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역사
현대 들어 가장 추악한 보스니아 전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누구는 내전이라 거품을 물지만, 이는 국가간의 전쟁일 뿐이었다. 유럽의 킬링필드가 백주대낮, 그것도 유럽이라는 공간에서 버젓이 벌어진 현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생소한 나라의 역사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기실, 필자가 발칸반도에 대해 글을 쓰려고 무지무식하게 달려든 까닭은 이곳 '보스니아-해르체고비나' 때문이었다. 이 생소한 나라, 마치 지금 내가 밝히지 않으면 영원히 과거라는 어둠에 묻힐 것만 같은, 그래서 같은 폭력이 버젓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 1년 자료수집부터, 나로선 거금을 들인 두 번의 답사, 근 3년이란 세월을 이 글(발칸의 침략자들) 하나에 매달렸다. 비록 세상에 빛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여전히 수정 하며, 퇴고를 거듭하면서 자료를 찾고 또 미비한 구석을 찾아 역사의 현장으로 개나리봇짐을 싸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발칸반도 서부, 정식명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Republic of Bosnia and Hercegovina)'이다. 그 옛날 티토가 중심이 되어 세웠던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 6개 중 하나였다가 1992년 3월 분리 독립했다.
앞장에서 다루지 않았던 보스니아 땅에서 있었던 역사를 잠시만 언급하기로 하자. 나라 역사 자체가 이민족 침략으로 점철된 예나 지금이나 생각만으로도 가슴 아픈 사연이다. 보스니아, 나라 이름도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강을 보산테(Bosnte), 혹은 보스사우니스(Bosnius) 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성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딱히 스스로 결집할 수 있었던 시기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비잔티움제국 콘스탄티노스 7세가 쓴 《제국의 경영/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보스나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지방이 있다는 기록이 국명이 된 것이다.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 오스만터키가 지배하기 전까지 네레트바(Neretva)강 유역의 모스타르(Mostar)를 중심으로 남쪽 일대를 점령했던 헤르체그 대공 가문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방도 고대 로마제국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7세기 남슬라브족이 발칸반도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이들 부족이름을 앞을 흐르는 강 이름을 따 보스니아로 부른 것에서도 연유한다. 보스니아 지형상 정작 바다는 접해있지 않으나 아드리아해로 진출하기 좋은 길목에 있어 역사적으로 늘 주변국 먹잇감이 되어야 했다. 로마, 크로아티아, 헝가리,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비잔티움, 오스만트루크까지 순차적 지배를 받으며 이어온 보스니아는 말 그대로 정복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재차 이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면 온전히 후퇴하기보다 일부가 그곳에서 남아 삶의 터전을 이어왔으며 피정복민으로 변했다. 그곳이 고향이 되고, 이웃 따라 종교도 함께하면서 민족 간 가정을 이루며, 가문의 결속으로 이어졌다. 친교를 맺어가며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이 모여서 살았다. 이러한 역사가 재앙의 씨앗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민족구성이 다르다고 해도 피부와 얼굴, 생김생김이 대충 비슷한 인간끼리 상상이나 했을까. 솔직하게 표현하면 훗날의 폭력은 인근 나라, 즉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경쟁구도 속에서 이들 후손은 민족주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이었다.
보스니아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고대국가는커녕 12세기까지 버티면서 부족을 뜻하는 주페(Zupe) 단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최초에 부족이 통합한 것도 13세기 쿨린(Kulin/1180~1204)이 등장하면서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족을 통합하면서다. 이 역시 부족의 통합은 이루었다고는 하나 늘 비잔티움 정교와 로마 가톨릭 중간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필자가 자료에 근거해 보고밀교는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와 일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이 세상은 육신과 영혼의 대립,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신이 만든 영적 세계는 선하지만 물질세계는 사탄이 만들어낸 것으로써 금욕주의는 물론 물질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라고 설파했다. 심지어 구약성서도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써 예수의 부활도, 십자가도, 교단도 부정했다. 그러자 정교와 가톨릭사이에 끼여 구박받던 보스니아 사람들로선 선택하기 딱 알맞은 종교였다.
