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내 대결국면은 세르비아 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구도였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가 우리가 축적해놓은 부를 가져다가 전용한다고 대공포를 쏘았다. 흑자기업과 대형 은행 본부는 대부분 연방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다는 게 이들의 이유였다. 천혜의 관광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에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베오그라드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두 눈뜨고 보고 있자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1962년 때마침 티토는 탈집중화정책을 공식 선언하면서 각 국가의 동등한 권리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균형발전을 깨트리는 그 어떤 행위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명제 앞에선 기력이 달렸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에서 영웅을 찾아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그 첫째 주자가 농민당을 창설한 후 유고국왕 알렉산다르에게 암살당한 라디치였다. 그 다음 살아 있는 영웅도 찾아냈다. 크로아티아 중앙당 서기를 맡고 있는 미코 트리팔로다. 이들은 예서 그치지 않았다. 민족 우상화에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동상건립이다. 크로아티아는 요시프 옐라취치도 살려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옐라취치 광장에 말 위에 앉아 칼을 뽑아 든 옐라취치 동상이 있다.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을 세우면서 그의 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광장 이름도 ‘공화국 광장’으로 바꿔버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당시에 합스부르크제국에 의해 육군 대령에서 졸지에 왕격인 반, 즉 크로아티아 총독에 올랐던 옐라취치는 1884년에 일어난 헝가리혁명에 합스부르크를 등에 업고 혁명군을 공격했던 과거로 인해 공산주의 원조 칼 마르크스로부터 반동주의자로 낙인찍은 인물이다.
요시프 티토
1974년 티토는 새롭게 법령을 정비해 반포했다. 세르비아의 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코소보와 헝가리 인근 보이보디나에도 공화국의 동등한 자치권리를 부여해버렸다. 세르비아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티토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여야 했다.
연방의 경제를 위해 동등한 민족체계로 꾸리되 연방은 국방과 외교, 굵직한 경제정책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각 국가 자율에 맡기는 느슨한 형태의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 전환했다. 티토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띠는 대목이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해 훗날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의 피해자가 된다. 어쩌면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끈질긴 민족주의가 매를 벌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발칸반도 조각보 나라를 하나로 묶어 유고슬라비즘의 꿈을 이룩하려고 했던 걸출한 인물 요시프 티토가 1980년 88세 생일을 3일 앞두고 죽었다. 타자화된, 늘 세계의 그늘로 존재하며 지배당하고 억압당했던 제3세계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서구는 물론 거대한 공산세력에까지 기죽지 않았던 티토가 죽었다.
예상한 것처럼 티토가 죽고 10여 년 간은 집단지도체제인 대통령위원회 주도하에 동계올림픽을 치루는 등 그가 만들어 놓았던 질서에 편승하면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각국 분리 독립요구라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다. 1971년부터 촉발된 크로아티아 독립요구가 티토 사후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특히 티토가 행했던 강경책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다.
티토가 사라진 후 음지에서 양지로 걸어 나오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티토에 의해 숨을 죽이고 있던 크로아티아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그 핵심 인물이 훗날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을 지내는 프라뇨 투지만이다. 투지만은 농민당 마체크의 영향을 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르티잔에 소속되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건국되면서 38세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최연소 장군으로 승진 후 승승장구하면서 1959년에 대장으로 진급되는 등 크로아티아민족주의에 선두에 선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
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그냥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어쩌면 더 큰 파괴력을 지니고 꿈틀거리고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도 이쯤은 알고 있었지만, 분리 독립에 대한 흐름을 막지 못했다.
이때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와 크로아티아 티토주의 정치인까지 싸잡아 ‘붉은 우스타샤’라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자 우스타샤 괴뢰 정권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을 학살했던 단체에 공산당 색깔을 덧씌운 것이다. 살인자 대열에 몰린 크로아티아 공산세력은 자연스럽게 줄기뿌리를 찾듯 크로아티아민족주의에 스며들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세력 대결을 넘어 폭력의 전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고연방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나사가 느슨해지면서 결속력이 마모되어 삐거덕거렸다. 자연적 무게가 무거운 쪽으로 중심 추가 쏠리면서 점점 위태로워져갔다. 그리고 각각 구심점을 향해 모이면서 힘이 결집되고 또 축적되면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세르비아 입장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독립 움직임은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을 위해서 연방으로 결속된 줄이 느슨해지거나 끊어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마침 코소보에서 대규모로 세르비아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차별과 속국이라는 상황을 탈피하고자 벌인,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세르비아인을 주축으로 한 유고연방은 시위대 뒤에는 알바니아가 있다는 실체도 없는 이유를 들어 강경진압에 나섰다. 코소보민족주의자 역시 잠들지 않는 민족정신을 이어받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명제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수록 진압은 폭력으로 변했다. 알바니아인이 코소보라는 기구한 땅에 자리 잡은 대가는 혹독했다.
