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폭력, 살아 있는 민족영웅
“인간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는 매우 능하지만, 권력을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그렇지 못하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한 말이다. ‘민족주의!’ 앞서 참 많이도 다룬 말이다.
민족주의는 미국 독립에 이어 프랑스 혁명, 영국 시민혁명,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 발달과 제국의 확산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절대주의 왕정과 귀족관료들에 의한 민족주의 노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자민족 중심주의가 당연시되면서 배타적이며 보수적인 국가주의로 변화되어 갔다. 19세기 말에 와서 편협하고 초월적이며,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제국주의가 경쟁 상태로 돌입했다.
기실 민족자결주의는 프랑스혁명 당시 사상가 루소에 의해 등장했지만, 그것이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성명한 14개 평화조항이 세계질서에 주요 목표로 설정되면서 곳곳에 분규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 원칙은 발칸반도나 동유럽 등 패전국 영토에 속해있던 소수민족이 대상이었고, 세계 약소민족은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속내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패전국 식민지의 넓은 땅을 갈라놓기 위한 허울 좋은 명분이었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가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면서 세기의 전쟁을 불러왔다. 개인의 자유는 물론, 인간성의 가치까지 부정되는 폭력에 정당성이 부여되면서 인류 폭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즉 민족주의의 어두운 면모가 여실이 드러나면서 자기 정체성 확립이 포장되고, 민족이나 국가의식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양산하고 주변국에 대한 억압이나 왜곡은 정당화되기에 이른다.
세계 제1차 대전, 상처만 남긴 채 전쟁이 끝났다. 본격적으로 유고슬라브 민족 간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망명정부가 속속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가 바쁘게 움직였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는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블랙핸드를 몰락시킨 세르비아의 걸출한(?) 왕 알렉산다르를 중심으로 정치적 역량이 결집되면서 야심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즉 왕정을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단일국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알렉산다르는 크로아티아 내 유고위원회의 자중지란을 위해 모종의 프로젝트를 꾸민다. 왕의 밀명을 받은 시모비치 중령은 크로아티아로 급파되어 자그레브에 사는 세르비아인 대표 스베토자르 프리비세비치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크로아티아가 자국 내 세르비아인 분열을 노린다고 부추겼다. 프리비세비치는 시모비치 중령에 의해 고국에 대해 애국심을 전달받았을 법했다. 때마침 프리비세비치가 크로아티아 내 국민회의 의장권한대행의 직책에 있었던 터라 알렉산다르의 밀명을 충실하게 받들어 스스로 크로아티아의 국민회의를 속으로부터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그레브뿐만 아니라 달마티아까지 달려가 들쑤셨다. 늘 아드리아해에 대해 야욕을 감추지 않았던 이탈리아에 대한 경계심을 들먹이며 국민회의 달마티아지부를 세 치 혀로 설득에 성공했다. 그러자 1918년 11월 달마티아 국민회의 지부는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인만의 통일 국가건설을 위해 세르비아 정부와 빠른 시일 내에 접촉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여론이 이렇게 돌아가자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국민회의는 떠밀리듯 베오그라드행 열차를 탔다. 세르비아 알렉산다르가 기획한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얼떨결에 28명으로 구성된 자그레브 대표단이 세르비아에 파견됐다. 이때 세르비아 알렉산다르 왕은 제헌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섭정통치를 맡는다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합헌적 통치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자신에게 법률제정권과 거부권을 명문화해버렸다. 웃기게도 합헌이냐 불법이냐 판단은 자신의 몫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즘의 희망과는 달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연방제가 아니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노렸다. 살얼음 판 위에서 동상이몽을 꾸고 있던 중에 보이보디나 지역 노비사드에서 대의원들이 모여 세르비아와 통합을 논의하면서 먼저 유고슬라비아 국가 구성을 찬성한다며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대의원이 대부분 세르비아인이라 결과는 하나마나였다. 또 몬테네그로도 유고슬라브족 통합을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발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세르비아 대표단과 협상테이블에 앉은 크로아티아 대표단은 하나의 통합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는 카라조르지예의 왕가의 지도아래 한 살림을 꾸리기로 했다며 발표했다.
블랙조지 카라조르지예가 누군가? 19세기 오스만제국 에니체리 폭정에 맞선 농민출신 지도자가 졸지에 발칸반도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진골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드디어 한 지붕 아래에 여러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세계만방에 힘을 과시하면서 스스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꾼다.
유고슬라비아 왕을 비롯해 총리까지 세르비아인이 차지하면서 겨우 부총리와 외무장관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몫으로 돌아가자 무게의 중심 추는 시작하기도 전에 기울었다. 더구나 왕권과 군권까지 장악한 알렉산다르는 무소불위의 힘을 구축했다. 민주정인 이상 견제세력인 야당도 존재했다.
그러나 제1야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링에 오르기도 전에 알렉산다르는 농민당을 해산해버린다. 한발 더 나아가 당수인 라디치에게 자객을 보내 저승행 열차에 태워버리면서 주변정리를 깔끔(?)하게 마무리 했다. 라디치가 볼셰비키의 불순한 사상에 물들었다는 여론을 조작하면서 암살사건은 유야무야 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유고슬라브민족 통일국가 꿈이 워낙 장밋빛이다 보니 대세르비아주의 욕망은 아지랑이에 가려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힘 있는 자리에는 세르비아인의 관료로 채워지는 것을 세르비아는 당연시 했다. 누가 보더라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자연스럽게 세르비아에 흡수합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크로아티아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반란의 기운이 소물소물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라디치가 불의의 객이 되면서 본격화된다.
