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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Dec 04. 2024

코소보 인종청소

자국민 희생으로 국제사회 관심을 끈 제노사이드

* 코소보 프리슈티나 시장 내 작은 식당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다. 수채화인데 주인장의 솜씨인 듯하다. 물어 보자, 씁쓸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어제 막 잠자리에 들려다 톡을 확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도 아내도 잠을 설쳤다.

인지능력장애인들이 만들어 놓은 정부가 결국 일을 친 것이다. 인지능력장애란, ‘기억력, 주의력, 언어 능력, 시공간 능력, 판단력 등이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     


미래, 혹은 사건을 판단하기 까지 내 머리에 데이터가 축적되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하거나, 선험적 경험이 뒷받침 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행동하게 한다. 그러나 이 능력이 저하되면 판단에 상처가 생기면서 자칫 만세돌격대로 변하기 순식간이다. 무지가 신념에 차면 일어나는 만용이 정의로 포장되면서 폭력조차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거짓의 유혹, 비리의 유혹, 폭력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빨갱이, 종북좌빨, 간첩 등등의 단어로 포장해 의기에 찬 댓글도 마다치 않게 된다. 이들을 징치하기 위해서라면, 군사독재도 찬양하는가 하면, 심지어 친일도 불사한다. 이상하다. 일본인은 보수라고 하면 반한반중 감정이 앞서는 데, 우리는 보수라며 친일을 추종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는 고장에서는 뒤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밀어주는지 정말 불가사의다. 특히 손에 쥔 패라곤 하나도 없거나, 달랑 하나 뿐인 사람들이 더 열기에 차서 입에 거품을 문다.      

세르비아 학살자 밀로셰비치는 국민의 지지라도 얻었는데, 그래서 국가적 책임은 피할 수 있었는데,어쨌거나  어제 밤에 일어난 에피소드는 우리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데 필연적인 사건이었으면 좋겠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연산군)     


내 친구 녀석 이 포스트를 읽고 또 화를 내겠군! 입 좀 다물라고…..^^*..




코소보의 첫날 아침이었다.

낯선 땅 잠을 설친 이방인은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부스스한 신새벽에 일어났다. 산책삼아 나선 도심에서 시민의 얼굴에 여백의 행복을 보았다. 눈인사를 건네는 이방인을 향한 손짓은 넉넉했고, 초조함에 내쫓기듯 내딛는 발걸음을 본 적도 없다. 물론 비교의 오류, 혹은 규모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식당에서 만난 세르비아 신혼부부의 말이 생각났다.


“코소보가 무슨 나라라고….”


여전히 코소보는 현재진행형이 분명했다. 세르비아인의 성지 코소보에 이방인이 독립을 선언한 이 억울하고도 미칠 듯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코소보가 중세의 서사시적 영광이 서린 세르비아인의 고향이라는 인식의 뿌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았다.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코소보 프리슈티나 박물관에서 각 나라 국기들 중 유독 태극기를 망토처럼 펼쳐 걸치고 사진을 찍던 프리슈티나대학교 2학년 여학생 말이 떠올랐다.


“코소보를 어떻게 생각해요?”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알아들었다. 그러나 답은 글쎄…. 갈 길이 멀다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대한민국은 ‘BTS’의 나라였다. (앞서 잠깐 소개한 글을 이해를 돕기 위해 반복해 실었다)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이 데이튼협정으로 종전의 기미 속에서도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들의 전쟁에 가려 코소보사태가 화두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까지 비폭력을 주장하며 평화운동을 펼쳐 독립의 정당성을 이어가던 코소보의 항쟁주역 하심 타치, 아뎀 야샤리 등 일단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코소보 해방군이 결성되어 무장 투쟁을 위해 갑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걸었다.      


하심 타치는 서방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모종의 계획을 꾸며 실행에 옮겼다. 자국민의 희생으로 서구의 눈과 귀를 코소보로 돌리는 극약처방, 즉 독을 독으로 치료하려는, 폭력에 의한 희생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는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인들의 무력충돌을 주도한다. 1995년 무장단체‘코소보민족해방운동’에서 ‘코소보해방군’으로 확대하면서 세르비아가 무자비하게 자민족에게 총칼을 들이대게끔 세르비아에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프리슈티나 이슬람사원. 발을 씻고 사원 안에 들어가는 의식이다.


1996년 새해가 밝았다. 코소보 내 알바니아 무장 세력에 의해 지역을 순찰 중이던 세르비아 경찰 4명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서방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한 코소보 해방군 정치국장 하심 타치의 작품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세르비아경찰관의 무자비한 보복이 행해졌으며 주민을 더욱 억압하며 옥좼다. 이제 본격적으로 곳곳에서 코소보해방군(UCK)과 세르비아군 간의 교전이 지속되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1998년 2월 28일 알바니아계 주민 58명이 코소보 서부 자코비치 인근 코레니차에서 무참히 학살된 사건은 코소보 내전을 본격화한 발화점이었다. 코소보 저항군 역시 알바니아 마피아와 심지어 이탈리아 폭력조직까지 가담해 그야 말로 막장 부대로 거듭나면서 극한으로 치달았다. 이들이 저지르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살육 또한 규모가 작다 뿐이었지 세르비아 보안군 못지않았다. 그해 10월 세르비아의 코소보인에 대한 대량 학살사건이 발생에 세계를 경악케 했다. 국제사회는 알바니아와의 전면전 확전 유무에 촉각이 곤두서게 되었다.   

