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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y 07. 2024

민족이란 이름의 살육

인간성 상실의 추악한 시대

*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프라뇨 투지만. 1995년 12월 14일 셋은 프랑스 파리에서 보스니아 전쟁의 최종 평화 협정에 서명하였다.(출처 위키백과. 퍼블릭)




실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얼굴을 맞대고, 교류하면서 사람에 따라 의좋게, 혹은 혼인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져가면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다. 유고 연방군의 강력한 지원으로 중무장한 세르비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방위군 간의 공방전이 일어나면서 140여명 사망자가 생겼다.      




전장의 모습이 유럽에 생생하게 중계 되면서 유럽과 미국을 경악케 했다. 독일 콜 총리는 대 세르비아 원조 중단을 강력히 시사했고, 미국의 국무장관 베이커 역시 경제원조 중단과 군사적 봉쇄론을 들먹이며 엄포를 놓았다. 이와는 반대로 케야르 유엔사무총장은 평화유지군 등 유엔개입 반대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유럽공동체(EC)에 대한 비난을 함께 부담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슬로베니아와의 한판 전투로 인해 연방군의 허약한 지도력이 도마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국제적인 여론 뭇매를 동시에 맞아야 했다. 한편 슬로베니아는 연방군이 완전히 철수하자 포로를 석방하는 것으로 화답하면서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연방군은 슬로베니아에 대한 독립을 기정사실화 했다. 


이와 동시에 연방군 지도부와 밀로셰비치 밀약이 본격적으로 백주 대낮에 민낯을 드러났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밀로셰비치가 나섰다.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세르비아 민병대 도열식 연단에 선 그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라며 마치 작금의 일본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를 쏟아내며 세르비아인 단결을 호소했다. 이후부터 평화와 대화, 비폭력 운운하는 정치인이나 재야인사, 양심적 지식인은 모두 매국노로 낙인찍어버린다. 


한편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쿠데타 세력에게 감금당하면서 세계의 눈과 귀가 소련으로 쏠렸다. 세르비아는 국제적 감각에 멍이 들어 정신을 못 차린 상태에서 ‘연합정국의 동지’라며, 쿠데타 세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세계만방에 비웃음을 샀다. 무지무식이 감각조차 멍들게 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달리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터라 전쟁 이전 지역방위군이 연방군에 의해 무장해제단계에 이르렀고, 남아 있던 실전용 무기 수준도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가 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 민병대를 상대로 국지전을 펼치면서 그나마 선전하고 있었다. 


1991년 7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투는 개전 초기 크로아티아 국토 30%까지 세르비아 민병대가 점령했다. 그러자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크로아티아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 이끄는 지역방위군의 게릴라전투가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조금씩 발을 뺐다. 


그들은 물러나면서 화풀이를 민간인들을 향했다. 늘 그래왔듯 전쟁의 피해는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이었다. 위험이 전혀 없는 비무장 민간인마저 학살해야 했을까. 단언컨대 비인간화에 따른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저급한 권위가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상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비하함으로써 스스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여기에 과거 보복심리가 추가되고, 재보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더욱 극단적으로 변한다.      



두브로브니크의 공방전에 파괴된 현장. 성벽 둘레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상흔을 찾아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밀로세비치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분리 독립은 막을 수 없는 대세로 판단했을 법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이어갔다. 하루에도 주인이 서너 번씩 바뀌는 죽고 죽이는 전투가 이곳에서도 벌어졌다. 더구나 천혜의 관광지와 문화유산이 있는 역사도시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했다.


무자비한 연방군의 공습은 문화재라고 봐주지 않았다. 달마티아, 자다르, 스플리트 등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해변에 즐비한 13세기 교회들과 성곽이 공습으로 파괴된 모습이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유엔이 제정한 인류문화유산이 연방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파괴되자 세계가 경악했다. 13세기에 지은, 뻥 뜷린 자다르 성당 지붕이 세계에 방송을 탔다.


