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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un 04. 2024

사라예보 봉쇄 1425일

집단으로 미친 시대

  사라예보 시내 / 비가 오락가락한다.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속에 축축하게 젖어드는 감출 수 없는 눈물 같았다




1992년 4월 4일 동양식으로 보면 불길한 숫자 4가 둘이나 든 날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가 사라예보 남서부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초토화시킨 뒤 민병대 사령관 락토 믈라디치 장군의 지휘아래 사라예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트레베비치산 등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했다. 본격적인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라예보 시내를 관통하는 밀랴츠카 강의 남쪽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라예보 시민들이 보스니아 독립과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무장한 세르비아 민병대가 몰려오자 몸으로 막아섰다. 


이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호텔 홀리데이를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 저격수에 의해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첫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 흩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기갑부대를 위시해 중화기로 무장한 1만3천여 명의 세르비아군대(이전의 유고연방군)가 사라예보를 포위하기 시작하면서 1425일간 봉쇄 첫날이 시작됐다. 


1992년 5월 25일 세르비아군은 본격적으로 사라예보를 공격했다. 7만 여명의 보스니아 지역방위군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열악한 무기수준으로 세르비아 민병대와 전면전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계속된 포격과 공격으로 세르비아 포위를 뚫기 위해 노력했으나 밀랴츠카강 남쪽 시내 곳곳에 포진된 저격수와 장거리포로 무장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미국을 비롯해 유럽공동체가 평화적 해결 운운하면서 발 빠르게 움직이는 듯 부산을 떨었으나 이슬람 국가라는 본능적 종교관에 의해 미적댄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보스니아 사라예보 공항에서 라틴브릿지를 향하다 약 5km 떨어진 곳의 건물이다당시 보스니아군의 사령부로 사용되던 이곳은 여전히 상흔이 남아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출입구에 비둘기 출입금지’ 그림이 인상적이다그 앞의 광고판과 이상하게 어우러진다.(두 번의 사라예보 방문에 우연하게 두 번을 만난 건물이다. 그래선지 이상하게 관심이 가고, 사진을 볼 때마다 더 아프게 다가오곤 한다)




세르비아도 이 대목에서 확신했다. 포격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찾으면서 사라예보 곳곳, 어디든 마구 쏘아댔다. 그리고 결국 1896년에 개관한 오스트리아 양식 건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 도서관’도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 이 포격으로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오스만터키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역사적 원전이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화재진압을 위해 달려온 소방관들조차 저격수에 의해 희생되자 손을 털어야 했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트레베비치산 정상까지 놓여 있어 10여 분 타고 올라가면 사라예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 확보를 한 세르비아민병대는 박격포와 저격수의 전진배치가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화력으로 보아 이들은 사라예보를 접수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던 것은 다분히 국제적 여론을 의식했다. 이슬람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이곳을 점령해버리면 무자헤딘 같은 이슬람 게릴라들이 산발적 전투에 개입하면서 긴 시간 소모전을 펼칠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이웃 이슬람국가로부터 지원의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은밀하게, 누가 보더라도 상황에 맞게 국토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1896년에 개관한 오스트리아 양식 건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 도서관’도 파괴를 피하지 못했다. 이 건물은 정전 후 새롭게 지은 것이다



“우리 후손에게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역사를 불태우는 짓은 헛수고’임을 경고한다.”, 


2014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도서관 재개관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AP통신이 송출한 영상에 10살 쯤 되어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세르비아 저격수의 총탄에 맞고 사망하자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규는 도무지 눈물을 참아가며 끝까지 볼 수 없다. 이처럼 세르비아민병대는 밀랴츠카강 남쪽 산간지대를 요새로 점령하고, 높은 건물을 확보해 북쪽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저격수의 가시거리에 딱 들어온 북부는 말 그대로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밤이라고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기관총과 박격포로 중무장한 세르비아빈병대는 대부분 밤에 포격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이슬람이 먼저 공격했으므로 방어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뿐이라며 둘러댔다. 이 낯 두꺼운 변명은 밀로셰비치를 흡족하게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하면 저절로 항복할 거라 믿었을 법했다. 자신은 도덕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자신했을 수 있다.      



