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나, 그 접점을 찾아서…
제1회 정조문화상 수필부문 수상작
* 2011년에 쓴 글을 급하게 수정하면서 정신 없이 달려온 듯합니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을 찾아 쓴 수필 한 편 올립니다.
넋이라도 나간 듯 퀭한 눈으로 나를 보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진 얼굴, 코끝에서 흘러내린 나태가 덥수룩한 수염에 엉켜있다. 그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 잔상이었다. 성리학의 근엄한 맛에만 취해 집안에 무관심했던 아버지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가장의 의무를 팽개쳐버린 내게 무책임을 감추는 유일한 도구는 침묵이었다. 아내의 은근한 압력에 머리가 무거워지면 실업자의 멍에를 이유로 자발적 유배객이 되어 침묵의 길을 떠나곤 했다. 15년을 낱장으로 길바닥에 버린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지적유희? 지적호기심? 유랑자의 낭만? 지금까지 이것들을 어느 정도 충족했지만 여전히 나는 배가 고팠다. 일단, 선조의 흔적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며 주섬주섬 모은 조각을 모아 책을 내고 싶었다. 한 권의 책을 엮는 일은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나를 되찾는 기회였다.
골방에 틀어박혀 자판을 두드리며 글과 사투를 벌인 시간은 길었다. 길에서 만난 유적은 말이 없었지만 나는 유적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집에서 침묵하던 나는 말동무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눈 대화가 글에서 얼마나 진하게 우러날까만, 그래도 쓰고 또 썼다. 결실을 기다리는 시간은 잔칫집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한편엔 두려움이 맴돌았다. 지적 허영이 도를 넘은 것은 아닐까.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닐까. 숱한 걱정 속에 첫 책은 태어났다.
책을 내고 기다림에 지칠 즈음, 봄길 따라 내 삶에게 반전이 왔다. 그것은 여행 밖에 모르는 무능력한 남편이자 아버지인 내가 모처럼 어깨에 힘을 주는 일이었다. 남해 유배문학관에서 역사 속 유배객들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의뢰해 온 것이다.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열한 꼭지를 써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짭짭한 수입의 유혹은 그것을 잊기에 충분했다. 초조대장경의 고려 현종, 역사의 폭군으로 불리는 광해군, 서포, 다산, 추사 ……, 인물을 짚어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니…….’ 언감생심,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 지식과 직관으로 다산의 사상과 정신에게 잣대라도 제대로 댈 수 있을까?
천근만근 고민하다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은 일단 가장 뒤로 미루기였다. 그러나 미룬 일도 곧 닥치는 법, 결국, 다산 선생 앞에서 펜을 뽑아야 했다. 막상 펜은 뽑아들었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자료만 뒤적이고, 묵직한 머리만 며칠 흔들다보니 얄팍한 생각이 맴돌았다. 검증된 역사적 사실만 간략히 기록한 채 대충 얼버무릴 것인가. 아니면 유배에 관련된 이야기에만 집중할 것인가. 하지만 무책임한 심성을 눌러야했다. 글 몇 줄이 역사에 죄가 될 수도 있다. 궁리 끝에 몇 해 전 강진군 다산초당을 답사할 때 찍은 사진을 뒤져보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반짝이는 것이라곤 없는 암흑이었다.
일단 가자, 고관대작으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벼랑 아래로 떨어진 선생의 심정을 안방에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만나면 어떤 영감이라도 오지 않을까. 나주의 밤남정 삼거리 작은 초막에서 흑산도로 유배 길을 떠나는 형 약전과의 이별을 눈물로 노래한 <율정별리>를 떠올리며 강진으로 길을 떠났다. 초여름 이른 장마가 길을 적셨고 그 축축한 기운은 길손의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선생은 당시 혼탁한 세상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세속의 부정에 분개하며 시대를 아파했지만, 그렇다고 노론 벽파의 음모로 세상에서 쫓겨나 처량한 신세가 된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권력무상을 절감하며 초라한 밥집 귀퉁이에 빌붙어 한숨과 술로 보낸 날들, 그 애환이 서린 동천여사東泉旅舍 사의재 터에서 나는 내 한 때를 회상했다.