   

1998년 2월 28일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살육전이 벌어지면서 코소보 알바니아인 중 대략 1000명이 죽고 죽음을 피해 고향을 등진 4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 난민들은 세르비아 보안군의 학살을 피해 코소보 산악지역의 외딴 곳으로 숨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도망치다 밀로셰비치의 개, 블랙핸드의 미친 영혼 ‘아르칸의 호랑이’부대에 걸려 50여 명 중 단 한명도 살아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비공식적 무장병력 외에도 세르비아 정규군이 코소보에 투입되면서 광기로 변해갔다.


코소보 학살 뒤에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밀로셰비치가 있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그해 6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코소보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방안’을 선언함과 동시에 밀로셰비치의 신유고연방군의 코소보 철수를 비롯해 이들의 지원으로 자행되는 인종 학살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에서 대세르비아주의가 굴욕적인 체결을 당했다며 세르비아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터라 민족의 성지 코소보에 알바니아계가 나라를 세우는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의지였다.


미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서방 각국의 관심이 쏠리면서 ‘무력평화안’이라는 이름도 요상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일단 3년이란 기간 동안 무조건 휴전 후 코소보에 대한 본격 독립논의와 그동안 코소보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평화유지군 주둔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물론 코소보조차도 거부했다. 코소보는 독립의 시기에 불만을 품었고, 세르비아는 자국 영토인 코소보에 평화유지군이 주둔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리슈티나 광장의 조형물이다. 나토의 개입을 감사하는 뜻에서 각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다. 이들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세르비아군은 그해 8월 코소보 해방군의 주요 거점지역을 찾아 내 하나 씩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해 1998년 10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사용을 결정하게 된다. 해가 바뀌고 1999년 2월 국제사회의 중재에 세르비아가 당당하게 거부하면서, 3월 봄이 오는 것을 시작으로 나토군의 세르비아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여전히 텔레비전에 등장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때 알바니아는 나토가 제시한 안을 받아들이며 평화중재안에 서명했으나, 세르비아는 나토군 대신 유엔군의 주둔을 제안하면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때 잠시 동안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 세르비아 보안부대의 살육은 멈추지 않았다. 또한 평화가 찾아온 것으로 착각한 30만 명의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세르비아군에 의해 집단 볼모신세로 변했다. 이들 중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방군의 조력자와 직접 가담했던 용의자로 분류해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이처럼 밀로셰비치가 배짱 좋게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쟁이 NATO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던 까닭이다. 최대한 길게 잡아도 1주일 맹폭을 퍼부으면 세르비아가 손을 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세르비아는 수많은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습에도 끝끝내 버텨내고 있었고, 밀로셰비치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하늘마저 NATO 편이 아니었다. 악천후의 날씨 속에서 공중 폭격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반드시 알고가야 할 것들이 있다. 미국의 판단오류가 도마에 올랐다. 미군이 공습을 감행하면 “어 뜨거워라!” 하면서 코소보 내의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살육이 멈출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육군이 상륙하지 않은 이상 제공권은 NATO군에 있었지만, 지상군은 여전히 세르비아군의 지휘 아래 있었다. 공습에 자극받은 세르비아군인에 의해 자행된 인종 청소가 1999년 3월 24일 본격적으로 NATO의 공습이 시작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진출처  Wikipedia

미 공군 F-15E 스트라이크 이글, 1999년 3월 28일 이탈리아 아비아노 공군 기지에서세르비아 공습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DoD 사진, 미 공군 선임 비행사 미치 후쿠아.



공습에만 의존했던 NATO군의 지상군 파견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들의 살육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때 밀로셰비치는 결사항전을 독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인의 악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이 죽어갔고 집들은 화마에 휩싸였다. 난민들이 속출하면서 이웃나라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지로 몰려드는 참상이 CNN 등 서구 언론보도를 통해 안방까지 생생하게 전달됐다.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알바니아계는 무려 4만 명에 달했고, 강간과 고문, 약탈은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이를 피해 이웃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 등지로 떠난 난민의 숫자만 80여만 명을 넘었고, 코소보의 산악지대로 몸을 피한 사람들도 60만 명이나 되었다. 그제야 미국에서 지상군 파병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NATO군은 당장이라도 코소보로 진군할 보병 1천 명을 알바니아에 상륙시켰고, 뒤이어 8천 명을 추가로 투입했다. 그리고 1999년 4월에는 영국군 4만 명이 코소보로 들어왔다. 베오그라드, 코소보 세르비아근거지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해 성공하면서 세르비아는 더 버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NATO의 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 즉 78일간이나 이어졌으며, 총 3만8000여 차례 출격해 1만500회의 공습을 퍼부었다. 베오그라드와 코소보 세르비아군대의 주둔지를 폭격하면서, 결국 대부분의 군사기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1999년 6월 9일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가 평화안의 중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NATO의 군사 개입은 인종 청소를 막는 데 가장 중요한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촉발시켰다는 비판이다. 그리고 코소보 내 회교도의 교회와 문화유산이 잿더미로 변하는 데도 일조했다.

               



코소보의 미국사랑은 넘친다. 자신들을 세르비아로 지켜준 은인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 성조기와 모자는 클린턴이 방문기념으로 준 것이며, 위의 자유 여신상은 경찰서 옥상에 설치,


머리에 비둘기 오물을 뒤집어 쓴 클린턴 동상, 무너진 건물은 나토 공습으로 무너진 세르비아 방위사령부


* '맛보기 세계사' 앞으로 2회가 남았습니다. 1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멀리도 달려왔습니다. 지구촌 한쪽 귀퉁이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 멀리 또다른 귀퉁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가질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어떤 명목으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인류는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인 까닭에 작은작은 소리라도 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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