 사라예보 건물 곳곳에 난 총탄자국이 당시의 긴박함을 증언하고 있다제몫을 다하지 못한 죽음의 총탄자국이 이제는 상처가 아닌 삶의 무늬로 아로새겨진 보스니아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라예보는 그야말로 죽음이 가라앉은 도시였다. 식량부족은 당연했다. 식수와 전기마저 끊겨버렸고, 상하수도가 마비되면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참는 것이 아니라 견뎌야 했다. 의사도 횃불을 밝혀 희생자를 치료해야 했다. 달려야 살 수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저격수가 쏜 총알이 내 몸에 박힐지도 몰랐다. 유엔 평화유지군 장갑차 뒤편에 몸을 숨겨 따라 달려야 했고, 간혹 저격수를 향한 대응사격을 틈타 도망치듯 몸을 숨겨야 했다. 


또 밤이면 포격에 몸을 떨어야 했다. 어디에 포탄이 떨어질지 박격포를 무차별 쏘아대는 세르비아민병대조차 몰랐고, 사라예보 시민도 몰랐다. 지금도 사라예보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건물의 총탄자국과 포탄에 의해 파괴된 채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흔적들이 대부분 건물에서 확인 된다. 제몫을 다하지 못한 죽음의 총탄자국이 이제는 상처가 아닌 삶의 무늬로 아로새겨진 보스니아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라예보의 가장 큰 시장 마르칼레에 대한 포격으로 이 포격으로 민간인 68명이 죽고 150여명 크고 작은 부상자가 생겼다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재차 폭격으로 37명이 죽고 75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어느 순간부터 연방군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민병대가 숨고르기에 들어간 듯했다. 1993년 7월 23일 포격도 몇 달 멈추었고, 소강상태가 이어지면서 사라예보 시민은 비록 고립된 상태이긴 해도 친지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시장을 보러 나왔다. 그때였다. 이들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 응답하듯 한 발의 포성을 시작으로 16시간에 걸쳐 3777발의 포탄이 사라예보 시내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세르비아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민병대 소행이었다.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포격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죽음을 맞이한 이 사건 때문에 국제적 여론도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94년 2월 5일 토요일 오전 11시 경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시내 한 가운데 수십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공격당한 곳이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시장 마르칼레였다. 지금도 라틴다리에서 뒤로 굽어들면 포격에 파괴된 시장건물이 당시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간직한 있다. 입구에 레스토랑이나 상점 몇몇이 문을 열고 불을 밝히고 있지만, 해가 떨어진 후의 이곳 모습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세르비아 민병대 잔악함이 또다시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포격으로 민간인 68명이 죽고 150여명 크고 작은 부상자가 생겼다. 당시 영상을 살펴보면 아비규환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길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주검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부상자들, 평화유지군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그날 폭격을 당했던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가톨릭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앞으로 지난날을 잊지 말자는, 아프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민병대가 쏜 포탄이 떨어진 곳에 그때의 상징 일명 ‘사라예보의 장미’가 있다. 악몽과도 같은 시련과 고통을 견뎌 온 사라예보는 처연하게도 사람들에게 평화의 향기를 호소한다. 사람들은 알고도 모르고도 그곳을 밟고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다닌다. 애써 마음의 눈을 감고 지나치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이 가까이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당한 인물을 추모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이름 붙은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폭력이 일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기도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지 말자는 역사가 주는 교훈인 아우슈비츠와 같은 현장을 부(負)의 유산, 혹은 부정적 유산이라고 한다. 이를 ‘다크투어리즘’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라예보의 장미 / 사라예보 가톨릭교회 앞 사라예보의 장미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붉은 색으로 매워놓았다뒤에 보이는 은회색 조각상은 전쟁 당시에 평화를 위해 노력한 요한바오르 2세를 위해 보스니아 시민이 모금해 만들었다.     




