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최악의 시절
* '보스니아전쟁' 출처 Wikimedia Commons 작가 아담 존스(Adam)
여기서 잠시 밀로세비치의 개들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는 블랙핸드 개를 사육하기 위해 친구를 이용했다. 보스니아 전쟁당시 베오그라드 축구구단 구단주이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즉 일명 ‘아르칸’이란 놈이다.
그는 권력의 핵심인 밀로셰비치 수족노릇을 자처하면서 비밀경찰과도 친분관계를 쌓으며 부를 축적했다. 당연히 밀로셰비치의 암묵시적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대담하게도 ‘아르칸의 호랑이’란 이름으로 신문광고를 통해 양아치들을 모집했다. 이때 폭력 전과자와 오갈 데 없는 실업자, 깡패 등 2만여 명이 몰려들었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인간백정 군사훈련을 시킨 뒤 이른바 블랙핸드의 개, 즉 밀로셰비치의 개들을 조직했다.
세르비아 경찰은 물론 유고연방군까지 살상 무기를 지원하여 중무장시킨 후 보스니아에 들어가 조직적으로 학살과 강간, 약탈을 이어가도록 이들을 앞장세웠다. 아르칸은 그가 키우는 호랑이와 함께 공공연히 등장하면서 세를 과시하곤 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 꼴로 이슬람여성 수용소에 갔다. 그녀들은 거의 매일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어디서 잡혀온 것인지도 모르는 이슬람 여자들이 항상 넘쳐났다. 언제든 열쇠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골라 강간하고 죽였다.”
“그동안 저지른 짓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밤이면 악몽을 꾼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 식은땀이 흐른다. 잊으려고 애를 써도 할머니 뒤로 숨던 빨간 옷을 입은 꼬마가 지워지지 않는다.”
세르비아 민병대를 취재한 〈뉴욕타임스〉 1993년 7월 24일자에 실린 인터뷰기사 내용 중 일부다. 보스니아 분쟁 당시 노점상으로 연명을 이어가던 스물한 살 세르비아 청년이 어떤 연유로 성전을 빙자한 악마가 되었을까. 그는 모두 여덟 차례 아녀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밝혔다. 모두 3~40여 명의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를 죽였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계속되는 세르비아 방송에 의해서였다.
이 선동문은 지난 날,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괴뢰정부 우스타샤에 의해 자행된 학살로 세르비아인 35여만 명이 희생되었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방송은 또 이때 당시 세르비아의 왕 알렉산다르에 의해 핍박받던 무슬림도 세르비아인 학살에 동참했었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세르비아의 계획된 음모에 무던했던 청년들은 하늘에 정의의 용사로 맹세하면서 악마의 전사로 거듭나게 했다.
이들 목표는 단 하나, ‘인종청소’로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천국의 열쇠를 받는다는, 절대신 당신이 해내지 못한 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대신 해냈다는 의기로 뭉친 ‘신의 군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인간 주검의 값은 형편없었다. 세르비아민병대 지휘관으로부터 이슬람교도 한 명을 죽이는데 대한 대가로 6달러 50센트를 받았다. 말 그대로 인간도살장은 21세기를 앞두고 버젓이 문명대륙 유럽 한 귀퉁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경쟁했다.
* 밀로셰비치의 개들 자칭 '아르칸의 호랑이' 세르비아 민병대. 이들은 크로아티에서 보스니아로 진격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에 앞장선다. 아르칸은 FK Obi축구 구단주였으며, 당을 창당하면서 의원까지 지내다 호텔에서 경찰훈련생에 의해 피격당해 죽는다.
한 마을을 샅샅이 뒤져 이슬람교도를 사냥하며 100여 구의 시체는 한꺼번에 기름을 부어 불태우는 것은 신사에 속했다. “살려달라”며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용광로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
세르비아 밀로셰비치 작전은 더럽고도 추악했다. 최소한 군법 규제조차도 받지 않을 민병대가 날뛰길 부추기면서 약탈, 강간, 학살의 선봉에 서게 했다. 사라예보 근교 이슬람여성 수용소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강간당한 여성이 죽음을 맞아야 했다. 때를 기다리는 그들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인터넷에 보스니아전쟁만 입력해도 무수히 많은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더욱 경악케 하는 것은 이들은 학교는 물론 저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모스크에 ‘강간공장’을 만들었다. 가임기 무슬림 여성을 이곳에 몰아두고 집단 강간을 해서 혼혈아를 임신시켰다. 이슬람에 세르비아 정교도의 씨를 뿌리라는 성전(性戰?)의 행위였다. 아이를 배게 한 후 낙태가 불가능하도록 달을 넘길 때가지 가둬놓고 아이를 낳게 했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도 씨가 탄생되면 당연히 이슬람은 종말을 가져온다는 단순하고도 무지막지한 종교철학이었다. 그들 표현대로 무슬림의 더러운 핏줄을 신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성노예로 만들어 이들의 신앙까지 짓밟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계획적인 범죄가 버젓이 행해졌다.
더 많은 사례가 있지만, 도무지 쓸 수 없어 접는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이 저지른 일은 하늘도 입을 다물었을 법했다. 신이 정말 인간을 창조했다면 이 모든 고통은 신의 책임이다.
당시 유럽 언론이나 혹자들이 이 소문이 도무지 인간에 의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며, 진실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의문을 비웃듯,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민족을 위해, 또 매번 인간에게 ‘네 믿음을 증명해 보이라’며 실험에 들게 하던 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집단행동으로 옮겼다.
보스니아 출신의 야스밀라 즈바니치(Jasmila Zbanic)가 제작한 영화 《그르바비차》가 이때 사라예보 전쟁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사라예보 그르바비차 마을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대사 중 딸 사라가 전쟁 영웅으로만 알고 있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 엄마 이스마에게 묻는다.
