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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May 21. 2024

보스니아 내전이란 이름의 살육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



살육의 전초


나치와 파시즘처럼 배타적민족주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도 집단으로 미친 시대였다. 찰스 맥케이가 《대중의 미망과 광기》에서 한 말이다. “인간은 무리지어 생각하는 동물이다. 미칠 때는 집단으로 미쳤다가 제 정신으로 올 때는 한 사람씩 천천히 온다.” 혹자는 돌아올 때 가장 앞서 오는 자가 선지자라고 한다.


이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비극은 예견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이 이를 간파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살육이 시작된 이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와 비교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까닭이 있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보스니아의 이슬람에 원인이 있었다.


미국과 서구 유럽이 이슬람과 역사적 영원한 적으로서 대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베리아반도 이슬람제국의 건설과 십자군전쟁을 비롯해 메메트 2세의 비잔티움정복, 오스만터키제국 쉴레이만대제의 베오그라드 함락에 이어 헝가리 공략,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공략으로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수 없는 이민족으로 변했다. 오스만터키의 발칸지배는 유럽의 자존심에 큰 치욕을 남겼을 법하다.


사라예보 이슬람모스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같은 남슬라브민족이다. 그러나 역사의 화판 위에서 어떤 그림을 그려왔느냐에 따라, 또 믿음을 무엇 하느냐에 기준하여 인종과 민족을 분리하고 있다. 즉 문화적민족주의의 엉뚱한 분식회계의 지독한 민족주의 악취가 풍기고 있다.


한반도의 약 25%에 해당하는 땅에 살아가는, 인구 390~400여만 명(보스니아 전쟁 이전에는 435만 명이라는 통계도 있음) 중 민족분포에서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보슈냐크인) 48%,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31%, 로마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17% 등 세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진실을 뒤로한 채 민족의 뿌리를 두고 설전을 펼친 내용을 살펴보면 우습고도 슬프다.


이곳 유럽에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뿌리가 누구로부터 어디서부터 생겼냐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기실 따질 것도 물어볼 것도 없지만, 당시 각각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들이 서로 밀리지 않으려는 속내를 알 수 있다.


크로아티아의 주장이다. “보스니아 지방에 보고밀교가 유행할 당시 크로아티아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보고밀교도를 믿고 있었으며, 정교와 가톨릭의 박해를 받던 중 터키가 점령하자 자연스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따라서 이슬람을 믿는 사람을 합쳐 보스니아 인구 65% 이상이 크로아티아인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더 웃기는 쪽은 세르비아다. 윗글에서 크로아티아를 세르비아로만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 억장이 무너지도록 한 줄 덧붙였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 역시 자신을 크로아티아계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르비아인이다. 왜냐하면 16~17세기에 많은 세르비아인이 보스니아로 이주했으며, (이유는 알 수 없으나)이들이 정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고로 지금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스스로 믿는 자들은 실상은 우리와 같은 세르비아인이니 정신 차려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보고밀교 기원은 온데간데없어 이슬람을 믿는 이들이 기가 막혀서 입을 열었다.


“헛소리들 마라! 우리는 원래가 아나톨리아에서 이민 온 터키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슬라브족 요소라고는 언어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유고연방 여섯 민족 중 한 민족임을 자부했다. 사실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보스니아 사람 중에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기타 다양한 민족 구성이 형성되어 있어 기실 인종적인 구분은 의미가 모호하다.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략은 자연적 민족과 민족 간 혼인이란 결속으로 맺어졌다. 따라서 종교적 집단으로서 구분만이 가능한 보스니라란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이슬람부흥운동으로 기질을 꺾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어쨌거나 그런 와중에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려는 세르비아인계가 거부한 가운데 이슬람과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계가 손을 잡고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무려 99.4%의 찬성으로 끝나면서 1992년 2월 29일 드디어 독립을 선언했고, 독일을 위시해서 유럽공동체 EC까지 승인함으로써 일단락되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 아니라, 세르비아로서는 참을 수 없는 폭거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세르비아인 31%가 살아가고 있다면,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모든 땅은 세르비아 땅’으로 둔갑할, 14세기 스테판 듀산이 거느렸던 거대한 영토가 세르비아제국의 꿈이 영글어야 할 땅이었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또한 힘을 모아 우리끼리 독립을 선언하노라! 외쳤다.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유럽공동체에서 이들의 독립 선포에 “그래 너희도 승인한다.” 했다.


