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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Apr 30. 2024

민족이란 이름으로 죽이고 죽이는 살육의 시작

유고 연방 민족 간 전쟁이 막을 올리다

▲ KFN (국방TV) 특집/ 역전다방- '유고슬라비아 전쟁 1' 타이틀 화면 캡쳐




1991년 3월, 밀로셰비치는 연방군을 앞세운 비상계엄을 추진했다. 국내 문제를 외국과의 전쟁으로 잠재우는 아주 오래된, 아주 못된 지도자가 아주 위험하고도 비열한 작전을 역사에서 거꾸로 배운 것이다. 요비치 연방 대통령과 위원 2명이 나 몰라라하면서 위원회를 사퇴해버리고 칩거에 들어가 버린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거나 훗날 잘못되더라도 목숨 따위는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밀로셰비치는 이때를 기다렸다. 자신의 지도력을 강력하게 펼쳐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지금부터 대통령위원회를 인정치 않겠다는 그야말로 연방의 입장에서 보면 대반란의 기치를 목청껏 외쳤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즉각 군사경계령을 내리면서 대화와 타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씨알도 먹히지 않은 소리를 공허하게 냈다. 


두 달 뒤 크로아티아 대표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순번이 돌아왔다. 이때 예견 되듯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 4명의 위원이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이 반대하고 나섰다.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는 빤했다.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을 위해 대통령위원회 스스로 자멸하자는 뜻이었다.      


이때였다.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만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미국과 유럽공동체(EC)를 향한 말이다. 미국이 보기에도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그러나 이권은 멀고 폭력은 가까이 있다 보니 지구방위군 대장으로서 점잖게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한 조지 부시가 이랬다.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사진보다 순하게 생겨서 다시 그려야 할 듯.


“유고연방을 일방적으로 벗어나려는 측에 일절 지원하지 않겠다”


무슨 지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 뒤로 보스의 말에 보충 설명하듯 베이커 국무장관이 나섰다. 

“미국은 두 공화국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 


남의 나라가 독립하겠다는 데 강대국의 인정을 받으란 말은 이해가 간다. 이 말은 동상이몽을 꾸게 했다. 미국의 바람대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긴장의 촉수를 세우고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는 상황으로 변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는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연방군의 스타들은 색다르게 해석했다.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미국이나 EC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희색만면喜色滿面했다. 


미국의 메시지를 옳게 알아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한 발 물러서면서 느슨한 연합형태를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르비아 뜻은 확고했다. 꺾을 수 없다면 기어들든가 혹은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동시에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 했다. 밀로셰비치나 연방군이 바라던 바다.      


더는 협상은 없다. 연방군이 빠르게 움직였다. 연방의 존속을 위해 슬로베니아국경을 봉쇄한 가운데 6월 27일 슬로베니아 땅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했다. 이때 슬로베니아에 주둔 중이던 연방군이 합세하면서 이동했다. 하지만 스타, 즉 똥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작전이란 군사 수와 드러난 무기의 화력만을 가지고 작전을 짰다. 다윗과 골리앗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법했다. 


적지의 지형지물, 계절과 날씨, 상대 화력 등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슬로베니아 산악지형에 진입하면서 탱크가 움직이지 못했다. ‘빛 좋은 개살구’로 변하기는 대형 화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화기 중대가 고립되자 연방군은 사기가 바닥을 쳤다. 그리고 슬로베니아 군 전력에 대한 정보조차 단순했다. 의외의 반격이 슬로베니아 군으로부터 시작되자 오합지졸로 변한 연방군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군관민 한 몸이 되어 맞서 싸우는 슬로베니아 지역방위군의 용감한 전투방식에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연방군은 슬로베니아가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미 그 이전 연방군이 시도했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방위군 무장해제 작전이 실패한 후 예견했어야 했지만, 튀어 나온 배만큼 무지한 배짱을 믿었다. 


더구나 더더욱 부끄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기갑부대와 중화기부대가 산악지역에 고립되면서 슬로베니아 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들 포로와 함께 압수된 무기가 슬로베니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면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텔레비전에 피골이 상접한 포로가 된 아들을 본 부모들이 전선에 배치된 아들을 돌려보내라며 눈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더구나 연방군이 슬로베니아 공격의 당위성도 부족했다. 즉 연방정부 뿐 아니라 유럽에도 연방법 위반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연방정부 존속을 위한다는 허황된 명목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서방 여론도 이때부터 연방 해체로 급선회 했다. 연방정부 자체가 스스로 내부로부터 허물어지면서 결론적으로 폭력의 뒤에는 세르비아 밀로셰비치가 있다는 것이 만방에 알려졌다. 유럽공동체(EC)도 전쟁이 터지자 시각을 달리 했다. 어떤 식으로든 폭력, 그것도 20세기 후반에 지구촌에서, 스스로 가장 문명사회인 유럽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들끓었다. 서방언론은 부족주의가 유럽 동쪽 끝자락에서 설쳐댄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밀로셰비치가 코너로 몰렸다. 그렇다고 꿈쩍할 위인이라면 벌써 손을 들었겠지만, 의지가 강했다. 그 이면에는 연방군이라는 막강화력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들보다 더 뛰어난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에서 대세르비아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로 싸우는 토착 전사들을 믿었다.      


