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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Jun 11. 2024

“지옥은 ‘왜’라는 질문이 없는 곳”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학살의 끝

▲  사라예보 포위전 도중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그르바비차 빌딩





집단 학살 스레브레니차


보스니아 중동부, 세르비아 국경과 인접한 스레브레니차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단학살이 벌어졌다. 신이 하기 싫은 일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성전이란 이름으로 학살을 정당화했다. 


'데이튼협정' 이전으로 돌아 가보자. 나토가 군사개입을 하기 전이었다. 유엔평화유지군이 ‘안전지역’으로 선포한 곳에 포진하면서 안정을 찾아듯 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못했다. 더구나 이들은 세르비아 민병대와 교전 중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어떤 때는 100여 명 가까운 평화유지군이 생포되어 인간방패로 굴욕의 맛을 보았으며, 오롯이 텔레비전에 그 모습을 보이며 무기력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기둥에 묶인 평화유지군 장교의 모습이 세계로 전파를 타고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평화유지군의 대응 능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평화유지군의 안이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대량학살을 막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등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은 사라예보와 고라즈데, 스레브레니차 등 인종청소가 우려되는 주요 고립지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개전 초기에는 세르비아민병대와 평화유지군 사이에 별 적대감이 없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민병대의 공세가 이어지면서 인종청소가 행해지자 여론은 비폭력 방어에만 치중하게 놔두지 않았다. 유엔과 나토가 세르비아민병대 본부이자 거점인 사라예보 동쪽 팔레(Pale) 포진지를 공습해 야포와 탄약고, 통신시설을 마비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세르비아민병대 사령관 믈라디치는 전 민병대에게 “유엔평화유지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적대관계가 형성되면서 곳곳에서 포로로 잡힌 평화유지군이 인간방패로 활용되면서 유엔의 공습을 수그러들게 했다. “우리의 미군을 그들 사격용 총알받이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꺼리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한때 민간군사기업에 맡겨 직업 전투요원의 투입을 고려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선진국들이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장소를 꺼리는 대신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용맹하다고 알려진 나이지리아 군이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이들 역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1995년 7월,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중이었다. 이때 스레브레니차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은 지구촌이 경악했다. 사라예보 동쪽 세르비아 국경과 그리 멀지 않는 스레브레니차는 산악 지대로 번화가를 포함해 인구 1만3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지방이다. 개전 초기에는 이곳에 주로 살던 사람들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무슬림 보슈냐크인들이었다. 


이곳 스레브레니차 지역은 보스니아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어 세르비아민병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곳 주민들은 보스니아 정부군을 믿었고, 스레브레니차는 이슬람인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인구 비례 우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르비아민병대가 보스니아 동부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하고 있던 보스니아 정부군 28산악사단과 마을 주민이 세르비아민병대를 완전히 포위한 채 이곳으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끊어버린다. 


자급자족 생산여력도 없는 산골에 인근에서 몰려든 피난민 포함 5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순식간에 기아에 빠졌다. 동시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캐나다 소속 평화유지군 150여 명도 같은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유엔안보리는 1993년 4월 16일 유엔결의안 819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스레브레니차로 향하는 물자 수송을 가로막고 봉쇄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규탄하면서 인도주의적으로 봉쇄를 풀라고 압박했다. 


유엔결의안에 의해 무장했던 무슬림에게 무장해제 명령과 함께 봉쇄가 풀리는 듯했지만, 이는 바람일 뿐이었다. 무슬림은 세르비아민병대를 어떻게 믿느냐며 자위권을 위해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더구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라도반 카라지치 대통령이 나서 유엔결의안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증파의 반대를 분명히 했다. 


이렇게 어영부영 5개월이 흐른 1993년 9월, 비교적 안정지대인 보스니아 중부지역에 발령을 희망했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스레브레니차에 배치되자 세르비아민병대가 이를 가로막았다. 600명 규모의 네덜란드군은 캐나다군과 임무교대를 해야 했지만, 실랑이 끝에 결국 캐나다군의 숫자만큼 150명만 스레브레니차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머지 병력 중 주변 병력 200여 명만 남고 250여 명은 보스니아 중부로 철수해버리면서 인종청소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 1996년 보스니아인 매장발굴현장(사진 제공 및 출처 Photograph provided courtesy of the ICTY)     



2년 가까이 지난 1995년 7월, 종전이 임박했음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이때 사령관 락코 믈라디치는 세르비아민병대 라디슬라프 크르스티치 장군에게 모종의 작전을 지시했다. 새롭게 부임한 두령 크르스티치는 불법으로 군수물자가 도심으로 들어간다고 억지주장을 펴면서 군사를 몰아 스레브레니차로 빠르게 진격해 들어갔다. 


이미 기력을 다한 보스니아 28산악보병대는 보급품 부족과 화력마저 바닥을 보이자 사기마저 바닥을 쳤다. 네덜란드 평화유지군도 순식간에 제압당했고, 유엔에 공중지원을 요청했으나, 포로살해의 위협으로 이마저도 성사될 수 없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유엔평화유지군은 굴욕적 협상으로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긴 채 그곳을 벗어났다. 민병대 제압은커녕 피난한 현지인들을 보호라는 종래 목적을 상실하면서 포위당한 이슬람인을 세르비아의 블랙핸드 개들에게 먹이로 던졌던 것이다. 


