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 코소보 프리슈티나 전경. 오전의 모습이지만, 침울한 도시에 그늘이 가린 듯하다. 그러나 동양인 비하하는 데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일대일로 대화하면 그렇게 순진한 아이들이었지만 말이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코소보의 인구분포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략 코소보 인구는 195만 명을 살짝 넘는다. 이중 알바니아계가 82%를 차지하며, 세르비아 전체 인구와 비교해서도 17%를 차지하는 민족 분포를 보인다. 그리고 세르비아인이 8%, 마케도니아인, 무슬림, 집시, 몬테네그로인, 터키인,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이 거주한다.
그러나 1995년 당시로 치면 92%에 가까이 알바니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런 코소보에 ‘강자 스테판 듀산’ 중세의 세르비아의 왕국 문화유물유적이 산재해 있다. 민족의 성지를 굴러온 이민족이 차지한 채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세르비아로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 세르비아인의 말대로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세르비아의 영지로써 단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코소보에 알바니아계가 처음부터 민족주의에 함몰되어 전투적인 입장에 선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결코 잊지 못할 차별정책이 그 시작점이었다. 블랙핸드, 화이트핸드, 녹색 셔츠단, 즈보르, 흰독수리 등 세르비아 극우민족주의가 낳은 단체들이 힘을 얻거나 설쳐대면서 결국에는 티토에 도전하다 쫓겨난 란코비치가 첫 원인 제공자였다.
대세르비아주의의 연결고리, 세르비아민족주의 줄기세포 란코비치의 코소보 차별정책은 세르비아로부터 등을 돌리게 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유고연방 내에서 경쟁적으로 세대결을 이어갈 때였다. 1963년부터 티토 후임으로 연방부통령에 오른 알렉산더 란코비치는 연방의 탈집중화를 가장 우려해 비밀경찰 조직 국가 안전부의 수장으로서 세르비아 이외의 지역, 특히 코소보에 대해서 잔혹하게 다뤘다.
탈집중화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티토는 물론 지휘부를 대상으로 한 불법 비밀공작도 불사했다. 권력의 핵심인 군과 경찰을 비롯해 정보의 보고 보안부대와 기타 관련 기관의 간부들이 대부분 세르비아인으로 채워졌고, 그 와중에 코소보에서 지역차별에 항거하는 분규가 일어나자 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국민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훗날 감히 티토를 도청한 죄로 실각을 맛보아야 했지만, 코소보 알바니아계로서는 살 떨리는 경험이자 훗날 자신들의 지위와 위치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숙청되었다고 해서 코소보는 극한지역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가 1974년 유고연방 세르비아의 직할 자치주라는 이유로 개발지역에서 늘 소외당해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유고연방 중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으며, 글을 모르는 문맹인이 40% 가까이 되었다. 말 그대로 어둠의 도시, 침묵이 가라앉은 도시였다. 공장이 없으니 당연히 일자리도 없고, 지역경제 꼴은 말이 아니게 변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극빈지역이라는 오명이 유고연방에서는 당연하게 인식되면서 불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최고치의 실업률, 최고 문맹률이 합쳐지면서 최대 출산율이라는, 지역차별로 인한 코소보 상태다.
이때 알바니아에는 악명을 드높이는 독재자이자, 공산당 지도자 엔베르 호자가 등장한다. 소수의 세르비아인이 장악하고 있는 코소보 자치정부의 소득이 실업자들의 불만으로 작용하면서 본격적인 반세르비아저항운동이 불붙었다. 그러나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려는 세르비아 경찰과의 충돌로 1968년 11월 말, 첫 대규모 폭력사태가 일어나면서 이를 기회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항운동이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이웃의 연방국가 마케도니아의 고스티바르와 테토보에도 번지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계들은 알바니아와의 합병이라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요구까지 들고 나왔다. 더구나 “호자 만세!” 라니? 코소보의 경찰과 공산당원은 거의 세르비아인으로서 이들은 시위주동자를 체포해 많게는 5년, 적게는 2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무려 37명을 공산당에서 출당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세르비아인들의 의식에도 있었다. 자신들의 성지를 하층민인 알바니아의 이방인들이 짓밟고 더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의 시위가 세르비아의 강경진압으로 수그러들긴 했지만, 잠재적 폭력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대세르비아주의가 거친 바다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던 중 밀로셰비치의 등장으로 발칸반도는 민족의 갈등은 극에 달하기 시작한다.
