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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Apr 23. 2024

살기殺氣로운 전쟁의 서막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 코소보 수도 프리슈티나





1987년 4월, 때마침 코소보에서 살아가던 세르비아계가 시위를 일으키자 알바니아계와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밀로셰비치가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력한 진압을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탄력이 강할수록 인기를 끈다는 방증이었다. 


밀로셰비치는 치밀했다. 가장 먼저 주변정리부터 들어갔다. 일단 반세르비아 분위기가 팽배했던 보이보디나주와 만만한 몬테네그로에 자신의 심복을 심었다. 1988년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그랬듯 지방 정부를 흔들기 위해 비밀경찰을 이용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들 시위를 부추겼다. 

계획대로 두 도시에서 세르비아인에 의한 대규모 지방정부 반대시위가 연일 터져 나왔다. 밀로셰비치는 이를 핑계로 두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면서 대부분 자신의 충복으로 바꿔버렸다. 


자신감에 힘입어 탄력을 받은 그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 대한 통제권 확보를 위해 티토가 제정한 헌법을 대거 수정해버렸다. 이때 강력한 군사와 무기를 보유한 유고연방군이 자신의 깃발 앞으로 줄을 섰다. 밀로셰비치는 말 그대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었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이상이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을 것이다. 


기세에 눌린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는 자연적 세르비아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티토가 부여했던 자치주 재량권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를 계기로 연방법은 크로아티아 등 다른 국가들에게도 공공연히 무시되었고, 당연히 각 국가 간 긴장의 촉수가 하늘에 닿자 마치 피에 굶주린 민족이란 악이 어서 전쟁을 시작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세르비아계와 여타 민족들 간의 충돌은 발칸반도, 유고슬라비아에 폭력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1990년 2월, 코소보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알바이아인과 세르비아인 충돌은 1998년에 있었던 코소보 유혈사태의 전조였다. 


1990년 7월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모여 ‘알바니아민주포럼’이 조직된다. 이때 코소보가 공화국과 위치가 동등하다고 주장하자 세르비아 군대가 본격적으로 개입시기를 앞당기며 무력으로 평정했다. 코소보 국회마저 밀로셰비치 충견들이 장악하면서 국회폐지와 언론통제로 이어졌고, 이와 더불어 연방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코소보 내 세르비아 민병대가 무장을 완료했다. 이제 시기만 남았다. 


▲ 코소보 프리슈티나 박물관의 클린턴 대통령의 모자와 성조기     




드디어 “그 옛날 듀산 왕이 지배했던 땅은 모두 세르비아의 땅,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의 것”이라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답답한 ‘블랙핸드’의 정신이 되살아났다. 이를 지켜보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 가슴에는 무겁고 뜨거운 쇳덩이가 들어앉은 듯했다.      


배은망덕背恩忘德도 유분수다.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한, 영원한 후광 스탐볼리치를 당내 선거에서 축출한 밀로셰비치가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에 선거에서 당선된다. 그가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행한 일이 1389년에 벌어진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터키제국에게 장렬하게 전사한 세르비아인들을 위한 600주년 기념행사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코소보의 자치권을 사실상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세르비아정교를 앞세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종교, 즉 로마 가톨릭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과거를 들춰내 가톨릭이 저지른 개종강요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종교인들이 저질렀던 세르비아정교 파괴 음모, 그리고 가톨릭 언론이 세르비아인은 목매달아야 한다고 했던 역사를 비롯해,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교회의 정치공작 실체, 우스타샤에 편승한 크로아티아 성직자들이 세르비아인 살육에 앞장섰던 과거 등 구석구석 옛 것들을 샅샅이 들춰내 갈등을 부추겼다. 


이는 곧 세르비아민족주의의 환각제였다. 이를 기회로 유고연방 곳곳에서(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이보디나,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세르비아인 데모가 일어나 연방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슬로베니아 내무장관이 나서 자국 공화국 내에서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겠다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슬로베니아에서 살아가던 세르비아인들은 베오그라드로 눈물 젖은 편지를 보내 슬로베니아와 단절을 호소했다. 


슬로베니아가 이렇게 까지 강하게 대응한 이유는 세르비아가 코소보에 유혈 낭자한 진압에서 소름이 돋았고,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슬로베니아는 스스로 ‘유로코뮈니즘’, 즉 이제부터 유럽 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유로코뮈니즘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의 공산당 세력이 유럽에 맞게 변화된 수정노선을 뜻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전방위 압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연방군의 폭넓은 지원 하에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의 지역방위군 결성으로 연결된다. 자위권의 발동이라는 변이었다. 언론과 종교인, 지식인까지 합세해 폭로전에 이어 인신공격이 난무하면서 이때부터 연방의 존치 필요성보다 또 다른 형태의 세계 확전을 걱정하는 서방언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밀로셰비치는 연방 각국에서 돌아가며 맡았던 집단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연방대통령이 되기 위해 모종의 전략을 짰다. 연방대통령이란 연방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그야말로 도깨비방망이를 손에 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계략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촉수에 딱 걸려버렸다. 1990년 1월 ‘제14차유고공산당전당대회’가 베오그라드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방해로 전당대회가 중도 파기된다. 티토 사후 10년, 파르티잔으로부터 시작해 아브노이로 성장하면서 시작된 공산당 전당대회가 이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했다. 세계 언론은 ‘유고 공산당 사망!’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신문 일면을 장식했다. 1990년 1월 동구권 공산주의도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유고인민군




살기殺氣로운 전쟁의 서막


“스포츠는 살아 있다!” 오래전에 어느 스포츠 상표 광고 헤드라인이다. 이 와중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볼 보듯 빤한 일을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겼다. 1990년 5월 자그레브에서 열린 ‘크로아티아 대 세르비아 축구경기’다. 모두가 예상했듯 두 응원팀은 경기가 시작되기 전 관중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면서 백여 명이 부상하고 2백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진정 자국 자민족주의가 용솟음치며 살아 있었다. 


