주의 발화점이 된다.
이 와중에 세르비아민족주의 주역 란코비치가 등장했다. 1963년부터 티토 후임으로 연방부통령에 오른 알렉산더 란코비치는 연방의 탈집중화를 가장 우려했다. 세르비아 위상이 쪼그라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란코비치는 비밀경찰 국가 안전부 수장으로서 공공연히 세르비아 이외의 지역과 인물에 대해서 잔혹하게 다뤘다. 권력 핵심인 군과 경찰을 비롯해 보안부대와 기타 관련 기관 간부들이 대부분 세르비아인으로 채워졌고, 그 중심에 란코비치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실권을 쥔 경찰을 둘러싼 스캔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쉬쉬하고 있었던 실체가 공공연히 대세르비아주의가 대세라며 목소리를 냈다. 당연하게도 세르비아인에게는 인기를 한 몸에 얻었지만, 이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까지 제동을 걸어오면서 본격적인 갈등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 와중에 란코비치는 코소보에서 분규가 일어나자 같은 국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진압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발칸의 걸출한 인물 티토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르비아주의에 함몰된 그는 티토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악수를 둔다. 겁 없이 티토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란코비치가 저지른 최악의 수였다.
1966년 티토 측근들이 이 사실을 알아냈다. 감시 대상이 유고연방 최정상들이란 점에서 티토는 대노했다. 티토는 즉시 그를 체포해 기소했다. 하지만 세르비아인 사랑을 독차지하는 인물인지라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공직만 박탈해 야인으로 돌려보내버린다.① 대세르비아주의가 고개를 숙인 반면, 뜻하지 않게 크로아티아인은 자신들 판전승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1968년 소련이 헝가리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체코를 침공했던 ‘프라하의 봄’ 때 티토는 소련의 흑심을 간파했다. 티토가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연방군 외에도 각 자치국에 지역방위군을 창설했다. 대 소련 전시효과와 동시에 유고 연방군 내 장교와 사병의 세르비아인 비율이 높았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연방군과는 달리 자동소총 정도로만 무장할 수 있었지만, 예산과 충원, 조직은 자체 결정에 맡겼다. 연방군의 통제 하에 두긴 했으나 지역방위군 사령관 임명권은 대통령이자 연방군 최고사령관인 티토에게 있었다. 특히 연방군 경험이 있는 제대직업군인을 활발하게 기용하자 티토를 향한 충성은 여전했다.
그러나 티토가 죽고 후의 10년은 연방군 스스로 몸집 불리기에 집중하면서 예산 역시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단언컨대 공직사회란 한 번 만들어지면 줄어드는 법은 절대로 없다. 연방군은 점차 별자리가 늘어났고, 특권이 함께 확장되면서 끼리끼리 뭉치는 밥그릇 보호가 최대의 목표가 된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구시가지
앞서 유고연방 소득격차를 언급한 적이 있다. 우선 급한 불을 끄려면 코소보와 보스니아 등 남쪽의 빈약한 경제적 자원구축이 필요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짜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세르비아는 투자지역 대상에 포함되었으나, 최대 극빈지역인 코소보가 제외된다.
몬테네그로②는 하늘마저 등을 돌린 듯했다. 몬테네그로, 즉 15세기부터 이탈리아어로‘검은 산’이라고 해서 불렀던 이름이 국명이 되었다. 그만큼 산악지형이 험난한 이곳이다. 몬테네그로에서 보스니아로 향하는 버스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마치 천 길 낭떠러지를 곡예 운전하는 버스 속에서 오금 저렸던 경험이 있으리라. 이런 악조건 몬테네그로가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급성장을 거듭하던 중 일어난 1979년 4월의 대지진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르티잔 : 무장한 전사. 비정규군 요원을 뜻한다. 프랑스어 파르티에서 파르티잔으로 비롯되었다. 동지, 당원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유격대원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해 ‘빨치산’이라고 불렀다.
① 란코비치의 숙청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에게 지위 상승을 가져왔다. 란코비치에 의해 늘 기타민족으로 수모를 겪다가 티토에 의해 여섯 번째 민족임을 공표했던 것이다.
② 몬테네그로 창건 설화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돌아서자 신은 자신의 등짐 속에 흙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신은 남은 흙 전부를 세계의 한 모퉁이에다 부어버렸는데 그로인해 아주 열악한 환경이 되고 말았다. 그곳이 '검은 산', 즉 몬테네그로다. 마운틴(Mountain) 니그로(negro)라고 영어 표현이 맞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