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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05. 2024

또 하나의 악 '크로아티아'

모스타르의 비극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대변한다

* 사진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내전에 의해 부서진 건물. 여전히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다.




세르비아와 비교해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참으로 질긴 크로아티아민족주의다. 아무리 앙숙 관계라고 해도 세르비아인이 저지르는 살육전을 보면서 똑 같이 저지른 악행은 도무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세르비아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이들의 민족주의 역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에 성공여부가 달렸다.


크로아티아의 지배정당 ‘민주연합(HDZ)’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일부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즉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주장처럼 크로아티아인이 살아가는 땅은 크로아티아의 영토란 뜻이다. 1991년 후반, 당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지원하면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를 위한 효과적인 통제를 하기 시작했다. 투지만은 1991년 3월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와 비밀회담을 가져 ‘카라조르제보 조약’을 맺는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분할’이라는 내용에서 보듯 이미 양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갈라서 나눠먹기로 약속을 했던 바다.

구한말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데프트 밀약’에서 조선과 필리핀을 두고 서로 인정하듯,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양분하기로 약속했듯 약소국의 운명은 강대국의 뜻에 따라 결정되고 말았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만의 스롭스카 독립공화국을 선포하자 뒤질세라 크로아티아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제외한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의 독립국을 선포해버렸다.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투지만의 투지에 걸맞게 아드리아해의 마카르스카와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중간 쯤 되는 그루데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 공화국’을 창설하며 자그레브의 꼭두각시라고 대내외에 알렸다. 훨씬 이전 이슬람과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힘을 모아 1992년 3월 독립을 선언하고, 유럽공동체와 미국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졌음에도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수도를 네레트바강이 흐르는 모스타르로 정하면서 군대는 물론, 경찰조직까지 창설했다. 그리고 화폐 역시 크로아티아의 디나르(현재 디나르는 단종 되고 쿠나Kn를 쓴다)를 공식화폐로 정했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민병대를 본격 지원하게 된 대외 발표용으로는 세르비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의 보호였다. 그러나 실상은 세르비아가 점령한 동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북부를 연결해 대세르비아주의의 마지노선을 저지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민병대의 무력행사는 ‘크로아티아방위위원회’라는 통합 사령부를 중심으로 크로아티아와 병합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하듯 이들이 점령한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의 추방은 조직적으로 이루어 졌다. 인종청소가 이들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보스니아 내 이슬람도교의 인구 44%에 달하면서도 전 국토 모두를 합쳐 5%에 불과한 반면, 인구 17%의 크로아티아계가 30%의 지역을, 31% 세르비아계가 65%의 땅을 차지한 것만 보더라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슬람교도의 추방으로 인한 난민의 생산, 그리고 살육,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는 방증이었다.


크로아티아 역시 세르비아의 체트니크와 비슷한 살인병기부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옛날의 괴뢰정권에서 살육전에 앞장섰던 우스타샤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검은셔츠단’과도 또한 비슷했다. 이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세르비아군에 포로로 잡힌 크로아티아민병대와 강제로 납치해 감금해놓고 강간을 일삼았던 세르비아 부녀자와의 맞교환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치열하게 살육전이 펼쳐졌던 곳은 바로 모스타르였다.      

지구촌 문명인들의 대륙이라고 자찬하는 유럽의 한 귀퉁이에서는 눈앞의 주검을 확인하고 공포에 떨다가 비로소 정신이 나가야만 공포의 영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던 이 와중에 세계의 이목은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었다.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구시가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로 눈과 귀가 집중되던 그때 헝가리 땅으로 전쟁고아 100여 명이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보스니아 내전이 다시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크로아티아 국경 헝가리 내 나지아타드의 난민수용소에 5천여 명의 난민이 세계로 모습을 생생하게 알렸다. 부녀자와 어린이가 80%를 넘는 이곳의 눈물과 절규, 통한의 울부짖는 모습을 오롯이 전했다.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있는 전쟁은 없으며, 더구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종교가 나와 다르다는 까닭에 살육이 정당화된 다는 것은 실로 혀를 찰 노릇이었다. 그나마 이들은 행복(?)한 축에 속했다. 행방불명(거의 다 죽음을 맞았지만)된 자와, 보스니아를 벗어나 난민의 행렬에 든 사람들은 무려 40만여 명에 달했다. 40만 명 중 절반은 그래도 독일에 수용되어 다행이라며 자평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인근 헝가리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스웨덴에 흩어져 있었다.