밀로셰비치는 전면전보다 각국 세르비아인 민병대가 곳곳에서 활약하면서 뒤에서 연방군이 무기를 대고 자신은 자금을 대는 국지전이 딱 마음에 들었다. 여론의 뭇매도 피할 수 있으며, 전형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한 14세기 중반 듀산 왕이 거느렸던 거대한 영토를 지신들의 영역으로 빨아들이는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고 내전 내내 지역민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더할 나위 없이 악랄했다. 인종청소는 대부분 이들의 손에 맡겨졌던 것이다.    

   


 ▲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1991년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중에 슬로베니아 경찰 호위대가 연방군 병사들을 체포된 사진과 그 옆에는 부코바르 전투 중 파괴된 탱크다두브로브니크와 아드리아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세르비아 배치의 로켓 등이다.         




이때 폭력을 말리려던 EC 내부에서조차 의견정리가 덜 된 상태였다. 연방분리 주장의 독일과 연방유지를 끝까지 고수한 프랑스 간의 주장이 대립되면서 시간만 끌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면서 유럽에 발언권을 확대하고 있던 헬무트 콜 정부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이었다. 


이 와중에도 연방 내 곳곳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이 이를 간파하고 1991년 6월 30일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인 즉, 유고 연방군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라고 엄포를 놨다. 웃기는 것은 이미 전투가 시작된 지 여러 날이 지났던 때였다. 


한편 연방군 전면공격을 막아낸 슬로베니아 의기는 충만해 있었다. 서구 중재에도 독립은 유보 할 수 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연방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국경봉쇄 뿐이었으나, 이미 내륙으로 진입한 연방군은 앞서 보았듯 형편없었다.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한 클릭 내린 연방군


1991년 9월에 들어서면서 산악지형 슬로베니아에서 쓴 맛을 본 연방군은 전쟁터를 크로아티아로 한 클릭 내린다. 당시 연방군의 화력을 보아도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연방군은 병력 15만, 탱크 1천5백 대, 전투기, 함대, 중장거리 대포 등을 보유하고 있는 데 비해, 지역방위군 2만, 탱크 1백여 대, 해군함정 2척, 항공기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전면전이 개시되기 전 이미 7월부터 크로아티아 내에서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세르비아 민병대 사이에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땅 곳곳에 세르비아인이 60여만 명이 살고 있는 터라 연방군으로부터 화력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민병대는 크로아티아군과 전선 없는 전투를 이어갔다. 특히 두 민족이 비슷한 비율로 살아가던 부코바르와 오시예크 등 헝가리와 세르비아 국경 인근 크로아티아 도시들이 심각했다. 


9월 4일 새벽, 크로아티아는 경악했다.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연방군 탱크 180여 대와 수천 명의 무장군인이 크로아티아 국경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부코바르 탈환작전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그러나 여론은 크로아티아 편이었다. 막무가내 식 살육이 세계 언론에 소개되면서 연방군은 일단 한 발 물러서서 부코바르 봉쇄작전으로 선회했다. 


석 달 동안 성안에서 옴짝달싹도 못하던 부코바르 시민은 매일 반복되는 공습을 견뎌내야 했고, 중세시대도 아닌 말 그대로 식량부족과 갈증에 시달리면서 버텨야 했다. 한계가 찾아왔다. 결국 시민대표들이 나서서 연방군에 항복했다. 


연방군이 점령에 성공한 부코바르로 인해 그해 11월 세르비아인 거주지 지역 확보라는 대세르비아주의에 입각한 일단의 성공으로 정전 협정에 나서는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이와 동시에 부코바르 서북쪽 오시예크 상황도 심각했다. 도시 한 가운데로 드라바강이 흐르는데 강이라고 해봐야 강폭이 고작 30m에 불과 했다. 이 드라바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은 크로아티아인, 강북은 세르비아인이 몰려 살았다. 유고연방 탈퇴가 가시화되면서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뒤에 다루겠지만, 마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비극처럼 변했다. 그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강과 다리를 사이에 두고 철천지원수인 양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실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얼굴을 맞대고, 교류하면서 사람에 따라 의좋게, 혹은 혼인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져가면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다. 유고 연방군의 강력한 지원으로 중무장한 세르비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방위군 간의 공방전이 일어나면서 140여명 사망자가 생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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