세르비아 밀로셰비치가 바라던 바다. 절대로 합쳐질 수 없는 물과 기름이 축구장 잔디에 엉겨 붙었다고 생각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까. 축구로 인해 양 민족 간 격앙된 감정이 표출된 것이지만, 단순한 스포츠경기가 아니었다. 그동안 깊어진 골짝에 쌓인 메마른 낙엽에 불길이 옮겨 붙듯 조만간 다가올 내전,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그냥 두어도 터질 전쟁이었다면 연방군이라도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했더라면 어떻게 흘러갔을까. 군인은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존재의 가치가 상승된다. 유고연방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힘의 중심이 세르비아로 확연히 기운다. 하긴 거의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 합작인 유고연방군은 밀로셰비치의 충실한 개가 되기로 작정했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군대의 특성상 어느 나라건 밥그릇을 줄일 생각도 없었지만, 군사시설에 대한 자금도 쥐락펴락 해야 했고, 방위산업의 무한한 이권과 지위의 달콤함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방위군의 무장해제에 초점을 맞췄다. 훗날의 승기를 잡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슬로베니아가 순진한 바보가 아닌 이상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눈치 챈 슬로베니아는 동구권을 통해 신무기를 수입하고, 군사를 무장하고, 경찰까지 공을 들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 60여만 명이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반대였다. 크로아티아 지역방위군은 무장해제 수준에 이를 만큼 연방군은 집요했다. 


연방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동요와 장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군부 내 ‘유고슬라비아운동’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장교의 가입을 충동질했다. 유고연방이 존재해야 유고연방군도 존재한다며 설득했다. 이들 강령에는 “세르비아 측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1991년 3월 유고인민해방군최고사령부 성명서에는 연방 국경선 변화, 내전, 무력행사 등 불법적인 무장에 군부가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책임은 폭력의 원인제공자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곧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무력을 통해 응징하겠다는 밀로셰비치 작품이다. 


그리고 연방 내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연방군 스스로 작전에 임할 것이라고 허수아비로 전락한 보리샤프 요비치 대통령과 대통령위원회에 통보해버린다. 

이제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유고연방 최고의 무력단체가 탄생의 나발을 살기殺氣롭게 불며 하늘에 알렸다. 엄밀하게 따지면 일종의 군사반란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밀로셰비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결국 전쟁의 총성이 울렸다. 첫 시작은 크로아티아 내에서 살아가던 세르비아인들이 모여 독립을 하겠노라 선언했다. 크로아티아로선 이따위 상황에도 눈을 감아 준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아래채에 세 들어 살던 자가 졸지에 내 집이라고 소리치며 담장을 쌓겠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비슷한 시기에 크로아티아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이 크로아티아가 민병대를 조직한다는 이유로 시장과 보좌관을 포함해 크로아티아 관리들을 불법테러단체로 규정하면서 줄줄이 엮어버렸다. 


그러자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은 일촉즉발 팽팽한 시위처럼 변했다. 결국 1991년 3월 2일 헝가리 국경 크로아티아 북부 차코베츠에서 살던 세르비아인이 무장한 채로 경찰서를 접수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용감하나 무식한 행동이었다. 베오그라드를 믿지 않았다면, 연방군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 고장에는 크로아티아인보다 

세르비아인이 약간 더 많은 인구비로 살고 있다는 단순무식 통계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밀로셰비치가 자신들 뒤를 든든히 받쳐줄 것이라 단언하지 않았다 해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결국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양측의 공방전에서 경찰이 화력이나 조직에서 뛰어났다. 크로아티아 경찰에 의해 전원 체포되면서 상황은 끝이 났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연방군 장교를 배후조종자로 지목했다. 만 하루가 지나고 크로아티아 경찰 병력을 시 외곽지로 물러서게 한 뒤, 체포된 세르비아인들을 석방하는 것으로 일단락 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곳에 살던 세르비아인의 탈출러시가 벌어졌다.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보더라도 신변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대부분 백성은 민족주의든 유고슬라비즘이든 하등에 상관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아니면 그 윗대부터 살아가던 나의 고향을 단지 세르비아인이란 이유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이의 심정을 헤아려볼 것도 없다. 일을 치는 자가 있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같은 민족이라도 가차 없어야 한다. 사건발생 4일이 지난 1991년 3월 6일, 2만여 명이 생명을 구걸하면서 정처 없는 난민 삶을 택했다. (계속)


밀로셰비치 서명



 유고연방대통령위원회는 모두 8명으로 6개 공화국과 2개의 지치주에서 선임된 위원으로 구성되고, 매년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맡았다.

 크로아티아 북부, 헝가리 국경 인근에 세르비아인이 몰려 살게 된 까닭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5세기 후반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에 의해 발칸반도가 양분되면서 그 완충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에서 세르비아인을 받아들여 인간방어막을 쳤다. 그들로 하여금 합스부르크에 반기를 드는 토착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들을 의적, 혹은 산적이란 뜻인 ‘하이두끄’라고 불렀는데 제국은 이들에게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토지를 할당해주면서 오스만제국의 최전방에 세르비아인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제국의 암흑기(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와 비교해 교육과 삶의 질 등이 형편없었다)를 벗어나고자 탈출러시가 이루어지면서 크로아티아북부, 즉 헝가리 인근으로 몰려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스플리트지방 프로축구 구단 이름이 '하이두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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