폭력을 부추긴 책임은 유럽이나 미국도 막중하다. 보스니아에 살아가는 세르비아계가 독립하면서 본국 세르비아와 합치려는 의도를 진정 모르고 한 소리였을까. 아니면 대충 귀차니즘으로 인해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을까.


20세기 인류사에 가장 잔인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수치스런 전쟁이 이렇게 막이 올랐다. 내전 초기 1년 동안 13만 명이 희생당한 보스니아 전쟁은 1995년 끝나기까지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일 년 내에 희생되었다. 그만큼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종교와 역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여자와 어린아이가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도. 거물처럼 붉은 점선 왼쪽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오른쪽이 세르비아 인들이 살아가는 스릅스카 공화국이다. 2024년 현재도 한 지붕 세 가족이다.

* 일러스트 박진서.





보스니아 내전이란 이름의 살육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 보스니아 분쟁은 사실 명칭부터 명확하게 해야 한다. 보스니아 내전, 보스니아 분쟁이라고 하지만, 보스니아 전쟁이 맞다. 내부 갈등으로 촉발된 듯하지만, 세르비아 연방군과 크로아티아 방위군의 전격적인 지원 아래에서 이루어진 침략전쟁이자, 가장 악랄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대 이슬람을 겨냥한 인간사냥이었다.



세르비아만이 가해자가 아니다. 크로아티아 역시 보스니아에 씻지 못한 상처를 남겼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핵심은 보스니아를 손에 넣어야 완성된다는 전제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래저래 보스니아는 두 극우민족주의 이빨 앞에 매우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발칸반도 내에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어우러져 상대적으로 불안한 나라, 물과 기름처럼 민족주의라는 부유물까지 둥둥 떠다니는 가장 만만한 땅이었다. 따라서 표기방식만 다를 뿐 언어가 같은 인간들이 종교로 민족을 가르는 가당키 짝이 없는, 그야말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기특하기 한량없는 인간들이 살육을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자행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편안한 얼굴로 공장에 출근하던 옆집 아저씨가, 저녁이면 손에 과일 봉지를 들고 인사를 건네던 앞집 아저씨가 총칼을 들고 살육의 현장을 미친 듯 뛰어다녔다. 얼굴에 붉은 피를 훈장처럼 흩뿌린 채 말이다. 학살은 낯모르는, 처음 보는 인간에 의해 자행되기도 했지만, 이처럼 어제까지 벗이었고 함께 취미를 가지며 즐기든 이웃이 갑자기 군복을 입고 나타나 총칼로 살육에 앞장섰다.


목을 자르고, 재물을 약탈하고, 이웃에 살던 부인과 딸을 강간해 임신시켰다. 이들은 자민족 세르비아계라도 이웃을 죽이라 종용한 후 거부하는 사람은 배신자의 멍에를 씌워 죽인 후 함께 불태웠다. 물론 세르비아인으로서 보스니아 장군이었던 요반 디뱌크(Jovan Divjak,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군 부사령관)처럼 살육에 대항해 싸운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체포당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을 찍은 뒤 보란 듯 공개처형 당했다.      



소름 돋는 살육 과정을 알아보자. 보스니아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슬람계)이 세 민족이 느슨한 연합형태인 국가체제로 가자며 눈물로 제안했다. 세르비아계 대표 라도반 카라지치가 협상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1991년 11월 세르비아인만의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고연방잔류를 결정해버렸다.