더구나 보스니아 내에 남아 있는 난민 1백80여 명은 구호품마저 전달받을 수 없었다. 때마침 전염병이 나돌면서 병으로, 영양실조로 많은 인명이 죽어갔다. 그나마 평화를 되찾은 크로아티아로 속속 밀입국하는 난민을 수용하기에는 크로아티아로서도 감당할 수 없었다. 한편의 가해자가 피해자를 책임지려하는 나라라니? 정말로 아이러니였다. 결국 기관단총을 난사해 난민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크로아티아는 국제적 비난과 욕을 세르비아보다 더 많이 먹어야 했다. 그래도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가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반이라고 할까.           





어제의 이웃끼리 총부리를 겨눈 모스타르


아픔의 생채기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결국 강대국에 의해 내전이 종식되었다. 내전, 아니 전쟁으로 인해 ‘화해와 연결의 상징물’이자, ‘문화와 종교가 다른 이민족 화해의 통로’로 알려진 세계에서 아름다운 다리로 소문난 모스타르의 ‘스타리모스트’가 파괴되었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이를 복원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았다. 세계 각국은 평화와 화해의 상징을 다시 연결하자는 원대한(?) 희망을 담아 지원이 이루어졌고, 이에 힘입어 복원이 시작되었다. 잠수부들이 폭약에 파괴되면서 강에 수장된 다리의 파편들을 건져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처음 다리를 건축했던 오스만터키제국의 후예들, 터키의 건축가들이 파견되어 1천88개의 돌을 찾아 오랜 시간에 걸쳐 완벽하게 재배치해 복원에 성공했다.


스타리모스트



1995년 12월 보스니아 내전 에 종지부를 찍은,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만나 체결한 ‘데이튼 평화협정’으로 종전된 지 8년 2개월이 흐른 지난 2004년 2월 다리가 완벽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7월에 영국의 찰스 황태자를 비롯해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스타리모스트의 재건축에 대해 행사를 열어 평화와 인류 공존이라는 대명제의 중요성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리고 2005년 모스타르는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상흔을 씻어냈다곤 하지만, 행복을 위한 망각은 필연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리에는 ‘Don‘t Forget 1993’,  1993년 그날의 상처를 잊지 말자는 표석이 남아 교훈의 현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증거를 잊어버리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 또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도가 높다는 현실은 역사에 살지 말고 현실에 살라는 듯했다. 정녕 ‘부負의 유산’, 즉 네거티브 헤리티지, 혹은 마이너스유산의 현장인 셈이다.         

      

다리가 복원되고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공포와 살육의 현장이었던 스타리모스트 주변 상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그 옛날(사실 옛날도 아니지만) 자신들이 총부리를 겨누던 당시의 사건을 배경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기이한 모습을 관광자원으로 삼아 살고 있다. 필자가 처음 스터리모스트를 찾았을 2014년 가을날, 다리 정상에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다는 수영복차림의 중년남성과 마주쳤다.


“Are you Japanese?”


필자는 중국 시안에 가도 일본인으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서쪽 우루무치로 가면 한족이냐고 질문 받기도 하지만, 여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에서, 그것도 스타리모스트 정상의 다이빙 쇼맨에게 일본인으로 보이다니 상당히 불쾌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이렇게 대꾸했다.



“제팬? 노우!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그제야 다이빙 쇼맨이 고개를 끄덕이며 흰 치아를 드러내고 웃더니 그러려니 하듯 돌아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다. 구릿빛 살결이 무척 멋있어 보여 뒷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찾았을 때였다. 그 다이빙 쇼맨은 여전히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서 나와 마주쳤다. 그사이에 많이 늙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나도 저만큼 늙었겠지 했다. 그때 또 이렇게 묻는다.


“Are you Japanese?”


이 자식은 영어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이것뿐인가 했다. 필자도 그사이 여유가 생겼다.

사우스 코리아.”

그러자 엄지를 척 치켜세우더니 대뜸 자기랑 같이 뛰어내리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미쳤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정말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 다이빙 쇼맨은 무척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사이 나와 비슷하게 생긴, 무척 용감한 사람과 함께 뛰어내린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 다이빙 쇼맨)     



다 아는 치욕과 굴욕의 현대사지만, 모스타르는 가톨릭교도와 이슬람교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지금도 곳곳에 부서진 건물과 그 잔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전투의 중심이 바로 이곳과 저곳, 즉 가톨릭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연결하는 스타리모스트다. 스타리모스트는 네레트바강의 가장 좁은 지형을 잇는 폭 5m, 길이 30m, 높이 24m인 1천88개의 하얀색 돌로 된 단일 아치형 터키식 다리다.

특히 이 다리는 유럽에서 이슬람 양식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원래는 나무다리였던 것이 15세기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점령하면서 이곳을 동유럽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이때 오스만제국에서 당대 가장 뛰어난 건축가로 손꼽히던 미마르 하이레딘(Mimar Hairedin)라는 건축가에게 석조다리의 건설을 맡겼다. 1566년 드디어 그의 노력으로 가장 아름다운 아치형 석조 다리가 완성을 보았다.


