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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19. 2024

발칸반도의 판도라 상자

코소보, 코소보야

* 사라예보 라틴브릿지. 1차 세계대전을 알리는 한 발의 총알이 발사된 곳이다.





한 지붕 세 가족

본격적으로 코소보를 이야기 하기 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에 대하여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렇게 보스니아 전쟁의 포염이 멈추고 기이한 모습의 연방이 탄생되었다. 이슬람교도 보스니악(Bosniak)과 로마 가톨릭의 크로아티아가 합쳐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인들(인구비율 37.1%)의 ‘스롭스카공화국’이 51대 49의 땅을 차지한 채 한 연방이라는 체제 아래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세르비아계로선 보스니아 전쟁이 끝난 후라도 전혀 손해 보지 않았다.


이들 연방에는 각 한 명의 대통령이 있다. 공화국의 대통령은 이들 3명이 돌아가며 8개월마다 한 번씩 의장직을 맡아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이들의 임기는 4년이다. 따라서 임기 내 두 번씩 ‘공화국 대통령’에 오를 수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요철모양의 점선이 나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점선 동쪽이 스롭스카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갈 버스를 타기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라예보 버스정류장에는 베오그라드로 가는 차편이 하루 중 새벽과 늦은 오후, 두 번 뿐이다. 스롭스카 공화국으로 가면 버스가 많다는 정보조차 집요한 질문 끝에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라예보와 스롭스카의 버스시간표 정보조차 호환이 안 되고 있었다.


건물 벽에 난 총탄자국



같은 나라에서 공중전화카드도 통용이 서로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다. 결국 전철을 타고 먼 길을 물어서 이동해야 했다. 곧바로 마치 경찰과도 비슷한 사람들에 의해 전철 내 불신 검표조사가 시작된다. 그들의 눈에 이상하게 생긴 이방인이 딱 걸렸다. 표는 당연히 구매해 탔기에 망정이지, 2014년 때처럼 퇴근시간 콩나물시루에 무작정 올라탔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전철에 내려서도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전철에서 대학 2~3학년 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의 친절함에 놀랐다. 세르비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전철에서 내려서 버스 타는 곳까지 400여m를 안내한 후에도 돌아서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버스에 정확히 올라서는 모습을 확인 한 후 손을 흔들며 돌아서던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한다며 버스기사를 향해 부탁하던 목소리는 불가佛家에서 천상의 미음조라 일컫는 가릉빈가迦陵頻伽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붉은 점선 오른쪽이 세르비아계가 살아가는 스롭스카공화국이다.



20세기 인간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 보스니아전쟁은 그 피해 역시 어마어마하다. 400만 명의 인구 중 160만 명이 살던 집을 버리고 고달픈 난민 신세로 전락했고 40만 가구의 집들이 파괴되고 불에 타 없어졌다. 사망자는 정확한 통계조차 확정할 수 없지만, 25만∼30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물론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사라예보 곳곳, 모스타르의 건물 군데군데, 아물지 않은 상흔을 보며 밤을 배회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우연히 찾은 젊음의 공간, 마치 잊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는, 팝으로 무장한 벤드 연주가 귀와 심장을 두드리던 카페에서 만난 인연들과 당시에 마셨던 맥주마저 그리웠다. 훗날 기억을 더듬어가며 밤을 빌어 찾았지만, 온데간데없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서 섭섭했던 기억이다.  


다시는 이토록 아름다운 ‘푸른별’ 지구촌에서 벌어져서는 안 될 끔찍한 비극이다. 부디 전지전능하신 신이 있다면 이번 전쟁으로 확신 했으리라.           