세르비아민병대의 포격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두 번 포격으로 재미(?)를 본 세르비아 민병대는 1년 6개월이 지난 1995년 8월 28일, 또 한 번 포격이 시작되고, 똑 같은 장소, 마르칼레 시장에 떨어지면서 37명이 죽고, 75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서방세계가 중재를 앞둔 시점에서 유엔 대변인은 “남쪽에서 날아온 한 발의 120mm 박격포탄이 시장에 명중하여 발생한 참사”라고 규정하면서 세르비아 민병대의 주둔지역에서 쏜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르비아민병대가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자충수를 두었다. 이들 저격수가 심심하던 차에 유엔평화유지군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면서 사망자가 늘어났다. 유엔 용도무용론이 제기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NATO)가 개입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사용 여론이 빗발쳤다. 국제사회 평화적 노력 등 씨알도 먹히지 않는 하찮은 말만 늘어놓으며 의지 있게 참던 중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특히, 마르칼레시장 2차 포격 당시 파리에서는 평화 회담이 준비되고 있던 중이었다. 평화적 해결 운운하던 유럽을 비웃듯 창졸지간에 발생한 포격으로 다시 한 번 서방세계가 농락당했다. 결국 3년간 이어온 평화적 중재에 마침표를 찍고 세르비아 민병대를 무력으로 압박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를 위해 나토(NATO)의 주도로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 막이 올랐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포격을 시작으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군 거점지역 등 한 달간 공습이 이어졌고, 비로소 천하무적 세르비아 민병대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결국 1995년 11월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 패터슨’ 공군기지에서 ‘데이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 더럽고, 추악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데이튼 협정이 체결 된 뒤에도 이들은 금방 봉쇄를 풀지 않고 끝까지 치졸한 모습을 보였지만 말이다.      


미국과 서구세계가 한눈을 파는 사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기실 미국이 정신을 차리게 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미국은 늘 그래왔듯 공습에 앞서 종전 협상에 나섰다. 1995년 8월 미국 측 협상대표가 사라예보로 향했다. 대표단 일행은 봉쇄를 뚫고 사라예보로 들어가기 위해 험준한 발칸의 산악도로를 통해 사라예보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에 세르비아민병대의 공격을 받아 대표단 일행 중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미국 대표단 리처드 홀브룩이 사라예보로 들어간 그날 사라예보 마르칼레시장에 포탄이 떨어졌던 것이다. 


지난 일이지만, 일 년만 일찍 시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르비아민병대의 봉쇄를 견디다 못한 사라예보 시민은 땅굴을 팠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하 굴 길이는 삶의 연장을 위한 터널이었다. 그리고 1993년 6월 어느 날 시 외곽 나토군 주둔지까지 길이 2.7㎞ 땅굴이 완성되고 개통(?)된다. 이 땅굴이 바로 ‘사라예보의 터널’이다. 이 지하 통로를 통해 봉쇄 기간 중 매년 평균 1800만t의 식량이 사라예보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무려 50만 시민을 기아로부터 살려낸 삶의 터널이었다.


세르비아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3년간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희생당한 사라예보 시민은 11,541명으로 집계되었다. 총알은 어린아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노약자 포함 무려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가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부상자는 5만 명을 넘었다. 



부디 그들이 믿는 천국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린 영혼의 맑고 순수함이 지금 이 세상에 전해졌으면 참 좋겠다.      


각설, 사라예보 공항에서 시내까지 6km 남짓 걸어서 가본 적이 있다. 들어가는 간선도로 주변은 내전의 포화를 생생하게 증언하며 서 있는 건물들을 군데군데 만날 수 있다. 특히 보스니아군사령부로 사용된 7층 건물이 집중포화를 받았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흉물로 남아 있다. 부서진 벽,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창 대신 낙서로써 평화를 간절하게 원한다. 때론 원한에 사무친 글들도 눈에 띈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비둘기 출입금지’ 페인팅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다. 


이곳이 1984년 동계올림픽 당시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마스게임을 하며 응원을 펼쳤던 곳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숙소로 지어진 고층아파트도 무사하지 못했다. 


사라예보에서 만난 인상이 부드러웠던 중년남성의 말이다. 이슬람교도인 아내가 일곱 살이었던 때였다. 저격수가 쏜 총알이 엉덩이에 박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정교도가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며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자신의 종교는 가톨릭이라고 한다. 이제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종교가 나설 때라고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반성하고 사죄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에 여전히 앙금이 녹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라예보 밤거리. 우연하게 락밴드 카페를 들렸다. 다음에 찾아 갔을 때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아쉬웠던 기억.



도시 외곽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당시를 증언하는 십자가 군락을 만날 수 있다. 하얗게 펼쳐진 무덤이 그저 아픔으로만 다가왔다. 시간은 시루에 물 빠지듯 흘러버렸고, 앙상한 슬픔의 뼈처럼 십자가만 남았다. 이름 없는 주검의 절규가 침묵으로 메아리치는 도시 사라예보다. 


강간과 살육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마치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 마치 품위와 도덕적 삶을 산 늙은이인 양 인상 좋은 모습으로 이방인 관광객을 향해 인정을 베풀며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속)




*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 일주일 정도 브런치에 들어오지 못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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