더구나 주페 쿨린까지 보고밀에 심취하면서 개종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영주와 귀족이 보고밀교를 받아들이자 하층민이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이로써 양대 기독교의 시각에선 이단이 탄생했다. 하지만 가톨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쿨린이 죽기 1년 전 가톨릭으로 재차 개종하기에 이른다.
쿨린이 죽자 보스니아 역시 후계구도를 놓고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1254년부터 보스니아는 각 도시 영주 반의 갈등국면에서 정치체제가 말이 아니었다. 허약해진 나라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이웃 헝가리가 아니었다. 헝가리가 보스니아 북부를 점령하면서 세르비아 북부지방을 합쳐 ‘마츠바-보스니아 공국’이라는 족보도 없는 나라를 만들어버렸다. 실상은 불가리아 침략으로부터 방어막이자 완충지대 역할을 이들에게 떠맡긴 것이다.
식민지배는 늘 학정을 가져오고, 필연적으로 혁명이 따른다. 이때 혁명세력은 보고밀교도를 중심으로 스테판 코트로마니치라는 인물을 지도자격인 반에 올려 그를 중심으로 헝가리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보고밀교가 민족항쟁의 구심점이었다. 코트로마니치는 보스니아 중 유일하게 아드리아해에 닿아 있는 네움(Neum, 혹은 흘룸Hlum)을 정복하면서 보스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접하는 감격을 맛본다. 네움에서부터 남쪽 몬테네그로 국경 헤르체고비까지 훗날 헤르체고비나(모스타르를 중심으로 발전)가 되는 지역이다.
지금도 크로아티아 땅인 아드리아해의 미항 두브로브니크에서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얼마 못가 보스니아 검문소가 나온다. 이곳이 네움이라는 곳이다. 그리고 연이어 아드리아해를 따라 북쪽 크로아티아를 향해 대략 10km 가면 크로아티아 국경이다. 여기까지만 바다에 접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네움이 작은 바다마을처럼 한적하고 소소한 풍경을 보인다.
특히 이곳에서는 보스니아 화폐 마르카와 크로아티아 쿠나, 세르비아 디나르, 유로화 등이 대부분 가게에서 통용되고, 계산법도 복잡하지만, 그곳 촌로나 상인들은 오랜 습성에 물들어선지 척척 잘도 해낸다. 큰 상점에서는 신용카드도 유통된다. 그러나 우리네 시골처럼 농부들이 손수 농사지은 과일이나 농산물을 사서 그곳에서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에서는 마르카를 사용해 주는 센스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코트로마니치 역시 헝가리 압정을 견디지 못해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코트로마니치 마저 쿨린의 뒤를 따르자 배교자를 지도자를 둔 보스니아 사람들은 갈등을 겪다가 새로운 인물을 선택한다. 그 이름도 세르비아의 불사신 이름과 같은 듀산(스테판 2세)이다. 보고밀교도 듀산은 보스니아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헝가리가 변수였다. 이때 듀산은 물론 코트로마니치마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듀산의 사촌 트브르트코(1353~1391)가 탁월한 리더십으로 중세 보스니아왕국을 세운다. 헝가리 종교 가톨릭에 대한 믿음은 상상이상이었다. 1370년 보스니아 유일한 해안 네움을 장악함과 동시에 이단을 처단하려고 했지만, 보스니아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결사항전 끝에 헝가리를 물리친 트브르트코가 보스니아 주인으로 등극한다.