대세르비아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크로아티아 종전을 맞아 유럽공동체는 보스니아로 확전을 우려하면서도 대체로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1992년 2월 보스니아 정부는 유럽공동체의 의견을 받아들여 연방잔류 결정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슬람과 크로아티아계 측은 분리 독립을 이룰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세르비아계로서는 연방잔류를 결정한 이후에 국민투표를 인정할 수 없었다. 투표당일 예상대로 세르비아계가 기권하면서 법정 정통성을 훼손해버렸다. 이들 민족 간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전쟁불사’를 외치며 폭력이 수순인 듯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충돌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시작은 미미하다. 보스니아에 살아가던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계가 독립을 위한 투표 다음날인 1992년 3월 1일에 일어난 일이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살육의 서곡, 예식장에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오던 하얀 정장차림의 한 사나이가 세르비아국기를 흔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총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청년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누가 왜 어디서 쏜 것인지 훗날에도 밝혀진 바가 없다. 단지 막 새로운 삶을 꿈꾸던 청년, 또한 세르비아인이 죽었단 이유로 날개를 단 소문이 보스니아를 넘어 세르비아까지 전해졌다.


보스니아 이슬람 군대(보스니아 사라예보 박물관)




대세르비아주의를 위해서는 자국민 한 명, 그것도 특별한 날에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지금까지 이들의 행태를 보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당연히 크로아티아인, 혹은 이슬람인이라고 단정한 세르비아인들이 거리로 쏟아지면서 보스니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들 무장 민병대는 검은 복면을 하고 움직이는 모두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실로 드미트리예비치 대령의 ‘블랙핸드’가 부활해 이 땅에 죽음의 피를 뿌렸다. 죄 없는 주검에 그 누구도 책임지는 이 없는, 말 그대로 무법천지로 변했고, 서방의 언론은 그제야 눈을 돌렸다.


사라예보 주둔 유고연방군은 마지못해 병력을 시내 전역에 깔아 만 24시간이 지난 후 사태를 수습하긴 했으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잡한 종교와 인구 구성을 잘 알고 있었던 유럽공동체는 중재를 위해 3자 협상테이블을 마련하면서 평화와 비폭력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보스니아는 폭풍전야, 정지해 있는 것은 독을 품거나 살기를 띠고 있는 것! 고요함이 엄습하면서 상상 이상의 그 무엇이 일어날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도시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보스니아 서북쪽 크로아티아 접경지역 보산스키 페트로바츠에서 본격적 서막이 열렸다. 세 민족이 골고루 분포해 살고 있는 지역, 비교적 평야지대로서 비옥한 땅에 사는 사람들 역시 기질이 온순하고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3월 말, 세르비아 민병대가 느닷없이 크로아티아인과 이슬람교도가 힘을 합쳐 세르비아계 주민 15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변명을 하거나 부정할 기회조차 없었다. 응징차원이라 하면서 시내를 향해 박격포탄을 무차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 스스로 ‘보스니아내전’의 시작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닥치는 대로 살인과 강간,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고, 순식간에 조용하던 보산스키는 인간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울렸고, 피눈물을 뿌리는 절규가 땅을 잠식했다. 따라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 동북부 비옐리나를 점령을 시작으로 비셰그라드와 포차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이들 뒤에는 세르비아가 있었다.


1992년 4월 초, 이때까지만 해도 보스니아에 주둔해 있던 유고연방군이 방관적 자세로 어느 정도는 중립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공동체는 보스니아 독립을 하루라도 빨리 승인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로 착각하면서 서둘러 독립국으로 승인해버렸다.      


그러자 연방군이 일주일만에 본격적인 공세로 돌아선다. 명목은 보스니아에 살아가는 세르비아인의 보호와 생활안정이었지만, 더 너머 대세르비아민족주의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굳센 의지였다. 이 시점이 크로아티아에서 살육전으로 주검의 활약을 펼치던 밀로셰비치가 기르던 개들이 보스니아로 투입된 시기와 맞물린다.


밀로셰비치의 개들은 곧바로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국경과 인접해 있는 비옐리나를 점령한 후 이곳을 거점지역을 삼았다.


그리고 연방군의 전격적인 지원 아래 세르비아 민병대가 본격적으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보스니아 내에서 살육, 강간, 방화가 전쟁터 구분 없이 이루어졌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종교란 이름으로 이슬람교도 인종청소가 자행되었고, 이슬람교도 여성을 강간해 세르비아인 아이를 배게 함으로써 이슬람의 씨가 세르비아 정교도로 바뀐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도무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났다.            




* 글을 수정하며 실수로 발행을 눌렀더니 라이킷 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죄송하게도 삭제할 수밖에 없어 글벗님들 클릭까지 날아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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