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났지만......
1999년 코소보 살육전이 벌어지면서 나토군을 불러들였고 코소보는 UN의 통치를 받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인류는 21세기를 맞이했다.
한편 밀로셰비치는 21세기가 들어서면서 2000년 10월 조란 진지치 세르비아총리의 주도로 이루어진 민중혁명이 일어나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2001년 3월 밀로셰비치는 조란 진지치의 노력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 학살과 고문, 살육 등의 죄목으로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정에 섰다. 그러나 대세르비아주의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민중혁명을 이끈 조란 진지치가 2003년 3월 12일 베오그라드 정부청사 앞에서 암살당한다.
2003년 1월 24일 - 세르비아 공화국의 조란 진지치 총리가 2003년 1월 24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2003 연례회의' 기자회견. 그는 대세르비아의 망령자에 의해 정부청사 앞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이 ‘붉은 악마’로 세계를 놀라게 할 때 코소보는 총선과 동시에 대선이 실시되었다. 이때 이브라힘 루고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는 듯했다. 코소보 내 평화유지군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사이에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피난 갔던 알바니아계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알바니아계에 의한 세르비아계에 대한 역 테러가 공공연히 일어났다. 코소보 프리슈티나 북쪽 미트로비차를 가로질러 흐르는 이바르강을 중심으로 북부지방에 세르비아인 20만여 명이 몸을 피해 모여 살고 있다. 이곳은 2004년 까지만 해도 총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긴장의 촉수를 늦출 수 없는 지역이다. 살얼음을 걷는 중이라는 뜻이다.
미트로비차에 유엔평화유지군과 NATO 병력이 경계를 서고 있긴 하지만, 이바르강을 사이에 두고 갈등의 구조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코소보에 살아가던 세르비아인이라고 모두가 살육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또한 알바니아계라고 해서 세르비아인 축출에 앞장선 것은 아니다. 일부 강성론자가 똘똘 뭉쳐서 저지른 악행에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극히 일부의 극성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양측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 없는 전쟁이었다는 뜻이다.
이제 이바르강은 ‘분단의 강’으로 불린다. 세르비아인들이 남쪽에서 몸을 피해 북쪽으로 몰려들면서 인구비율이 역전되고, 알바니아계가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그 세를 몰아 알바니아계가 살던 집을 불사르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서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하면서 남쪽에서 살아가던 세르비아계 역시 고향을 등진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 종식 후 9년 만인 2008년 2월 17일 코소보가 국제사회에 독립을 선언하자 UN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승인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특히 세르비아와 동맹국인 대표적인 나라, UN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있어서다. 코소보는 두 나라의 반대로 UN 가입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코소보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몸을 담아야했다. 그들은 눈을 돌려 EU나 NATO에도 가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등 코소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많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국에 부정적인 이유는 또 하나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대알바니아주의가 독기를 품은 채 뒤를 노려보고 있다는 현실이다. “모든 알바니아인은 한 나라에 속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땅한 원칙에 속한다.”는 코소보 내의 알바니아인에 대한 대표적인 변辯이다. 발칸반도에 뇌관이 보란 듯 솟은 지리적,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구조다.
2008년 10월, 코소보가 독립국을 선언하고 8개월 뒤 유엔 총회에서였다.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에 대한 합법성 여부를 국제사법재판소가 판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2010년 7월 22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코소보의 독립은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절망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어쩌면 세르비아로서는 그동안 국제사회에 폭력조직으로 낙인이 찍혀 몸에 새겨 넣은 폭력의 문신을 지우려는 고난과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동반된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민족의 뜨거운 심장에 이민족이 나라를 세운다니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막아야할 일이었다. 그래선지 코소보를 인정한 국가들이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해 30개국이 채 안 된다(2020년에 와서는 100여 개 국으로 늘어났다). NATO가 주도하는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이 코소보 평화 정착을 위한 UN의 감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은 아프리카 인종청소에는 묵묵부답, 애써 외면하는 처지에서 코소보 개입은 인도주의적이란 말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익이 나지 않은 곳에 군사개입은 없다’는 게 국제사회의 냉혹한 경제논리이자 현실이다. 그렇다면 발칸반도, 그 중에서도 우리가 보기에 하등 얻을 게 없는 코소보라는 아주 빈약하고 작은 땅을 살리기 위해 무려 1만5천여 회의 공습을 퍼부은 까닭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지금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난민문제가 코앞이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로 무작정 밀려드는 난민을 막을 방법이 없다. 독일이 예외로 20만 명의 보스니아와 코소보 난민을 받아들였다가 평화(준 평화시대?)가 찾아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시민권 운운하며 단체 행동하는 모습은 인권을 넘어 국제관계에 난마처럼 얽힌 문제들이다.
여하튼 국제사회의 노력에 힘입어 코소보는 일련의 평화가 찾아 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희생자의 목숨을 담보로 이뤄놓은 평화를 깨뜨리려는 양측 극단주의자들이 설쳐대는 현실은 국제사회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배우듯 과거의 경험에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일부 권력욕에 물들어 민족을 선동하는 자를 배격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영원히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후손이 나에 의해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더구나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들 강성론자들 끼리 무력충돌은 여전히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다.
* 덧붙인다. 작금의 시절이 너무나 상식 이하라,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다.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 이야기를 교훈적으로 풀어 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까닥 했으면 우리, 이처럼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아비규환의 땅으로 변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두럽다. 그런 위험의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무섭다. 신은 죽었다! 신의 뜻이란 말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가 곧 악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에서 대한민국 계엄령 소식을 들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를 일이다. 계엄령의 소재로 쓴 소설이 노벨문학상 수상에 올랐는데, 고국에서 계엄령이 발동되었다는 소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눴다. 여기에서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지만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한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해 무도한 무리를 물리친다는 것이 허균의 호민론이다. 특히 호민론은 ‘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참조 : 다산연구소-
발전을 위해선 진보가 필요하고, 안정을 위해서는 보수가 필요하다. 나는 지독한 보수다. 변화가 두렵고, 급변한 사회에 적응이 힘든 나머지 철저하게 법을 지키며 살아왔다. 손에 쥔 패라곤 하나도 없거나 한 장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보수를 팔아 앵벌이하지 말라! 당신들은 보수를 빙자한 빈대들이다. 진정한 보수는 법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다. 지금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야광봉, 응원봉을 들고 흔드는 이들이 진보는커녕 법을 수호하기 위한 보수들이란 사실을 잊지마라.
계엄령을 옹호하는 자가 곧 항민이다. 스스로 권력자, 혹은 가진자의 머슴을 자처하는 줄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제를 돌보란 소리까지는 못하겠다. 부디 대한민국의 국격이 예전으로 돌아가길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