이 평범한 질문이지만, 그야 말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사다. 세르비아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 여성 수용소에서 세르비아인에게 강간당해 낳은 아이 사라. 슬픈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이스마는,
“응? 넌 머리카락을 닮았어.”했다.
사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쓸어내린다. 그러나 결국 이스마의
“넌 나를 닮았어.”의 지문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슬로베니아가 완전한 독립 후 크로아티아 내전이 꾸준하게 이어지면서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던 데 반해 세르비아는 연방군을 필두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병대에 막강한 화력과 자금을 대며 살육을 독려했다.
더구나 유엔이 확정한 유고내전 중 무기금수 조처는 분쟁 당사자들 사이의 화력에 극심한 불균형을 가져왔다. 세르비아민병대는 밀로셰비치가 탱크와 장갑차 등 끊임없이 무기를 지원했던 반면,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와 이슬람교도들은 내전이 터지고도 3년이 넘어서야 겨우 무기다운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민병대와 비교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밀로셰비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몬테네그로와 코소보까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갈 판이었다. 더구나 국제여론이 자신을 향해 있었고, 또한 보스니아를 빠른 시일에 제압하려면 힘을 한곳으로 모아야 했다.
밀로셰비치는 1992년 4월 27일 새로운 공화국을 선포하는데 이름이 ‘새로운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이다. 이전의 국명에 새로울 ‘신新’자만 하나 더 붙였다. 이 공화국은 세르비아를 위시해 몬테네그로, 코소보, 보이보디나가 포함되었다. 세계 언론의 표현처럼 이전보다 행색이 쪼그라졌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크로아티아 땅에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1/3을 확보(나중에는 대부분 다시 빼앗겼지만)했다고 자평했고, 보스니아는 무려 60% 가까운 지역을 세르비아 민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밀로셰비치의 뜻대로만 된다면 거대제국(?) 아니, 거대한 땅덩어리가 자신이 주체가 된 대세르비아민족주의의 깃발아래 헤쳐 모이게 될 것이었다.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드리나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보스니아 즈보르니크까지 진출했고, 일부는 드리나강을 끼고 있는 도시 비셰그라드와 보스니아 남쪽 포차 지역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하긴 현재에 비셰그라드와 즈보르니크는 엄밀히 말해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도 스롭스카공화국에 속하니 당시 살육으로 얻은 잔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밀로셰비치는 학살의 주범을 문책한다는 구실을 걸고 강경파를 물러나게 하고, 지도부 40여 명에 대해 인사를 단행하면서 대내외에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5월 19일 ‘연방군 포고령’을 내린다. 기세 좋게 “유고연방군과 세르비아민병대는 전투를 그만두고 물러나라”했다.
이 말을 따르거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면피용이란 사실을 본인도 알고 남도 알고, 연방군도, 민병대도 알고, 유럽도 알았다. 보스니아 살육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신이 벗어나기 위한 술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보스니아 주둔 연방군은 신유고연방이 출범하면서 졸지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군대로 변신술을 선보였고, 덕분에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의 연방군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고 서구에 호소하는 연기를 펼치느라 진땀을 흘렸다. 이로써 연방군 5만과 세르비아민병대 등 도합 8만 명에 이르는 폭력집단이 보스니아에서 지대한(?) 활약을 펼치게 된다.
1992년 5월부터 유럽공동체를 비롯해 미국 등 서방세계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중심으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병대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세르비아에 경제 분야 등 단계적으로 제재가 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크로아티아 편을 드는 독일에 불만이 많았던 프랑스가 발목을 잡으며 삐거덕 거렸다. 하지만 독일편으로 돌아선 영국으로 인해 프랑스 주장은 대부분 무시되면서 제재가 시작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결정한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였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 까닭은 국제하천 도나우강을 통해 필요한 물자들이 세르비아로 들어가고 있었다. 국제하천법상 어떤 선박도 조사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스 등 세르비아 국경에서 밀거래가 왕성했다. 이들은 폭력은 반대한다면서도 인간적,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며 하나마나한 소리를 지껄였다. 모든 것은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경제논리였다. 타인의 죽음은 멀고, 이익은 가까웠다.
세르비아 북쪽도시 노비사드의 도나우강. 국제하천 도나우강을 통해 유럽공동체의 세르비아 제제를 비웃듯 물자를 수출하고 있었다. 국제하천법상 어떤 선박도 조사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스롭스카공화국, 헤르체고비나 경계 구분) 현재도 같은 공화국이면서 세 민족이 살아가고 있다. 스롭스카공화국은 세르비아인이 대부분이라 세르비아어가 통용되고 정교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로 공중전화 카드는 물론 교통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일러스트 박진서)
한편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선출한 대표, 즉 보스니아의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계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대통령격인 고란 하지치, 그리고 세르비아 민병대 게릴라들이 뽑은 의원들이 한 장소에 모여 통합하겠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스릅스카공화국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지는 장면이다. 그들이 내건 조건대로 통째로 세르비아와 합치면 대세르비아주의가 절반 이상 성공이었다. 이들은 보스니아 전쟁 막바지인 1995년 데이튼 협정까지 질기게 이어지면서 밀로셰비치와 갈등도 빚고 동지애를 나누면서 마치 칼로 물 베기 하듯 재미 들어 그렇게 살았다.
크로아티아가 이를 구경만 할 까닭이 없었다. 곧바로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공화국’이라는 길고 긴 국명을 지어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의 독립국을 선포해버렸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세 명의 선수가 동시에 링에 올랐다.
1992년 4월 4일. 민병대 사령관 락토 믈라디치 장군의 지휘아래 사라예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트레베비치산 등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포격을 날리는 등 본격적으로 사라예보 봉쇄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