트브르트코는 세르비아의 듀산 왕이 죽고 세르비아 네만야왕조가 단절되자 세르비아영토를 빼앗고 스스로 세르비아왕조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스테판 트브르트코라고 부르게 했다. 이로써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는 봉건영주 호칭 ‘반’을 버리고 독립왕국 국왕을 뜻하는 ‘크랄뤼(Kralj)’의 호칭을 쓴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1년 달마티아를 공격해 아드리아해 도시들을 영토로 흡수한다. 그리고 그는 크로아티아 내륙까지 쳐들어가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그 역시 불사의 몸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1392년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 왕국에서처럼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혼란을 거듭하던 중 오스만트루크제국 침략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보스니아는 오스만트루크제국 치하에 들면서 훗날 후손들이 종교가 다르다는 것, 살아왔던 땅과 역사가 조금 다르단 이유로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다. 보스니아는 비잔티움제국으로부터 12세기에,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에 각각 독립했다. 그리고 15세기 후반에 오스만트루크제국에 병합된다.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교류의 단절을 가져오면서 느슨한 종교, 즉 정교와 가톨릭의 접경지에 위치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맞다’는, 딱히 믿음에 명확한 경계가 없어지면서 보고밀교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보스니아교회’는 동방정교와 로마가톨릭에 의해 모두 이단으로 취급당하면서 종교박해의 원인이 되고, 뒤이은 오스만제국 이슬람으로 쉬이 개종이 늘어나는 토양이 된다. 보고밀교도는 그들의 교리와 비슷한 이슬람을 대부분 거부감 없이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오스만트루크 보스니아 점령은 점령이랄 것도 없었다. 헝가리의 로마 가톨릭과 비잔티움 동방정교 사이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은 역사적 기원에서 보듯 이슬람은 이들로부터는 갈채를 받았다. 더구나 이슬람 전통에 따라 종교적 수장이 세속적 특권까지 누릴 수 있다는 제정일치가 큰 매력이었다. 슬라브족 귀족들이 서둘러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하층민은 줄줄이 개종의 줄에 서게 된다. 더구나 이슬람제국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귀족들에게 토지와 봉건영주라는 초특급 지위를 안겨주면서 식민 지배력을 높이고, 이슬람교 확장이라는 꿈도 이루면서 말썽이 일어날 여지조차 없애버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본다. 발칸반도, 아니 유럽에 유일하게 이슬람교도가 있는 나라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명확해졌다.
▲ 몬테네그로 코토르. 1384년에 보스니아 왕국의 트브르트코에게 점령되었고 1391년에 그가 죽고 나서 독립했으나, 1538년에 오스만 제국군에 함락되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가톨릭이 승리한 이후 베네치아가 차지하는 등 질곡의 사연을 겪은 항구다.
보스니아에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면서 보스니아가 에니체리의 주 생산자원이 된다. 이곳 젊은이들은 술탄 친위대 에니체리를 통해 출세를 꿈꿨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정교와 크로아티아계 가톨릭은 기세가 쪼그라들긴 했지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잔존하고 있었고, 특히 세르비아에 살아가던 정교도가 오스만제국 압제를 피해 보다 느슨하게 통제하던 보스니아로 이동해오면서 인구비가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훗날 삼각 갈등의 편제가 구축된다.
한편 세계가 오스만트루크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으로 양분되면서 두 제국 간 툭하면 싸움이 벌어졌다. 전쟁터 중심에 보스니아가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없다. 발칸반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을 그어서 위로는 합스부르크, 아래로는 오스만의 영향아래 놓였던 까닭이다. 이 땅의 잦은 전쟁은 가톨릭교도들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만들기도 했다. 상대적 비율이 줄어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18~19세기로 오면서 오스만터키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면서 1875년 보스니아 농민 반란은 러시아와 오스만터키의 잦은 전쟁으로 촉발된다. 엉뚱하게도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는 러시아의 노력은 세르비아에게 독립공국 지위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거듭 반복 하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이 1878년 베를린회의 결과로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면서 대세르비아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를 기회로 민족주의를 실현하려는 세르비아 블랙핸드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들의 사주를 받은 보스니아 태생의 19세 세르비아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사라예보에서 암살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 뒤 보스니아는 슬라브민족 최초의 통일국가가 ‘유고슬라비아’가 만들어질 때 함께 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 티토의 등장, 티토가 죽은 뒤 밀로셰비치와 연방군의 동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과 이를 저지하기위한 유고 내전이 발발했다. 보스니아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이슬람과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계가 힘을 모아 1992년 3월 독립을 선언하고, 유럽공동체와 미국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졌다.
그러나 갈 길은 너무 멀었다. 옆에서 콧김을 푹푹 내쉬며 가슴에 불덩이를 안은 세르비아계가 단체행동을 하기 시작했고, 크로아티아에서 물러난 연방군은 물론, 밀로셰비치의 개들과 블랙핸드 찌꺼기 세르비아 민간 게릴라들이 보스니아로 잠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