1974년 다소 부드러운 카리스마 티토에 의해 의회구성과 경찰권 등 자치정부를 구성해 우리끼리 살림을 꾸려가던 코소보는 1980년 코소보공화국으로의 승격을 요구하면서 일련의 자율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티토가 금방 죽어버리자 독립에 대한 열망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게 된다. 프리슈티나대학생들의 공화국 승격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시위가 결국 폭력과 피로 얼룩졌다.
1987년 밀로셰비치가 코소보를 처음으로 찾았다.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내 세르비아 주민을 향해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는 연설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 완전하게 정권을 장악한 밀로셰비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사의 대서사시를 되살리는 이벤트였다. 그는 ‘코소보 폴예전투 600주년 기념사’에서 이렇게 외쳤다.
“코소보의 영웅이여 영원하라!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
이를 신호로 1989년 밀로셰비치에 의해 코소보 자치정부와 국회가 폐지되었고, 따라서 자치권을 상실한 코소보에 세르비아군의 파견에 이어 세르비아인들의 관리감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이들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에 장래를 걱정(?)하며 이렇게 발표했다.
코소보 자치정부에 일부 남아 있던 알바니아계 사람들을 해고하고, 그 빈자리에 세르비아인을 채워버렸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프리슈티나대학의 교수와 직원은 물론 일반 강사까지 잘라버렸으며, 일반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천여 명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길거리에 내몰렸다. 더구나 대알바니아주의를 부추긴다며 언론에까지 재갈을 물리면서 날이 갈수록 코소보에 알바니아계에 대한 차별정책은 심해졌다.
당하고만 있을 알바니아계가 아니었다.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은 물론 시위까지 이어갔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 세르비아 경찰은 인정사정 두지 않고 발포해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알바니아들은 코소보 해방군(KLA)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것은 결국 코소보의 살육전으로 증폭했다. 이로써 세르비아인을 제외하곤 무자비하게 다뤄도 된다는 ‘블랙핸드’의 악령이 부활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1990년 알바니아계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밀로셰비치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계 경찰의 주도로 코소보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공공연한 탄압과 살육이 행해졌다. 그해 2월에는 코소보에서 일부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들 간의 충돌로 30여 명의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단순한 충돌이라기보다 내전으로 확전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의 전투에서 쓴맛을 본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와의 일전을 겨루면서 일부 승리를 거머쥔다. 그리고 동시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개들을 풀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뛰어들게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들은 소름이 돋을 법 했으나 웬걸, 그와는 반대로 우리 코소보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고, 애국이라는 소름이 파르르 돋았다.
결국 1991년 코소보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지만, 아무도 인정하는 곳이 없이 저들끼리의 잔치였다. 세르비아인들과 밀로셰비치만 자극한 꼴에 지나지 않았다.
1992년 마케도니아까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의 감시와 압제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본격적인 살육전이 펼쳐지던 1992년 5월에 코소보는 비교적 온건한 저항파 이브라힘 루고바를 대통령에 올리고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의원선거를 치렀다. 물론 세르비아에 허락을 얻을 필요도 없었지만, 세르비아가 인정하지도 않은 선거에서 친 알바니아기구인 ‘민주연맹(DLK)’이 76%의 득표율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은 몽땅 세르비아비밀경찰에 의해 연행되면서 국회는 문조차 열지 못했다.
이때부터 세르비아경찰의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영장 없이 구금체포는 다반사, 불시에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에 의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다. 밤사이에 행방불명되는 인사들도 늘어났지만, 누구 하나 항거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공포정치가 코소보에 행해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살육전을 지켜보던 서구세계는 코소보에 관심조차 둘 수 없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라고 부르면서 숨을 죽여야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튼협정’을 계기로 악행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대통령으로서 살육에 앞장선 라도반 카라지치의 몫으로 몰아넣고, 평화의 사도로 옷을 갈아입은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정권유지만 가능하다면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하지만 코소보는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다만 폭력을 확인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나서서 매번 그러하듯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는 국내문제라며 내정간섭하지 말라고 되받았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어딘가 곪아 있는 사회는 도둑을 영웅시 하는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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