사라예보의 꺼지지 않는 불꽃/ 전쟁의 상처.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코소보, 그리고 알바니아의 역사


15세기에 뿌려진 씨앗이 숨죽인 채 자라다가 21세기에 와서 피를 부르는 지구촌 폭력의 중심에 선 코소보다. 코소보에는 알바니아계, 즉 대다수 일리리아인과 세르비아계 7~9%의 인구 구성을 보인다. 이처럼 코소보는 주민의 절대 다수가 알바니아인이지만, 소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서 통치를 받았던 독특한 구조는 것은 그간의 아프고 비루한 역사가 스며있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르비아로서는 자신들의 성지이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땅 코소보다. 중세의 걸출한 영웅 스테판 듀산은 현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와 코소보는 물론 알바니아까지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앞서 거듭 언급한 것처럼 바로 대세르비아민족주의의 상징적 완성이자 민족의 가슴에 칼날로 새겨진 국경선이다.


발칸반도의 학살자 밀로셰비치에 의해 코소보에 인종청소가 이루어지기까지 알바니아, 즉 일리리안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앞의 글을 모자이크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이해하기 쉽게 다시 언급한다.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이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 일리리언은 이동 민족과 비교해 대부분의 정주민들이 그렇듯 전쟁무기는 물론 문화조차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침략하면서 이들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로마제국이 병참기지로 이용하려던 발칸반도의 진출에 끝까지 애를 먹였던 민족, 그리고 마지막까지 로마제국과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갔던 민족이 일리리안 인들이었다.


그러나 막강 로마제국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고향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일부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해적, 혹은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등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6세기부터 발칸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남슬라브민족에 의해 토착 일리리언 인들은 또다시 박해와 차별, 문화적 하층민으로 냉대와 멸시 속에 요즘으로 치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종청소라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민족의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점차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북부 일리리안은 대부분 종말을 고했고, 소수의 인원이 살아남아 발칸반도 남부로 이동하면서 ‘알바노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민족으로 지금의 알바니아 땅에 정착해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14세기 초까지 ‘아르게리아 왕국’의 아냐우인스의 통치에 들어 있다가 그 후 ‘강자强者’ 스테판 듀산이라는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의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 나타나면서 알바니아 역시 세르비아제국에 편입된다. 특히 코소보는 스테판 듀산의 네만야 왕조의 핵심거점이었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는 당연하고, 알바니아까지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지도 일러스트 : 코소보 폴예와 프리슈티나)


그리고 세르비아의 마지막 왕, 스테판 듀산의 후손 라자르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떠밀리듯 코소보 폴예(Kosovo Polje)의 전쟁터로 나서서 발칸반도의 새로운 지배자 오스만트루크제국의 무라트 1세와 일전을 겨룬다.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 오늘날 세르비아의 민족 성지인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 대평원에서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의 신화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라자르가 전사하고, 이슬람의 무라트 1세까지 목숨을 잃어야 했지만, 세르비아군대의 전멸이라는 쓰라린 패배를 맛을 보아야 했다.


이 전투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발칸에서 마지막으로 이슬람제국에 항전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민족의 무용담이자, 세르비아의 민족혼이며, 민족정기의 성지의 탄생을 알렸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고 무라트 1세를 죽음으로 이끈 세르비아의 귀족 밀로슈 오빌리치의 이야기가 신화로 재탄생되고, 노래로, 전설로 스토리텔링과정을 겪으면서 세르비아민족의 ‘뜨거운 심장’으로 남아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이곳 코소보에 처음으로 세워진 세르비아정교회를 비롯해 수많은 역사적 유물유적이 산재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시 폴예전투에서 세르비아인만이 참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때 당시 알바니아계들도 라자르 왕을 도와 이슬람세력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슬람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군사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그리고 알바니아의 연합세력(일부 크로아티아인도 있었다는 설이 있음)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세르비아 학자들은 이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오스만트루크제국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항전했던 땅이라는 이유로 풀한 포기 남겨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코소보는 황무지로 변했고, 이곳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이 이슬람제국의 학정을 피해 북쪽으로, 남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오늘날 코소보가 무주공산으로 변했다. 그러자 시간이 점차 흐르고 인근 알바니아인들이 몰려들어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알바니아도 당대의 강력한 제국 오스만트루크의 날카로운 초승달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오스만트루크제국에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무기력한 민족이라도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그가 바로 알바니아 역사에 있어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솟은 스칸테르베그(1404?∼1468)다.    