무기력한 도시의 방랑자가 되어 술로 세월을 절이던 시절, 절망이 가슴을 조일 때마다 그것을 마취시키기 위해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어머니는 마치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죽은 듯 쓰러진 아들의 모습을 보던 어머니는 한숨을 섞어 말씀했다. “세상은 짧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만큼은 아니다.”라고, 오던 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다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지팡이도 타인도 아닌 어머니였다. 그것이 어머니의 힘이었다.
다산 선생도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여기서 새로운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 선생을 바라보던 주막 노파도 지난한 세상의 한 어머니였다. “밤의 씨앗은 밤으로 태어나고, 벼의 씨앗은 벼가 되는데, 그것을 이루어내는 것은 씨와 토양이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벽진 곳에서 밥이나 술을 파는 노파의 말에 다산은 분명 놀랐을 것이다. 더 배우고 덜 배우고를 떠나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거친 세월을 이겨낸 연륜의 지혜일 수 있지만, 보잘 것 없는 노파가 선생에게 하늘과 땅 사이에 흐르는 신묘한 이치를 깨우쳐주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선생은 생각과 용모, 말, 행동, 이 네 가지에 대한 경계를 담아 그곳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을 짓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비 개인 하늘처럼 마음이 한결 투명해지자 세상도 멀리 보였다. 그러자 생각의 지평이 열렸다. 늘 백성의 아픔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던 터라, 저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상적 학문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 실천학문이었다.
기억 끝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따뜻한 접촉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삶의 자양분으로 나를 거듭나게 했고, 세파에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추가 되었다. 비록 일천한 지식의 나열이지만 책이 나오자 제일 먼저 어머니 묘소를 찾아 책장을 넘겼던 이유도 어머니의 가없는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였고 나에 대한 다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선생을 만날 수 있지 않는가.
다산초당을 찾아 오르는 길은 가슴이 설렌다. 선생이 10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비가 내린 뒤라 몸은 눅눅하지만 숲이 내뿜는 향기는 달기만 하다. 초입에 진열해 놓은 ⟪목민심서⟫앞에서 이렇게 맑은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위정자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현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선생은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차마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선생이 오르내렸을 길을 따라 걷는다. 해배의 길은 요원한데 그것을 잊고 집필에 몰두하는 선생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적한 툇마루에 앉아 선생이 바라보던 곳을 보노라면 내가 감히 선생이 되어 선생의 심정을 읊는다.
선생은 10년 동안 세월만 낚지 않았다.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가슴을 쥐어짜며 먹을 갈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생각하며 붓을 놀렸다. 학문이 아무리 고결한들 이상만 추구하는 학문이 어찌 백성을 잘 살게 할 것인가. 어찌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인가. 홍익인간이 곧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실천 지침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남긴 저서가 오히려 후세에 평가를 받으니, 역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는가보다.
오솔길을 지나 천일각에 이르자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뱃길을 넘으면 흑산도가 있다. 내 어머니가 떠오른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눈물을 흘리며 내려다보던 모습이 수평선 너머에서 아른거린다. 가끔 어머니는 ‘흑산도 아가씨’를 흥얼거리셨다. 형의 저지레로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한숨을 섞어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선생은 이곳에서 흑산도에 유배가 있는 형 약전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선생은 정조대왕을 18년 동안 모셨다. 그리고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또한 유배생활을 마치고 18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숫자가 선생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은 세속의 생각이 풀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의 의미가 있지 않겠나. 부귀영화만 주어졌다면 선생은 후세가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을 사상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선생에게 같은 주기로 다른 삶을 준 이유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내 방랑의 주기를 생각하며 선생에게 이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여쭙는다.
선생의 흔적에서 가슴에 담은 것들을 머리에 옮기고 다시 메모노트에 빼곡히 정리한다. 비록 수박 겉핥기지만 다시 한 번 더 깊은 뜻을 배우러 선생을 뵈러올 때 소중한 씨알이 될 것이다.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인 뒤 발길을 돌린다. 초당 뒤 바위에 선생이 새겨놓은 ‘정석丁石’이라는 글귀가 잔상으로 남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등 뒤에서 선생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리는 것 같다.
“나 항상 여기 있으니, 언제든 다시 오시게.”
(2012)