그러나 이는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이라는 목표가 눈앞에 왔다고 판단한 알렉산다르가 기다리던 바였다. 거칠 것이 없었던 왕으로서는 소요진압에 목검이 아니라 핏빛을 머금은 광휘의 진검을 뽑았다. 1929년 1월 새해, 신년벽두가 밝아오자 알렉산다르는 헌법을 폐지하면서 자신 스스로 왕정, 즉 독재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세 나라의 통치권자, 군 통수권자, 고위관리 임명권자인 알렉산다르는 정당까지 모조리 해산시켜버렸다.
폭정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사람들 사랑을 받자 반대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인은 졸지에 속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선거를 위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9개 구역으로 새롭게 확정하면서 게리맨더링했다. 이는 각 지역구마다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크로아티아 두 명, 슬로베니아인 한 명에 그친 반면 세르비아인 의원은 무려 6명이나 나왔다. 발칸의 영원한 이방인이자 슬픈 이슬람교도는 그 어디에서도 선출되지 않았다.
이처럼 불합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지방 자치권은커녕 새롭게 헌법을 개정하고, 누가 보더라도 엄명한 독재정을 확정지으면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인 왕국’에서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이 탄생한다. 그리고 정해진 순서인 양 반정부인사에 대한 탄압이 막이 올랐다. 세르비아인 식민백성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탄압을 피해 망명의 길을 올랐고, 서러운 눈물을 빨면서 복수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아야 했다.
1933년 라디치 사후 농민당을 암암리에 이끌던 블라드코 마체크가 그해 4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구금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구금과 통제는 통일왕국 최초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낸 인사들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아 땅에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대한 비극적 사건은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었다.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은 그야말로 하층민으로 추락했다. 더구나 크로아티아에서 유고슬라비즘의 주역 ‘프레차니’의 대표자격인 세르비아인 프리비세치마저도 투옥된다.(알렉산다르 밀명을 받은 시모비치 중령에게 설득당해 세르비아 왕을 위해 자중지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훗날 체코로 도망치다 시피 해서 살다가 193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프레차니들은 엄연히 타국 땅에서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늘 살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그럴수록 자신들끼리 더욱 똘똘 뭉쳐 베오그라드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Landesarchiv Baden-Württemberg, Staatsarchiv Freiburg, W 134 Nr. 026020, http://www.landesarchiv-bw.de/plink/?f=5-92156
사진작가 / 윌리 프라거 (1908~1992)
이때 알렉산다르의 폭정을 피해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오른 인물 중 파벨리치가 있었다. 그는 크로아티아 극우보수정당 민권당의 당수로서 대크로아티아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다. 그는 망명지인 이탈리아에서 극우민족주의 단체인(세르비아의 시각에서는 반란단체지만) ‘우스타샤’를 조직했다.
우스타샤의 최종목표는 순진하고 바보스럽기만 했던 과거, 세르비아에 나라를 헌납한 치욕적인 역사를 뒤집을 크로아티아 독립이었다. 그 과정이나 방식은 반드시 무력을 통해서였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의 지원 하에 세르비아인 학살의 선봉에 선다. 알렉산다르 역시 이들의 손에 죽음을 면치 못했으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역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알렉산다르와는 하등에 관계없는, 권력의 단물을 단 일도 빨아본 적이 없는 단지 세르비아인, 즉 프레차니란 이유로 죽어야 했던 사람들,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의 주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각설하고, 알렉산다르의 대세르비아주의는 일단의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알렉산다르는 탁월한 외교술을 발휘하면서 문화의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프랑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이익이 나지 않는 곳에서 저희들끼리 지지고 볶고 뭐를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국제사회다. 유고슬라비아 친 프랑스 정책은 반 이탈리아로 대두가 된다. 원래가 발칸반도 여러 민족은 이탈리아라면 이를 갈았다. 아드리아해에 대한 지배권을 위해 이탈리아의 집요한 침략에 대한 반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1934년 10월 알렉산다르는 사랑을 확인받고, 대내외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방문했다. 그 역시 인간이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 알았다면 과연 그가 그따위 독재정을 비롯해 차별적 정책을 버젓이 펼칠 수 있었을까. 알렉산다르는 의기에 넘치는 마케도니아 출신 슬라브인에게 암살당해 불의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암살자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지만, 이탈리아 사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우스타샤 조직원일 가능성이 크다.
알렉산다르가 암살당하자 11세의 그의 아들 페타르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자 사촌 폴(파블레)이라는 왕자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수렴 뒤에 신임 총리가 대리청정하고 있었다. 신임 총리에 밀란 스토야디노비치가 오르면서 마치 영조대에 탕평책을 쓰듯 세르비아급진당을 비롯해 보스니아 이슬람과 슬로베니아 국민당 등 여러 계층과 민족을 껴안으려 노력했다.
그 역시 건국 초기 외교에 치중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와는 반대로 프랑스 사랑을 뿌리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게 사랑을 구걸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독일 나치가 상당하게 매력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또 시위라는 뜻의 폭력조직 ‘즈보르(Zbor)’를 창설해 대세르비아주의를 지상과제로 설정했다. 더 나아가 휘하에‘ 흰독수리’단을 만들어 마치 어린이들 병영놀이처럼 청년조직을 꾸렸다. 알렉산다르에 의해 괴멸된 ‘블랙핸드’ 귀신이 환생했다.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그는 히틀러 친위대 SS단(검은 셔츠단)을 벤치마킹해 ‘녹색 셔츠단’을 만들어 세르비아극우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 시위라는 뜻의 폭력조직 ‘즈보르(Zbor)’를 창설해 대세르비아주의를 지상과제로 설정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