세월이 흐르고,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과 크로아티아의 가톨릭을 믿음으로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로 정도 나누고, 이웃 간 우정도 쌓고 벗으로, 동료로서 때론 종교를 넘은 사랑이 결실을 맺자 가문의 결속으로 이어지면서 몇 백 년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20세기 말, 민족주의라는 미친 혼령에 피를 뒤집어쓰고도 부족한 인간들에 의해 죽음의 탄환을 교환해야 했다. 처음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르비아민병대와 무슬림‧크로아티아지역방위대 연합군의 전투로 시작됐던 것이 곧이어 인종과 종교 전쟁으로 미친 듯 확전되면서 서로 죽이는 인간 사냥터로 변했다.

내전 때 크로아티아계 게릴라 부대장으로 5년간 복무한 요시프 오다크의 증언이다.


“전쟁은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지요. 적군이었지만, 원수도 아니었지요. 수백 년을 같은 땅에 함께 살아온 이웃끼리 피를 흘린 겁니다. 그래서 저는 늘 부대원들에게 당부했어요. 기도하자고요. 약탈하지 말고, 성폭행도 하지 말고, 가톨릭교도로서 살아가라고 주문했어요. 평생 갈 전쟁은 아니니까, 힘을 내자고 격려했어요. 인종청소까지 당하는 극한 상황에서 벌레처럼 살았지만, 인간의 고귀함을 더 간절하게 체감했습니다.”


2016년 5월 29일자[1366호] 가톨릭평화신문에 난 글을 다듬었다. 필자는 언어의 유희를 보았다. 종교적 믿음의 아집과 변명을 거름망 없이 들었다. 죽이면서 기도하자고? 십자가를 조준경에 달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던 그들이었다. 어린 아이조차 벌레 짓이기듯 죽이면서 인간의 고귀함을 간절하게 체감했다고? 물론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녕 그길 뿐이었을까. 결국 크로아티아민족주의의 발원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살육의 대열에 당당하게 발을 내딛으며 나로 인해 죽음의 길로 걷는 자를 위해, 이단의 목숨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 전쟁으로 모스타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스타리모스트를 어느 편에서 장악하느냐가 전투에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보급로를 끊어버리겠다는 판단에 의해 폭약으로 스타리모스트를 폭파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느 진영에서 폭파했느냐를 두고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니 양심마저 폭약과 함께 날아 가버린 듯하다.


필자는 안다. 결과는 대부분 승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결국에는 이슬람과 가톨릭을 이어주던 의미하는 바가 무진장 큰 스타리모스트가 파괴되고, 모스타르를 점령한 크로아티아민병대들은 본격적으로 신기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가장 깊숙이 자비를 베풀었던 것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들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추방하는 거였고,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 다음에 복수의 칼날을 갈 가능성이 다분한 자들은 학살하면서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명령에 의해(결코 자발적이 아닌?)강간도 일삼았으며, 이단이자 유럽의 영원한 적의 상징인 15세기 이후 건축된 이슬람사원을 대부분 파괴했다.


이렇게 모스타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고요가 찾아 왔다. 고요가 쌓이면 무엇이 되는가 하면 아픈 수다가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차를 나누던 이웃의 주검 앞에 아무도 책임지는 이는커녕 승리자, 혹은 살아 남은자의 즐거운, 훗날 추억꺼리의 현장이었다.


다리 양쪽에는 무슬림들이 화약고로 이용했던 탑이 있으며, 이슬람 거리 쪽으로 다리를 건너 만나는 박물관은 옛날 모스크였다. 박물관 내에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정말인지 정녕 알 수 없지만) ‘코란’이 전시되어 있다.          


보스니아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이중적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스니아 내 이슬람인 학살이라는 인종청소 뒤에 비록 세르비아 밀로셰비치보다는 늦었지만,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의 전격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앞서 언급한 데로 이미 이들 두 대통령의 밀약에 의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크로아티아의 활략으로 보스니아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 공적도 무시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보스니아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 건 나토 공습이었지만, 크로아티아방위대가 세르비아민병대를 곳곳에서 물리친 것 역시 종전을 앞당기는 데 상당부분 거들었다.


1995년 6월말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민병대가 점령하고 있던 보스니아 서부에서 그들을 온전히 몰아냈고, 특히 크로아티아 동부지역을 점령한 후 크로아티아 내 스스로 독립국임을 선포했던 세르비아민병대를 몰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모스타르의 회교도 학살사건과는 별개로 1995년 8월 이들 보스니아 이슬람군과 크로아티아방위군 연합세력이 트라지나를 공격해 이들의 거점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것도 주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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