세르비아는 티토에 대해 비판을 넘어 비난을 퍼붓기에 이른다. ‘디메녜의 늙은 쥐’, 티토의 고향 디메녜를 따 폄훼하면서 문인, 학자, 지식인 등이 주동이 되어 사정없이 포문을 열었다. 늙은 쥐에게 옴짝달싹 못하던 때를 벌써 잊었고, 그 아래서 빌붙어 눈치만 보며 살던 시절이 너무도 억울했다.
세르비아인은 티토시절에 크로아티아에 종속된 삶을 살았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티토 시절 정치적인 일들을 부정하면서 과거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에 의한 압제와 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 체크니크가 저지른 폭력에 대한 내용은 쏙 빼버린 채 크로아티아 괴뢰정부 우스타샤가 저지른 살육만 과장확대하면서 자민족 단합을 유도했다. 자연히 세르비아인 가슴에는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 감정이 요동쳤다. 역사학자까지 동원되어 크로아티아 민족은 원래가 파시즘의 피가 흐른다며 크로아티아 역사를 거슬러 잘근잘근 밟았다. ‘크로아티아인=우스타샤’라는 공식이 아무런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쏟아졌다.
점점 발칸반도에 붉은 기운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르비아에 흑수단 블랙핸드가 부활을 맞아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로 변했다. 이때 화려하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유명하고도 악명 높으신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 8. 20.~2006. 3. 11.)다.
대세르비아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타민족 목숨 따위야 초개처럼 여긴 그였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에는 그의 악행으로 인해 여전히 피비린내가스며 있다. 유고슬라비아를 경제적으로도 바닥을 치게 만든 절단 낸 인물, 스스로 민족의 신으로 등극하려 미친 듯 하늘에 핏물을 흩뿌린 인간이다.
유고연방 해체가 막을 수 없는 수순이었다면 평화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세르비아주의 망령에 깃들어 자행한 살육은 지금의 세르비아인조차 부끄러운 과거로 귀와 눈을 가리고 싶을 법하다. 나치의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이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캄보디아의 폴 포트, 소련의 스탈린,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 우간다의 이디 아민 등과 함께 줄로 엮는다면 뭐라고 변명을 할까.
세르비아 노비사드 시내를 흐르는 도나우강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이 옛말은 배가 떨어진 것에 까마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배가 떨어지는 원인은 까마귀가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인민공화국을 건국함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탄력을 받았던 각 나라 민족주의가 수면 아래로 들어가 숨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티토가 죽음으로써 때를 기다렸다는 듯 민족주의가 힘찬 자맥질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하늘로 나르는 가 동시에 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등장한 인물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다. 그는 1941년 유고 베오그라드 동남쪽 도나우강을 따라 스메데레보 인근 평야지대인 포자레바츠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교회 성직자인 아버지가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신병을 앓던 중 그가 두세 살 무렵 집을 뛰쳐나간 후 밀로셰비치가 21살이 되던 1962년에 자신의 머리에 권총 방아쇠를 당겨 자살하고 만다.
엄격한 공산주의에 빠져 있던 어머니도 1972년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는 불행한 유년을 보내야 했다. 이뿐만이 아리라 육군 장성이던 그의 삼촌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그가 타인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게 된 잔인한 성격이 불우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혼의 여신이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는 장가를 잘 들었다. 베오그라드대학에서 법학학위를 취득한 후 공산당 산하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중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세르비아 미랴냐 마르코비치(Mirjanja Marković)와 결혼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르비아 공산당 간부이자 그녀 역시 공산당원이면서 강경파로 베오그라드 대학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베오그라드 경제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던 밀로셰비치는 1978년 앞날에 결정적인 일이 일어난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파르티잔 출신인 페타르 스탐볼리치 후원으로 베오그라드 연합은행의 총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스탐볼리치는 티토와 함께 세계대전을 치른 영웅으로 초대 농림장관, 연방의회 의장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수상, 부통령을 역임하는 인물이다.
밀로셰비치는 정치적 야심을 장인과 탐볼리치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면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 한다. 그 역시 탁월한 언변술로 주위를 압도하면서 1987년 티토가 결성한 공산주의 동맹 세르비아 지부장에 이어 세르비아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는 기염을 토한다. 그는 내심 대세르비아주의에 대한 환상을 누구보다 강하게 품고 있었다. 블랙핸드를 부정은커녕 불랙핸드 창설자, 군부쿠데타의 원조격인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동경했던 인물이다.
밀로셰비치의 등장으로 세르비아가 본격적으로 전원 공격수로 나섰다. 가장 쉽게 2차 세계대전 중 우스타샤에 의해 자행된 세르비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자는 여론이 세르비아에서 들끓었다. 당연히 조정석에는 밀로셰비치가 있었다. 1987년 4월, 때마침 코소보에서 살아가던 세르비아계가 시위를 일으키자 알바니아계와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밀로셰비치가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력한 진압을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탄력이 강할수록 인기를 끈다는 방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