훗날 이야기지만, 2017년 네덜란드 대법원은 당시 네덜란드 소속 평화유지군이 기지 내에서 보호를 요청한 350명의 무슬림을 나 몰라라 내쫒은 사건에 대해 정부가 10%의 배상책임을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고작 10%라니? 물론 이전에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네덜란드 내각이 총사퇴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책임한 판결이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레브레니차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에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2만5천여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스레브레니차 북부 포토셰리(Potočari)로 몰려갔으며, 보스니아 28산악보병 잔여병력 포함 1만여 명의 피난민이 별도로 무리를 이루며 서쪽 산악지대로 탈출했다. 더구나 동남쪽, 세르비아민병대가 장악하고 있던 곳으로 탈출이 이어졌지만, 성공여부는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탈출하던 이슬람교도들은 세르비아 민병대와 맞닥뜨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누구는 살해당하고, 또 누구는 팔찌와 가락지, 목걸이 등만 빼앗긴 채 목숨만을 부지할 수 있었다.     



▲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발굴된 집단 무덤. 2007년 7.(작가 아담 존스 Adam 63, 출처 Wikimedia Commons) 여자와 아이는 자비를 베푼다고 선전했지만이 모두 거짓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만여 명이었다. 세르비아민병대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전해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때부터 이들에 의해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축제가 펼쳐졌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살육이 자행되었다. 여자와 아이는 자비를 베푼다고 선전했지만 거짓이었다. 강간과 살육, 피를 흩뿌리는 죽음의 잔치, 악마같은 웃음과 아비규환 속에 처절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은 신을 향해 절규하게 했다. 


결국 더 두고 볼 수 없던 나토는 공습을 시작했다. 세르비아로서 최악의 살육전에 최악의 수를 둔 셈이다. 훗날 이들은 모두 한 구덩이에 파묻혀 떼죽음의 현장이었다고 훗날 사람들에게 유골을 드러내며 증명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 공식 실종자와 사망자는 모두 8,372명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가 아니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유엔이 정한 보스니아 내 안전지대는 모두 살육, 아니면 폐허가 되었거나, 사라예보처럼 3년이란 시간동안 봉쇄 속에서 날마다 죽음의 공포와 처절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수천 명의 무슬림이 세르비아민병대에 의해 도륙 당했다고 세계에 알려지자, 여론은 하루라도 빨리 정전을 위해 앞장서라며 국제사회를 압박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맺은 ‘데이튼협정’으로 전쟁을 후다닥 덮어버렸다. 가해자는 여전히 백주대낮에 득의만면한 미소로 활보하고,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라도반 카라지치



우여곡절 끝에 2001년 8월 2일 전범재판이 열렸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유엔 산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22일(현지시간) 보스니아 집단학살의 주범 라디슬라프 크르스티치에게 잡단학살 죄를 적용 징역 46년 형을 선고했다. 또 한 명의 발칸의 학살자 락토 믈라디치 역시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민병대 사령관으로 1995년 보스니아 동북부의 이슬람교도 마을 스레브레니차에서 8천여 명 학살을 비롯해 세르비아군 대량학살, 인권유린, 전쟁범죄 등 11개 항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③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를 단행한 혐의로 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3월 헤이그 감옥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악인의 말로치고는 너무나 편안하게 죽음을 맞았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대통령이었던 라도반 카라지치는 전쟁이 끝나고 13년 동안 도망자로 숨어 지내다 2008년에 붙잡혀 11개 범죄혐의로 기소돼 전범재판을 받았다. 전직 의사였던 그는 10년 이상 베오그라드에서 다비치라는 가명으로 병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카라지치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사라예보에 전해졌고, 사람들이 몰려나와 체포를 축하하는 파티가 곳곳에서 열렸다. 


그는 2016년 3월, 1심 40년 형을 선고받자 곧바로 항소했다. 그러나 범죄 심각성에 비해 너무 가볍다고 판단한 재판부는 2019년 항소심에서 카라지치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동안 세르비아 타디치 대통령과 정부는 카라지치 신변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대세르비아주의가 수면에 가라앉아 있을 뿐, 세르비아 사람들 가슴에 여전히 박동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독일 dpa통신 보도에 의하면 다치치 세르비아 신임 내무부 장관조차 “비밀경찰이 그 동안 카라지치를 보호해 왔다”고 비판했다. 


전범 재판에서 보스니아 학살 책임에 대해 지도자란 인간이 이렇게 대거리했다. “보스니아 대통령이 국제적 여론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학살을 부추였다. 그러므로 우리 책임은 아니다. 우리라고 학살이 기쁘지만은 않다” 


전쟁의 참상은, 보스니아를 할퀴고 간 내전이 남긴 흔적들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 중 유린당한 여성의 성도 마찬가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삶아 남은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가 한 말이다. 

“지옥은 ‘왜’라는 질문이 없는 곳!” 




 데이튼 협정 : 이 협정을 기초로 1995년 12월 14일 프랑스 파리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에서 보스니아 협정 조인식이 있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단일 국가로서 존속한다. 단 이슬람교도가 주체인 종래의 보스니아 정부와 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주민은 자기부담 스롭스카공화국을 갖게 되었다.(참조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② 1948년 집단학살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국제법이 제정된 이래 유럽에서 처음으로 전범 혐의자에게 집단학살 죄가 적용된 경우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22명의 나치 전범들이 단죄되긴 했으나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반인도적 범죄'였다.


③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유엔 국제기구 소속 재판관을 지낸 법조인 권오곤(현 김앤장국제법연구소장)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을 대상으로 한 주요 전범 재판에 참여하였다.(참조 : 한겨레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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