우려했던 두브로브니크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1991년 10월초 세르비아 민병대도 아닌, 연방군 소속 몬테네그로 병사들로부터 시작이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싸움을 피하는 자를 경멸한다. ‘검은 산’ 몬테네그로의 전설에서 보듯 험난한 산악지형이라 고대 로마제국도 온전히(구석구석) 점령했다고 볼 수 없는 땅이었고, 오스만터키제국도 이곳의 완전점령을 포기한 땅이었다. 티토 역시 이곳을 근거지로 나치와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처럼 이곳에 살아오던 사람들의 기질은 전투에서도 여가 없이 발휘된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세르비아인만은 영원한 벗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세르비아 젊은이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용감하다고 스스로 믿는 몬테네그로 인들은 두브로브니크에 사는 사람들이 파시스트 압제에 시달린다고 아무도 호소하지 않았음에도 두브로브니크를 파시스트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며 굳은 의지를 다졌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남쪽 헤르체그노비까지 연방군 소속 몬테네그로 군이 진격해왔다. 14세기에 들어와 헝가리 지배권에서 마음껏 자유를 획득하면서 중세봉건도시 독자적 영역을 확장했던, 경제는 물론 문화적 발전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두브로브니크공국이었다. 14세기 말에는 베네치아를 능가하는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지중해를 넘어 영국항구도시까지 무역을 이어가며, 막대한 부를 이용해 바닥에 대리석을 깔고, 하수도와 급수시설까지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다. 


유럽 최초의 고아원도 이때 생겼으며, 병원과 약국은 물론,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전염병 검역제도까지 실시되는 등 문화적 차원에서 상당히 발전을 거듭했던 두브로브니크다. 이러한 중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드리아해 미항을 지키는 군사들이 지닌 무기라고는 구형 대포 두 문, 기관단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아드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배가 불타고, 성 자체가 검은 화염에 휩싸이자 세계는 또 한 번 경악했다. 유네스코가 세계 여론에 호소하면서 비난의 화살이 세르비아를 향해 빗발쳤다. 현재에도 두브로브니크 성벽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파괴된 채로 성벽 뒤에 웅크리고 있는 건물과 빈터를 군데군데 만날 수 있다. 


몬테네그로가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한 가운데 연방 해군에 의해 해안봉쇄까지 3개월 가까이 이루어지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포격이 퍼부어졌다. 1991년 12월, 밀로셰비치의 명령을 받은 미오드라그 조키치 해군부제독이 이끄는 해군 함대에서 무차별 함포사격은 아름답고 튼튼하기만 했던 성곽이 힘없이 허물어 내렸다.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인을 보호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목을 폈지만, 두브로브니크에는 세르비아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세계 여론을 의식한 밀로셰비치는 문화재 파괴범이란 이름만 획득했다. 결국 해가 바뀌고 이듬해인 1992년 초 유럽공동체(EC)가 두 나라에 대해 독립을 승인하고서야 아드리아해 항구 중 가장 마지막으로 봉쇄를 풀게 된다. 당시 주민들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크로아티아에 6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자의든 타의든 모두 전쟁터로 변했다. 크로아티아 지역방위군과 세르비아 민병대사이 악에 받친 죽음의 대결은 죽음의 굿판이 벌어졌다. 크로아티아 동부, 주민이라곤 해봐야 2천 명 남짓 살아가던 보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 역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살고 있어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서로 비슷한 인구비율로 살아가던 마을이라 더 참혹했다. 


1991년 12월 초, 이곳은 오롯이 세르비아 민병대가 점령하면서 기세가 등등해진 세르비아인에 비해 크로아티아인은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러던 중 12월 초 이곳 민병대의 활약을 지켜보던 연방군은 이들을 보스니아에 투입하기 위해 철수명령을 내린다. 


이때 세르비아 주민도 머뭇대지 말고 함께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조용히 물러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략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철수 전날 밤 무려 39명의 무고한 크로아티아인을 도륙했다.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강간과 폭력은 예사였다. 무기고로 사용하던 4백50년 전에 세워진 석조 성당까지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 번 시작된 폭력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새벽이슬과 함께 사라졌다. 밤의 아비규환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표현대로 진실로 저주스러웠다. 이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있었으며, 이곳에 살던 세르비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병대와는 달랐다”


이들이 바로 세르비아 민병대와 함께 블랙핸드의 네트워크 체트니크의 부활이자, 밀로셰비치가 기르는 개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하일로비치 대령에 의해 창설된 ‘체크니크’를 넘어 1차 세계대전을 발화한 ‘블랙핸드’를 추종하는 밀로셰비치가 키운 자들이었다. 각 지역에서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민병대보다 전장을 따로 정하지 않은 채 전후방 가리지 않고 어디든 뛰어들어 후방교란과 강간, 파괴, 정보, 민심이반 등을 일삼는 전방위 게릴라부대였다. 


이들 블랙핸드의 네트워크가 활동무대를 보스니아, 즉 악마의 부대가 보스니아로 넘어 갔으니 보스니아의 처절한 절규가 들려올 날이 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91년 10월부터 보스니아의 이슬람과 크로아티아 가톨릭이 힘을 모아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 할 것임을 선언했다.     