1430년경, 부족장이었던 부친이 오스만제국에 무릎을 꿇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형과 함께 오스만트루크제국의 궁정에 인질로 잡혀가 그곳에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는 에니체리에 몸담게 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술탄의 눈에 든다. 술탄은 그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따 카스트리오티라는 본명 외에 스칸데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훗날 그의 이름 뒤의 ‘베그’란 군대의 지휘관이라는 뜻이 보태졌다.


1443년 헝가리와 오스만트루크제국사이에 분쟁이 발발하자 스칸테르베그는 오스만군대를 지휘해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오스만의 군대가 헝가리 니쉬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하자 자신의 휘하에 섞여 있던 3백여 명의 알바니아 출신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 와버린다. 이때 그는 알바니아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1444년, 그는 각지의 봉건영주를 자극해 연합군을 만들고, 스스로 지휘관에 올라 북알바니아를 통일한다.


계속된 헝가리의 반란을 이용해 그 자신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더구나 그는 기독교로 개종까지 불사하며 나폴리와 로마교황, 베네치아와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오스만제국을 상대했다.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터키제국 군대와의 토르비올리라 평원에서의 첫 전투에서 후세 알바니아인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전과를 올린다. 1천 명의 군사로 무려 2만5천 명의 오스만제국의 군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당시 전투의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펼쳤던 청산리대첩과도 같았다. 그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듯했다. 첫 승리 이후 1468년 그가 병을 얻어 목숨을 잃기까지 약 25년 간 사막에서 먹고 자며 오스만제국군과 전쟁으로 하루를 났다. 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들에 이어 1506년 손자 대까지 오스만트루크제국과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러나 오스만트루크제국의 무력에 그만큼 버텨낸 것도 기적이었다.


결국에는 알바니아의 군대가 몰살당하다시피 했으며, 알바니아는 파괴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또다시 오스만제국에 합병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고 500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알바니아 민족 대부분이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일어나며, 터키군대의 자원의 보고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 기세가 19세기까지 이어지면서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다투어 독립을 선언할 때 발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1912년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자 서구에 의해 민족이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가슴을 울리자 스칸테르베그, 그의 저항정신이 되살아나며 민족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코소보의 영웅 스칸데르베그


이 과정을 펼쳐 보면 원래 일리리아인들이 살던 땅에 남슬라브족이 몰려와 살던 중 이슬람제국을 피해 떠나면서 이전에 살던 일리리안의 후손인 알바니아계가 들어와 살았다. 코소보 알바니아계로서는 할 말이 많겠지만, 세르비아로서도 여간 억울한 상황이 아니다.


여기서 또 다른 견해가 생산된다. 즉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조상이 일리리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현재의 알바니아인들은 14세기 무렵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발칸반도를 점령할 때 함께 곁다리고 묻어서 이주해왔던 이민족이라는 것이 세르비아계 학자들 반론의 요지다. 진실이 그러하니 지금의 코소보에 사는 알바니아계는 그 옛날 일리리안의 후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코소보에 새로운 주인 알바니아인들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칸반도의 패자가 되려는 세르비아의 속주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전쟁도 불사했다. 코소보보다 적은 인구임에도 6개 공화국 중 하나로 어엿하게 이름을 올린 몬테네그로와 비교하자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결국 알바니아의 지원에 힘입어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21세기를 코앞에 둔 어느 날에 펼쳐지는 살육전의 피해를 입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민족주의를 이용해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비루한 인간이 만들어 낸 역사에 의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입었다. 역사의 면면을 들어다보면 발칸반도의 영웅들은 폭력에 의해 생산된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 까닭에 이웃에 대해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싸움을 통해 적개심만 심어주었다. 민족을 사랑하지만, 타 민족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취급하면서 따돌림은 당연했다.



* 맛보기 세계사가 끝이 보입니다.  3~4회 정도면 '코소보'를 마지막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관심 갖는이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름다운 지구촌에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멀리 달려왔습니다. 마지막 까지 힘을 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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