 

세계의 관심이 이곳 크로아티아 민간인 살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국제인권단체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역시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잔악한 고문과 살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긴개긴, 그 나물에 그 밥, 그놈이 그놈, 문명대륙 유럽의 한 귀퉁이에서 유럽인은 부끄럽게 만드는 인간백정들이 지지르는 도살은 어떤 식으로든 미국과 유럽에 부담이었다. 


입으로만 떠들다가 죄 없는 민간인 학살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리고 며칠 후 크로아티아지역 EC의 휴전감시단이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되자 일제히 연방군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은 결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정규군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며, 가장 더러운 집단”


따라서 군사개입만이 이 더러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비록 국지전이라곤 해도 가혹하고 잔혹한 행위가 멈추지 않았다. 


1991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크로아티아 전쟁은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전 협정이 몇 번씩 체결됐다가 번복되고, 또 머리를 맞대곤 했다.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국경지역 부코바르를 점령했고, 서구세계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을 기정사실화 한 상태에서 애써 피 흘릴 까닭이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은 독일 콜 총리가 못 박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종식하지 않으면 공식적으로 두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이라고 최후의 통첩에 무응답으로 긍정적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콜 총리가 앞서서 설쳐대는 꼴을 꼴사납게 바라보던 프랑스였다. 이때 영국이 독일편을 들었다. 당시 독일이 유럽공동체 회의에서 영국 입장으로 한 발 물러서주는 외교적 밀약관계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럭저럭 한 해가 넘어가고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1992년 1월 8일 유고 연방공군이 유럽공동체 감시단이 탄 헬기를 격추시켜버렸다. 이 일로 5명이 목숨을 잃었고, 미적대던 프랑스도 이제 더는 콜 총리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너희들이 머뭇거렸기 때문이라는 여론이 프랑스를 향해 메밀눈을 뜨고 보기 시작했다. 


격노한 유럽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한다. 독일 헬무트 콜의 생각처럼 진작부터 독립을 승인했더라면 더 많은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끝까지 외톨이가 되어 연방유지 고집을 부리다가 유럽공동체 국가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크로아티아에 소수민족 권리를 존중할 때까지 외교사절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소심한 조건을 거는 등 체면을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때 연방군이 무기를 거두고 크로아티아에서 물러서기 시작하자, 크로아티아 역시 자국 내 연방군기지를 향해 있던 포위망을 거두고 연방군 군사들이 세르비아로 돌아가도록 버려둔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요 도시들(일러스트 박진서)



이때 전투지역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크로아티아 내 게릴라들은 크로아티아가 무기를 거둘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긴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연방군이 물러간 뒤 자신들을 향한 크로아티아인의 보복은 이미 지난 과거에서 충분히 경험했던 터였다. 


전쟁으로 치닫던 한 해가 지나고 1992년 2월 초가 되자 발칸에 파견된 유엔대표단이 유엔본부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연방군 참모총장 블라고예 아지치가 참석한 가운데 세르비아 게릴라 지도부가 모여 의견을 모았다. 결과는 유엔평화유지군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때 또 크로아티아가 딴죽을 걸었다. 세르비아에 빼앗긴 영토문제를 들고 나왔다. 아무래도 국경 인근 부코바르가 연방군에게 함락된 것이 극우 민족주의세력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더구나 국제여론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확신 한 듯하다. 이때 독일이 나서 더 떠들면 국제사회 전체가 손을 떼겠으니 알아서 하겠냐고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기세를 올리고자 흥을 타고 있던 크로아티아 극우세력이 마지못해 꼬리를 감춰야 했다. 


유엔평화유지군이 크로아티아 위험지역 셋을 골라 민병대 무장해제를 마무리 짓고, 그곳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이어가던 연방군의 철수가 시작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이처럼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비교해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온전하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7개월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1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무려 70만 명 난민이 발생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재래시장


 

그렇다면 세르비아로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전선을 옮겼다. 이곳은 이미 1991년 10월 세르비아인을 제외한 이슬람과 가톨릭들이 단합해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 2월 29일 국민투표에서 99.4% 찬성으로 이를 확정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긴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참가 자체를 거부하면서 향후 폭력을 예고했던 셈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발칸의 새로운 독립 국가들을 차례로 인정했다. 슬로베니아는 훨씬 이전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맞았고, 1991년 12월 연말을 며칠 앞두고 독일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자, 1992년 3월 미국과 유럽공동체(EC) 국가들이 잇따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는 물론 보스니아까지 독립을 인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인간백정 밀로셰비치의 살육은 이제부터였다. 


연방군은 밀로셰비치라는 걸출한 민족주의자 뜻에 순종하면서 전략에 대거 수정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막는 데 실패하면서 불쌍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불똥이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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